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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운 Oct 28. 2018

'나'로서 살아갈 권리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고

나는 오피스텔에 산다. 말이 오피스텔이지 고시원보다 조금 넓은 방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원룸 건물이다. 내 방에 가려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방들이 마주 보고 있는 복도 사이를 조금 걸어야 한다. 그 복도를 지나오다 보면 가끔 닫힌 문에 경고장이 붙어있는 것을 본다. 3개월 동안 관리비를 내지 않아 수도와 전기를 끊겠다는 관리실의 최후통첩이다. 처음에는 관리비 납부를 잊어버렸거나, 집을 오래 비워서 그런 줄 알았는데 특정 호수에만 몇 달 간격으로 계속 경고문이 붙어있는 것을 보고 관리비를 못 내는 상황임을 짐작했다. 어떤 형편으로 관리비를 못 내게 되었는지보다 대체 한 달에 10만 원 정도밖에 안 되는 관리비를 왜 못 내서 저런 부끄러운 통지서를 문 앞에 붙여놓고 살까, 나는 절대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먼저 하던 나였다.


오늘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봤다. 돌이 내려앉은 것처럼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떤 이에게는 상관없는 일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현실이다. 관리비 경고장을 문앞에 붙이고 사는 5XX호의 누군가도 강서구의 다니엘일 수도 있으며, 미래의 나도 다니엘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다니엘 블레이크는 부인과 사별하고 자식 없이 영국 뉴캐슬에 홀로 살아가는 중년이다. 목수 일을 해왔지만 심장질환으로 일을 쉬는 형편이다. 국가에 질병 수당을 신청하지만 형식적이고 무성의한 자격심사 기준에서 탈락한다. 구직수당을 받기 위한 신청절차는 까다롭고 불합리하다. 수당을 신청하러 간 관공서에서 자신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 놓인 어린 자녀 둘을 홀로 키우는 케이티를 만나 그의 가족을 도우며 우정을 쌓는다. 하지만 현실은 다니엘과 케이티에게는 냉혹하고 상황은 갈수록 나빠진다.


위정자들, 사회의 높은 곳에 있고 힘있는 사람들에게 특히 보여주고 싶은 영화다.


영화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복지정책과 그 정책을 만들고 행하는 이들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영화를 보면 약자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형식적인 복지 시스템과 관료적인 공무원들의 행태에 분노하게 된다. 약속 시각에 조금 늦었다고 생계수당 지원을 제재하거나 원리원칙만 따지며 어려운 이들에게 별 도움이 되어주지 못하는 공무원, 그들을 그렇게 만든 정책과 관료적인 시스템, 나아가 국가는 누구를 위해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영화의 한 축을 담당한 케이티의 이야기는 제대로 바라보지 못할 만큼 가슴 아픈 현실을 보여준다. 식료품을 지원받으러 간 지원소에서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자신도 모르게 통조림을 뜯어 먹다 들킨 장면에서는 너무 놀라 영화를 잠시 멈추기도 했다. 식료품 지원소에서 제공하지 않는 생리대와 데오드란트를 마트에서 훔치다 잡혔을 때, 가난 때문에 성매매를 선택하게 되고 다니엘에게 알려지는 장면도 궁지에 몰린 비참한 현실을 여과 없이 보여줬다. 늪에 빠진 것 같다는 케이티의 말이 오래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사진으로 봐도 마음이 아프다. 세상의 케이티들이 아프지 않는 사회가 되길 빈다.


영화에서는 힘없는 개인의 연대를 보여준다. 다니엘은 이웃을 도울 줄 아는 사람이다. 아무도 나서지 않는 상황에서 곤경에 처한 케이티를 위해 나서준다. 자신보다 더 어려운 상황의 그녀를 위해 집을 수리해주고 밀린 전기요금을 선뜻 건넨다. 다니엘도 주위로부터 작은 도움을 받는다. 구직수당을 인터넷으로 신청하기 위해 처음 만난 사람에게 PC 사용법을 묻고, 이웃 젊은이의 도움으로 신청에 성공한다. 절차만 중요시하는 관공서의 사람들 속에서 앤 이라는 친절한 상담원을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 모두 다니엘에게 근본적인 도움은 되지 못한다. 어려운 이들끼리의 작은 연대는 분명 힘이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니엘은 자신의 권리를 지키는 사람이다. 집 앞에 쓰레기를 치우지 않는 이웃에게 잔소리를 하고, 집 앞마당에 싸놓은 반려견의 변을 치우지 않는 사람에게는 한바탕 욕을 퍼붓는다. 인간답게 살 권리를 잃게 된 그는 관공서 벽에 자신의 이름과 형식적인 복지정책을 비판하는 낙서를 한다.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이고 자신의 의견이 철저히 무시되는 상황에서 낙서를 하는 것만이 나의 존재감과 권리를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인 현실이 안타깝다. 영화에는 배경음악이 나오지 않는다. 음악을 사용해서 비참함을 과장하지도, 슬픔을 포장하지도 헛된 희망을 주지도 않는다. 차가운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던 감독의 의도가 아닌가 싶다. 


누구나 나이가 든다. 나이드는게 공포가 되어버린 사회라면 문제가 있는것이 아닐까


동정을 원하거나 구걸하지 않고 삶 속에서 떳떳했던 다니엘. 그저 하나의 인간인 다니엘 블레이크로 살아갈 권리를 찾고자 했던 그의 목소리를 많은 이들이 돌아봐야 할 것 같다. 다니엘은 자신에게 친절했던 관공서 직원 앤에게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은 것'이라는 말을 남긴다. 자존심을 잃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이 사회에서 나는 어떤 모습으로 늙어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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