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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운 Oct 30. 2018

차별이라는 이름의 공포

<겟 아웃>을 보고

이런 공포영화가 좋다. 깜짝 놀라게 하는 장면 없이도 차곡차곡 긴장감을 쌓아가며 소름을 돋우는 차분한 공포 말이다. 극도의 긴장감을 느끼는 데는 스릴러가 더 낫겠지만, 심장박동이 느려지는 차가운 공포감을 맛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 면에서 <겟 아웃>은 꽤 적합한 영화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소름 끼치는 상황에 갇혀버린 주인공의 상황에 이입하며 영화 속의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 어쩌면 그 세계는 애써 외면하던 우리의 현실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흑인 남자 주인공이 백인 여자친구의 고향집을 방문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여자친구의 가족은 주인공에게 잘 대해주는 듯 하지만, 은연중에 인종차별적인 모습을 보인다. 때마침 여자친구의 집에서 인근의 백인들이 모이는 파티가 열리고, 그곳에서 마치 흑인을 처음 본 듯한 태도의 백인들과 전혀 흑인처럼 행동하지 않는 흑인 한 명을 만난다. 주인공은 비정상적인 그들의 모습에 불편함을 느끼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여자친구의 가족들은 돌아가려는 그를 방해하고 숨겨져 있던 그들 가족의 끔찍한 진실이 드러난다.


차별과 혐오를 다루는 이야기에서는 더 예민한 시각, 경계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포스터부터 흑과 백의 대비로 구성한 이 영화는 처음부터 흑인차별을 다루고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영화 내내 일상에서 이뤄지고 있는 차별을 보여준다. 여자친구의 집에 방문하던 길에 발생한 사고로 출동한 경찰이 보조석에 타고 있던 주인공에게 이유 없이 신분증 제시를 요구하는 장면, 중산층 백인 가정 안의 흑인 정원사와 가정부, 흑인인 주인공에게 무례한 남동생과 흑인 가정부에게 함부로 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관객인 나에게나 극 중 여자친구에게는 불쾌한 일이지만 일상적인 차별에 익숙해 있는 주인공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흑인을 대하는 미묘한 차별의 시선도 보여준다. 첫날의 저녁 식사에서 여자친구의 남동생은 주인공의 신체능력을 찬양하며 운동을 열심히 했다면 짐승처럼 강해졌을 거라는 말을 하고 이어진 백인들의 파티에서 주인공의 손아귀 힘, 근육, 매끈한 피부를 칭찬한다. 언뜻 보기에는 흑인의 신체조건이나 운동능력을 칭찬하는 듯하지만 흑인들은 신체적인 부분에서만 우수하다는 매우 차별적인 관점이 담겨있다. 요새는 조금 줄긴 했지만 얼마 전까지 인터넷상에 '흑형'이라는 말이 흔하게 사용되었다. 신체, 운동신경, 리듬감 등이 뛰어난 흑인을 친근하게 부르는 말로 사용된 것이지만 그 자체로 차별적인 것과 같다. 


누구나 어떤 면에서는 소수자, 약자가 된다. 차별을 금지하는 것은 결국 나를 위한 것이다.


영화속의 여러 상징과 복선은 해석을 풍성하게 한다. 여자친구의 집에 차를 타고 방문하면서 치어 죽인 사슴은 약한 흑인을 상징한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사슴을 쥐에 비유하며 생태계를 점령하며 파괴한다고 혐오하지만 결국 박제된 사슴의 뿔에 찔려 죽게된다. 저녁식사에서 디저트로 나오는 당근케이크도 주인공을 사냥당하는 토끼와 같은 처지로 보여주는 장치로 보인다. 어둡고 눈에띄지 않는 옷을 입던 주인공의 여자친구도 본색을 드러낸 후 하얀 셔츠를 입고 흰 우유를 마시는 장면도 흥미롭다. 

주인공의 몸을 경매에서 낙찰받고 뇌이식 수술을 앞둔 눈먼 미술품 딜러에게 주인공은 이렇게 묻는다. 왜 흑인이냐고. 그는 그저 주인공의 눈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야생의 모습을 담는 사진작가가 되기를 원했지만, 재능이 없고 시력도 잃어버린 그가 재능있는 사진작가인 주인공의 눈을 원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면서도, 굉장히 이기적인 일이다. 물건을 빼앗은 후 왜 나였냐고 말하는 피해자에게 그저 네가 그것을 갖고 있었을 뿐이라고 답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차별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고 그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아주 이기적인 마음이 담겨있다는 것처럼 보였다. 

그 마을에서 6개월 전 실종된 흑인 '드레'는 주인공이 사진을 찍으며 터진 플래시에 자신을 찾고 주인공에게 당장 여기서 나가라며 소리친다. 내가 무엇을 하는지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지만 정작 행동은 결정하지 못하는 몸 안의 손님이 되는 수술에서 도망치는 길은 어떤 것일까. 영화가 끝나면 영화속의 공포는 끝나지만, 현실 속의 차별이라는 이름의 공포는 계속된다. 편견과 차별에 가려진 우리를 눈뜨게 할 플래시를 생각해보게 한다.


플래시는 어떻게 켤 수 있을까. 차별에 대해 생각하고, 얘기하는게 그 시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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