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스터 콜>을 보고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 그 중에서도 전통적인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좋다. 이미 현실에서는 사라져버린 권선징악이나 마냥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에 위로를 얻는다. 현실감각 없이 이상에만 매달려사는 내 성격 때문이기도 하다. 오늘 본 <몬스터 콜>도 나무 괴물 아래서 잠든 소년을 담은 포스터만 보면 아름답고 꿈같은 동화처럼 보였다. 하지만 영화는 예상과는 달랐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진실, 그리고 그 진실을 바라볼 용기에 대해 말하는 아주 현실적인 영화였다.
코너는 큰 병을 앓고 있는 엄마와 단둘이 살고 있다.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자기 세계에만 빠져있는 그는 매일 밤 같은 악몽에 시달린다.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갈라진 땅 속으로 엄마가 빠지는 것을 보고 구하기 위해 달려가 엄마의 손을 잡지만 결국 그녀를 놓치고 마는 꿈이다. 어느 날 밤 코너에게 집 근처 묘지에 있는 나무 괴물이 찾아온다. 괴물은 자신이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서 네 번째 이야기는 네가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이야기는 코너가 숨기고 있는 것, 매일 밤 꾸는 악몽에 관한 진실된 이야기라고 한다. 엄마의 병은 갈수록 심각해져가고 그 사이 나무 괴물은 찾아와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결국 엄마는 죽음을 앞두게 되고 그때 괴물이 찾아와 네 번째 이야기를 코너에게 들려달라 한다. 진실의 이야기를.
괴물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동화 같은 게 아니다. 처음의 이야기는 마녀 왕비에게 독살당한 왕의 손자가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을 딛고 일어나, 마녀를 물리치고 왕위를 되찾아 백성들을 행복하게 했다는 전형적인 옛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마녀는 왕을 독살하지 않았고 왕을 사랑했으며, 왕의 손자는 여인을 자신의 손으로 죽인 후 왕비가 여인을 죽였다고 모함하여 왕비에 대한 백성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결국 왕의 자리를 차지했다. 사실을 알지 못하는 백성들은 새로운 왕을 사랑한다는 것이 이야기의 진실이다. 목사의 딸을 구해주지 않은 약제사 대신 딸의 병 앞에서 신에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목사의 집을 부숴버린 나무 괴물의 두 번째 이야기, 사람들에게 관심받지 못하는 투명인간 아닌 투명인간이 괴물을 불러들인 세 번째 이야기도 여느 동화와는 거리가 멀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어리석음, 비틀어진 현실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괴물에게 세 가지 이야기를 듣고 나서 엄마의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코너가 힘들게 꺼내놓은 네 번째 이야기는 잔인한 진실이다. 코너가 매일 밤 꾸는 엄마를 구하지 못하는 악몽은, 사실 엄마가 떠나기를 바란 그의 무의식이 드러난 것이었다. 엄마의 병을 인정하지 않고 다 나을 거라고 말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엄마의 병의 심각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혼자되는 것을 두려워해서 그녀의 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었다. 엄마를 너무 사랑하면서도 그녀가 고통받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힘들어 차라리 다 끝나버렸으면 하는 어린 아이가 인정하기 힘든 모순같은 마음이 있었다.
삶은 동화가 아니다. 어쩌면 잔혹 동화에 더 가깝다. 코너는 마음 깊은 곳에 있던 진실을 꺼내놓으며 성장한다.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슬픈 현실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배웠다.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한번은 겪어야 할 일이다. 나이를 먹고도 항상 예쁘고 아름다운 이야기만 좋아하며,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나에게 때마침 이 영화가 찾아왔다. 더 잔인한 진실은 코너에게 진실을 알려준 나무 괴물은 현실에서는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코너의 아버지는 엄마의 병세를 인정하지 않고 다 좋아질 거라고만 얘기하는 코너에게 힘들겠지만 용감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진실을 바라볼 수 있는 용기. 그 용기가 우리에게 나무 괴물이 되어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