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뮤지컬과 입시 의상을 고르는 건 어떤 연기를 하냐는 것만큼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었다. 학교마다 의상 규칙이 조금씩 다르기도 했고 옷을 어떻게 입느냐에 따라 몸매와 이미지가 달라 보였기 때문이다.
보통 깔끔하게 위아래 모두 검은색 의상을 입곤 하지만 그 검은색 의상이라는 것도 천차만별인지라 우리는 각자에게 맞는 옷을 골라야만 했다. 레깅스를 입을 것인지, 통이 넓은 바지를 입을 것인지, 치마를 입을 것인지.. 입는다면 길이는 어떻게 할지, 소재는 어떤 걸로 할지, 노출은 어느 정도로 할지... 최대한 자신의 장점을 부각하면서 준비한 연기에 잘 어울리는 것들로 입어야만 했다.
입시 친구들과 나는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명동, 동대문, 강남, 잠실, 고속터미널 등 옷이 많은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갔고 이것저것 입어보며 서로에게 뭐가 더 나은지 봐달라고 했다. 그리고 제일 낫다고 생각되는 것을 찍어 선생님께 확인받고는 했다.
한 번은 이런 적이 있었다. 내가 입시를 하기 전년도에 연극영화과 6관왕을 한 학생이 있었는데 합격 후기 영상에서 나오는 무용 의상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일단 그 언니가 정말 예뻤고 말랐으며 무용을 잘해서 그랬을 것이다. 그 의상을 입으면 내 무용도 조금 더 나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누군가를 따라 한다는 마음을 그다지 들키고 싶지 않았기에 사람들 몰래 비슷한 옷을 찾아 혼자 명동이나 동대문을 돌아다니고는 했다.
(2021-06-11의 덧붙임 말. 나중에 알게 된 사실 : 드라마 펜트하우스에서 낯이 익은 얼굴이 있어 찾아봤더니 그 6관왕 언니가 바로 주석경 역을 맡은 한지현 배우였다. 당시 입시생들 사이에서 입시 레전드로 불렸었다는.. 신기해!)
쇼핑몰 건물로 들어가서 그와 비슷한 옷을 찾기 시작했다. 흰 레이스 소재의 오프숄더 상의였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그와 비슷한 것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비슷한 것을 하나 찾았지만 뻣뻣한 소재였기에 입는 것부터가 큰 불편함이었다. 그렇게 지역을 옮겨 다니며 한 일주일을 찾아다녔을까, 한 쇼핑몰의 꼭대기 층 구석 옷 매장에서 그 옷을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착용이 불가능한 옷이었지만 겨우 발견하게 옷인 데다 달랑 하나 남아있었기 때문에 앞뒤 잴 거 없이 옷을 바로 구매했다. 집으로 가서 얼른 입어보고 싶었다.
‘나도 이거 입으면 그 언니처럼 여리여리 해 보이겠지? 무용도 엄청 잘해 보일 거야.’
설렘 가득한 마음으로 집으로 달려간 뒤 상의를 벗고 그 옷을 얼른 입어보았다. 기대 한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 언니가 입었던 옷이랑 똑같았기에 마음이 들떴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나 이거 구하느라 일주일은 걸렸는데, 겨우 하나 남아있었어. 다른 애들도 엄청 찾겠지?’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얼른 입시 선생님에게 컨펌받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 옷만 있으면 왠지 합격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부푼 마음으로 학교에 가져간 뒤 입시 수업시간에 입어보았다. 커튼 뒤에서 잽싸게 갈아입은 뒤 친구들과 선생님 앞에 섰다.
하지만 반응이 없는 사람들.
‘왜지..? 혹시 그 언니가 입은 거 따라 했다는 걸 들킨 건가? 아니면 나한테 안 어울리나..?’
선생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셨다.
“너랑 안 어울려.”
거기에 친구들도 합세한다.
“맞아 슬기야 너 전에 입었던 게 더 잘 어울려.”
“너 그거 입으니까 조금 칙칙해 보임.”
마음이 꿀꿀했다. 내가 얼마나 애타게 찾은 건데. 그렇게 안 어울리나? 하며 뒤돌아 거울을 바라보았다. 어젯밤 느꼈던 만족감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초라하게 보이는 내 몸뚱이만이 거울에 비쳤다.
‘어? 어제는 좀 괜찮았는데.’
나쁘지 않다는 정도의 말을 기대하며 다시 선생님과 아이들에게 물었다.
“그래도 나쁘지 않지 않아요?”
“아니야. 안 어울려. 색깔도 안 어울리고 소재도 별로야.”
팩트 폭격을 당한 뒤 시무룩해진 내게 친구가 다가왔다.
“야. 너 그거 그 학교 다 붙은 OOO언니가 입은 거 맞지?”
뜨끔. 따라 했다는 걸 들키기 싫었다.
“응 예뻐서 샀는데 비슷하더라.”
하지만 친구는 다 간파했다는 듯 킬킬 웃으며 말했다.
“너 전에 입은 게 훨씬 잘 어울렸어. 너 연기 대사랑도 어울리고, 피부톤도 어울리고.”
“... 그래?”.
아쉬웠지만 그 후로 그 웃은 입지 않았다. 심지어 반품도 안 되는 곳에서 산 거라 그냥 옷장 어딘가에 처박아 두었다. 그리고 나는 결국 검은색의 달라붙는 재질의 깔끔한 상의에 학교 선배에게 빌린 언밸런스한 길이의 쉬폰 치마를 입고 시험을 보러 다니고는 했다. 그리고 결과는... 좋았다.
합격생을 따라 하고 싶던 시기가 있었다. 생활패턴, 먹는 음식, 입는 옷, 듣는 음악, 취향, 가치관, 말버릇 등 그들을 똑같이 카피하면 나도 똑같이 합격할 줄 알았다. 뱁새가 황새 따라 하려다 가랑이 찢어지진 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웬걸? 뱁새가 얼마나 귀엽고 앙증맞은지, 황새를 따라갈 필요가 전혀 없었다. 내게는 나만의 개성이 존재하고 있었다. 내 깃털은 따로 있었고 그건 아무도 어울리지 않는 내 깃털이라는 것도 늘 마음속에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건 나와는 다른 멋짐을 가진 황새들을 부러워하다 생긴 하나의 에피소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