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격 질문을 아십니까
2018-09-04에 작성된 글.
실기 시험 날짜가 다가오면서 알게 된 소문이 하나 있었다 바로 ‘합격 질문’. 입시 선생님들이 말하길 동국대학교 연극학과 실기 시험에는 합격 질문이라는 게 있다며 그 질문은 매년 바뀐다고 했다. 많은 입시생들이 누구든 알던 소문이었으며 그들 모두는 자신이 합격 질문받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동대에 합격 질문이라는 게 있다며?”
“근데 그거 키 큰 애들한테만 물어본대. 맘에 들거나.”
“난 애초에 받지도 못할 듯.”
합격 질문이 있다는 소문은 아이들의 기대를 높여주는 동시에 포기의 마음 또한 들게 만들었다. 그 합격 질문이라는 게 대단한 건 아니었고 그저 키를 물어본다던지, 내신을 물어본다던지, 다리 찢어보라던지 등의 간단한 것들이라고 했다. 그리고 매년 1차 합격된 사람들의 후기를 종합해 보았을 때 공통적으로 나온 질문이 있다면 그게 바로 합격 질문이 되는 셈이다. 합격 질문을 하는 이유가 마지막으로 결정하기 위한 심판의 질문인지, 아니면 합격 확정을 알려주는 비밀의 신호인지는 몰랐지만 일단 받아보기라도 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시험을 보기 전까지 그 이야기는 그저 소문일 뿐이었다. 친구들과 나는 그 질문이 뭘까 궁금해하며 추측하고는 했다. 연극학과의 전통이 깊은 동국대학교는 중앙대, 한예종과 함께 아이들이 지원하는 학교 1순위에 오르내리고는 했다. 그랬기에 더욱 궁금증은 컸을 것이다.
“야, 근데 그거 들어도 합격 질문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합격한 뒤에 알겠지”
“그럼 우리 시험 보고 나서 질문 뭐 받았는지 얘기하자 오키?”
“그래”
우리 모두는 시험을 보고 난 뒤 서로 후기를 공유하기로 약속했고 그렇게 실기 날짜는 다가왔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내가 그 합격 질문의 주인공이 되리라 하는 비밀스러운 다짐에 살짝 들떴다. 하지만 평소와 다름없는 마음가짐으로 시험을 보러 갔다.
동국대학교 캠퍼스에 도착해 표시된 화살표를 따라가다 보니 대기실 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문 앞 책상에 앉아있는 진행요원에게 수험표를 건넨 뒤, 가번호를 부여받았다. 그렇게 당차게 대기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는 순간, 일제히 나에게로 향하는 시선들. 대기실에 앉아 대기하는 입시생들의 날카로운 눈빛들이 나에게로 와 꽂혔다.
1차 대기실은 생각보다 무서운 곳이었다. 심지어 동대 시험을 제일 처음으로 보았기 때문에 내가 느꼈던 분위기의 충격은 조금 컸다. 아무것도 모르고 싱글벙글 들어간 나는 시험장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100:1 은 거뜬히 넘는 경쟁률을 뚫어야 하니 서로를 견제하는 분위기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로 새로운 학생들이 대기실로 들어올 때마다 어떻게 생겼나 키는 큰가 연기는 어떻게 하나 살폈다.
앞에서는 진행요원을 맡은 연기과 학생들이 재치 있게 시험 주의사항에 대해 알려주고 있었고 그걸 듣는 학생들은 모두가 약간 긴장한 듯 굳은 모습이었다. 주의사항 설명이 모두 끝난 뒤 한 10명씩 가번호가 불렸다. 다들 얼굴에 웃음기 없는 진지한 얼굴로 짐을 챙긴 뒤 일렬로 섰다. 나도 쭈뼛쭈뼛 그들의 앞뒤로 서서 대기했다.
시간은 흐르고 우리는 2차 대기실에 와 있었다. 짐을 내려놓은 뒤 우리는 실기시험에 걸맞은 복장으로 옷을 갈아입으러 탈의실로 이동했다. 갈아입는 내내 서로의 몸뚱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견제(?)했다. 갈아입고 난 뒤 다시 짐이 있는 2차 대기실로 갔다. 그곳은 시험을 보기 전 마지막으로 소리 내서 몸을 풀 수 있는 공간이었지만 어색하고 조용한 적막만이 흘렀다.
‘먼저 소리를 내서 적막을 깨뜨려버릴까. 아냐, 그렇다고 내가 뭘 준비했는지 들키고 싶지가 않아. 아니, 그런데 목은 좀 풀고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어떡하지. 분위기가 너무 험악해.’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과정에서 혹은 가끔씩 본 오디션으로 이런 눈치 게임하는 듯한 분위기를 꽤 경험해 보았지만 이번만큼은 쉽게 나대기가 꺼려졌다. 일단 사람들도 너무 많았고, 긴장되고 위축된 분위기가 압도적으로 셌기 때문이다. 무슨 배짱이었는지는 몰라도 나는 언제나 분위기에 신경 쓰지 않고 첫소리를 내는, 적막을 깨뜨리는 사람이었지만 이번에는 조금 부담이 되었다.
하지만 민망하고 암묵적인 주목을 받는 건 한 순간이다. 내가 먼저 시끄럽게 소리 내면 사람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목을 풀며 연습을 하겠지. 처음이 어려운 법이다. 나는 피아노로 다가간 뒤 입시 자유곡인 뮤지컬 <엘리자벳>의 ‘나는 나만의 것’이라는 노래 반주를 치기 시작했다.
역시나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고 나는 아랑곳하지 않는 척하며 반주를 이어나간 뒤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가 무슨 노래를 하는지 파악한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슬슬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3분도 안되어 2차 대기실은 각종 소리로 꽉 채워졌으며 나는 가지각색의 다양한 소리와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말로만 듣던 특정 학원의 몸풀기 방식(한 학원에서는 기어 다니며 소리를 내는 독특한 몸풀기 방식을 가르쳤다고 들었다.)을 볼 수 있었으며 엄청나게 큰 소리로 발성 연습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옆에서 진행요원이 웃으며 하는 말.
“이렇게 몸풀기 열심히 소란스럽게 하는 타임은 처음이네요”
내가 한몫했지 하며 내심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순서가 다가왔다. 나를 포함한 다섯 명의 인원은 함께 밖으로 나간 뒤 시험장 입구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어찌나 심장이 두근두근 대던지. 너무 긴장한 나머지 조금 풀어야겠다 싶어 함께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과 진행하는 학생들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너무 떨리지 않나요?”
그랬더니 갑자기 표정이 풀어지며 울상을 짓는 한 사람.
“네.. 너무 떨려서 심장소리가 바깥까지 들리는 것 같아요.”
우리는 연기 뭐 준비했냐, 어디서 배웠냐, 나이는 어떻게 되냐 하는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하며 긴장을 풀려고 노력했다. 진행 요원도 그 마음을 알았는지 우리에게 학교 이야기 혹은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이때다 싶어 합격 질문의 대한 진실이 무엇인지 진행요원에게 슬며시 물어보았다.
함께 있던 진행요원들은 다 안다는 표정들을 하고 웃으면서 말해주었다.
“아 그거 우리 때도 있었을걸요? 저 볼 때는 키 몇이니 였어요.”
“어, 나 때는 한 바퀴 돌아보라고 하는 게 합격 질문이었는데.”
“그런 게 있었어?”
나와 함께 대기하는 사람들의 눈은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에 집중했다.
“모르는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질문 아무것도 안 듣고 합격한 애들도 있고.”
“있긴 있다고는 하는데 그런다고 해서 다 합격되는 것도 아니니까 최선을 다해서 보세요!”
재학생이 말해주는 일급 정보에 우리는 초 집중했다가도 음습하는 긴장감에 몸을 떨었다.
‘그래, 결국은 그저 연습한 것을 토대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어.’
이후에도 수다를 떨며 대기시간을 보냈지만 쿵쾅거리는 심장은 당최 가라앉지 않았다.
함께 이야기를 하던 분의 가번호가 호명되었고, 우리는 서로 응원의 신호를 보냈다. 희미하게 연기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어떤 질문을 할지 궁금해 귀를 쫑긋 세웠다. 한 사람의 면접 질문이라도 더 알아내서 합격 질문을 알기 위한 데이터로 쓰고 싶었다. 하지만 정확히 뭐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고 어느새 나의 순서가 다가왔다.
준비해 둔 물통 뚜껑을 열어 한 모금 마시고 심호흡을 한 뒤 시험장 문에 바짝 다가선다.
‘드디어 시험 본다. 합격 질문 꼭 받을 거야. 파이팅”
당차게 들어간 시험장은 어두컴컴했다. 거기에 군데군데 밝혀진 조명들. 무대에 선 것만 같았다. 바닥에 붙여진 초록색 테이프 앞에 서고 번호를 말한 뒤 노래를 시작했다. 2분 내외로 짧게 편집된 노래를 거의 마무리할 때쯤 교수님은 내게 무용을 요청했고 준비된 CD에 있는 음악을 틀어달라고 요청 한 뒤 무용을 시작했다.
연습과 별 다를 것 없이 침착하고 분명하게 특기를 보여주었고 이제 남은 건 질의응답 시간이었다. 드디어! 나는 두렵다기보다 어떤 게 합격 질문일까 하는 궁금증에 사로잡혀 눈을 반짝였다.
“고 3이야?”
“인문계, 예술계?”
“무슨 전공이니?”
“키 몇이니?”
“내신은?”
“악기 다룰 수 있는 것 있니?”
등등의 질문이 차례대로 쏟아졌고 나는 “키 몇이니”라는 질문을 받을 때 조금 설렜다. 왠지 예감이 좋았다. 또박또박하게 답변을 이야기 한 뒤 인사를 마치고 나가려던 중, 한 교수님이 아까 했던 질문을 다시 던졌다.
“키 몇이라고?”
“172입니다!”
“그래, 나가봐~”
정체를 알 수 없는 나의 촉이 ‘이것은 합격 질문이야’ 하며 외치고 있었다. 나는 들뜬 마음에 바리바리 짐을 챙겨 탈의실로 이동했다. 아까 서로 응원의 신호를 보냈던 사람이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우리는 아주 오랜만에 조우한 친구처럼 서로에게 달려가 시험을 잘 보고 나왔는지에 대한 여부를 물었다.
무슨 질문들을 받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는 중 키가 몇이냐는 질문을 2번 받았다고 말하자, 그 친구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방금 선생님께 전화해 봤는데 전에 잘 본 친구가 키 몇이냐고 2번 질문받았대요! 그게 합격 질문 아닐까요?”
두근두근. 내 예감이 맞을 확률이 조금 높아졌다. 너무 기뻐서 소리를 지르고 ‘저 합격인가 봐요!’라고 하고 싶었지만 겸손하고 침착해 보이려 애써 “에이 그래도 결과는 나와봐야 아는 거죠.”라고 말했다.
꼭 2차 시험장에서 보자는 약속 아닌 약속을 한 뒤돌아선 나는 입꼬리가 귀에 걸릴 만큼 미소 지었다. 잘 보고 나온 것 같은 마음에 신이 나서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선생님! 저 시험 보고 나왔습니다.”
“잘 봤어?”
“합격 질문으로 예상되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나는 아까 있었던 일을 말씀드렸고 선생님께서는 시큰둥하게 대답하시는 듯했지만 기분이 좋은 듯했다. 전화를 끊은 뒤 동국대 앞에 위치한 유명한 빵집으로 곧장 달려가 모나카 아이스크림을 산 뒤 고생한 내게 셀프 보상을 해 주었고 입시 수업이 있는 학교로 향했다.
친구들과의 약속을 또 지키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나 잘 보고 나왔으며 합격 질문으로 예상되는 것도 받았다고 무용담 늘어놓듯이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일단 내가 받은 게 합격 질문이라는 보장도 없었고, 서로의 후기를 공유한 뒤 시험에서 받은 질문이 다들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합격 질문에 대한 이야기는 말할 수 없었다.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마음속 합격 질문이 준 자신감으로 나머지 학교들의 시험을 보러 다녔다. 다른 학교 시험장에서 보았던 낯익은 얼굴들도 보였으며 심지어는 중학생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도 보 수 있었다. 세상 참 좁다 라고 느끼는 동시에 연기를 하고 싶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도 체감했다.
슬슬 시험을 보러 다니는 것이 익숙해질 즈음, 합격 확인 날짜가 다가왔다. 여전히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핸드폰을 켠 후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합격 여부를 확인했다. 수험번호와 이름을 입력한 뒤 속으로 셋을 셌다. 처음 나오는 1차 결과였기에 확인하기 전의 그 흥분감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 만큼 컸다.
‘하나, 둘, 셋,’
클릭.
‘아. 진짜 합격 질문이었구나.’
선명하고 크게 쓰여있는 ‘1차 시험에 합격하셨습니다’ 문구. 슬며시 입가에 번지는 미소. 그렇다. 합격 질문은 존재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주위 친구들 중 1차를 통과한 건 나뿐이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나와 입시를 함께했던 친구들은 대부분 1차에서 거의 떨어지거나 마지막까지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이때 느꼈던 나만의 곤란함 또한 이 책에 기록될 예정이다.
어쨌거나 우연일지는 몰라도 나는 합격 질문의 존재 여부를 믿어왔다. 지금 다니는 학교의 동기들에게 물어보니, 1차 합격생들은 모두 키가 몇이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뭐, 지금은 사라졌는지 아니면 계속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합격 질문’이라는 소문은 매우 강력하고 재미있었던 일화임에 분명하다. 믿거나 말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