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방송고등학교에서 약수역으로 내려온 뒤, 버티고개 역 쪽으로 조금 올라가다 보면 오른편에 ‘뮤지컬 하우스’라는 건물이 하나 있다. 고등학생 때의 나는 ‘뮤지컬 하우스’라는 이름에 혹해 하교할 때마다 굳이 찾아가 그곳을 기웃거리곤 했다. 하지만 내가 찾아갔던 시간에는 운영하지 않는지 늘 두꺼운 유리창 안에 커튼으로 가리어진 모습밖에 보지 못했다.
어느 하나에 한참 빠져있을 땐 그 이름만 들어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던 시절이었다. 그게 바로 뮤지컬이었고 그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그런데 무려 뮤지컬 ‘하우스’라니. 왠지 뮤지컬에 대한 정보를 모조리 보관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곳에 대한 선망이 가득해졌을 즈음, 오디션의 기회가 찾아왔다. 영화 <보니 앤 클라이드> 동명의 뮤지컬 오디션이었다. 성인 배역 오디션과 아역 오디션이 있었고 당시 키 170cm에 17살이었던 나는 어떤 오디션을 봐야 할지 고민했다. 성인 배역 오디션에 지원하기에는 나이로 인한 서류 탈락을 면치 못할 것 같고, 아역 오디션에 지원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키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디션 곡이 같았으므로 일단 아역 오디션에 지원하게 되었다.
다행히 아역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서류 합격 메일을 받게 되었으며 놀랍게도 오디션 장소는 그토록 들어가 보고 싶었던 ‘뮤지컬 하우스’였다. 오디션 시간이 학교 수업시간과 겹쳤지만 학과 특성상 오디션 같은 일정을 처리해 줄 수 있었기에 정해진 시간 동안만큼은 보러 갈 수 있었다.
더운 여름 내리쬐는 햇볕을 뚫고 달려간 오디션 장소에는 내 키의 절반도 안 되는 것 같은 작고 어린아이들 밖에 있지 않았다. 초등학교 1~2학년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들이 각자의 엄마들과 함께 대기하고 있었다. 엄마들은 아이들을 구석진 곳으로 데려가 노래 연습을 시켰고 다른 오디션 대기장소와는 다르게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한참 <보이스 키즈 코리아>라는 프로그램이 종영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프로그램에 출연한 어린 뮤지컬 배우들도 볼 수 있었다. 그 친구들도 엄마와 함께 와서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목소리가 얼마나 맑고 청아하던지. 경쟁자이지만 견제하기엔 내 쪽이 민망해질 정도의 작은 아이들을 구경하다 문득 나를 힐끔힐끔 의식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중학생 이상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한 명도 없었다. 말했듯이 170cm의 큰 키를 가진 나는 마치 소인국에 침입한 거인 같았다. 교복을 입지 않았으면 아이와 함께 온 엄마로 여겨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니었던 나는 이방인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서인지 떨리는 긴장감보다는 위축되는 마음이 들었었던 것 같다. 어느 오디션 장에 가도 쫄지 않는 게 특기라면 특기였는데, 이번 경우는 쫄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구석으로 찌그러진 후 나보다 무려 50cm는 작은 아이들과 함께 대기하며 조용히 목을 풀었다.
오디션 장에 들어가는 순간 심사위원들이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갑자기 커다란 사람이 나타나니 놀랐을 법도 하다. 게다가 혹시나 떨어질까 오디션 서류에 키를 조금 속여 작성하기도 했다. 한 10cm 정도? 뻘쭘함에 하하 웃어넘기며 준비해 온 노래 두 곡을 무난히 선보였다. 키가 몇인지 묻는 심사위원의 질문에 아역 오디션에는 절대 합격하지 못함을 예지 했다.
그렇지만 들어와 보고 싶었던 장소에서 뮤지컬 오디션을 본다는 건 그 자체로 당시 나에게 큰 행복이었다. 오디션과는 별개로 장소에 대한 환상이 큰 나머지 이 기회에 뮤지컬에 대한 단서들을 모조리 찾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곳에서 내가 좋아하는 뮤지컬 배우들이 연습을 하고 오디션을 보러 오겠지? 뮤지컬 관계자들이 이곳에서 뮤지컬 이야기를 나누겠지? 마음속에는 뮤지컬, 뮤지컬, 뮤지컬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했다.
수업을 하러 다시 올라가야 했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는 못했지만 (마음 같아서는 그곳에 평생 짱박히고 싶었다) 오디션을 본 뒤에 계단을 오르내리며 건물을 탐방했다. 발견할 수 있었던 건 굳게 닫힌 빈 연습실들 뿐이었지만 그저 그 닫힌 문의 모양이라도 알게 되었다는 강렬한 희열감에 사로잡혔다. 또한 또래의 지망생들은 거의 모를 뮤지컬에 관련된 장소에 갔다는 우월감마저 들어 기분 좋게 학교로 다시 갈 수 있었다.
좋은 기분으로 끝낸 것과는 상관없이 결국 오디션 합격 통보는 받지 못했다. 성인 배역을 맡기에는 실력과 나이 모두 부족했을 터이고, 아역을 맡기에는 웬만한 성인 여성보다 큰 키 때문이었을 것이다.
경험 없이 열정과 탐구심만 가지고 있었지만 당시의 나는 행복했었던 것 같다. 그런 시기를 지낸 내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을 것이고.
한 번의 대극장 뮤지컬 공연을 끝낸 지금의 나는 내가 선망했던 연습실에서 연습했으며 그토록 서고 싶었던 극장에서 공연을 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그 장소들은 그저 아침에 눈 뜨면 가야 하는 답답한 출근 장소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그 ‘뮤지컬 하우스’에서 뮤지컬 <광화문 연가>의 공연 연습을 하게 되었다. 그 장소를 보면 당시의 기억이 새록새록 나지만 과연 지금 이 순간 그 정도의 열정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지나오기 전에는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면서 생긴 회의감, 무기력 등이 열정의 발목을 잡은 것 같다. 물론 여전히 뮤지컬과 음악을 사랑하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돌진하던 그 시기가 그립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