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뮤지컬 위키드/터닝포인트
2018-03-08에 작성된 글.
"얘들아, 뮤지컬 위키드 보러 갈래?"
때는 바야흐로 중학교 2학년 시절, 반 친구 Y가 물었다.
"위키드? 그거 지나가다가 광고에서 봤는데? 아, 그거 'Defying gravity' 노래 나오는 뮤지컬이지?"
"맞아 그거야! 슬기야, 너는 꼭 봐야 돼. 그 노래로 상 탔잖아. 뮤지컬 버전은 좀 달라. 너가 좋아할 거야!"
"한 번 생각해 볼게!"
뮤지컬? 비싸던데... 하지만 학교 팝송 콘테스트에서 입상했던 곡인 'Defying gravity'가 나온다니 괜히 한 번쯤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고 부끄럽지만 당시 그 노래가 어떤 상황에서 부르는 것 인지도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에 궁금하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그전에 뮤지컬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부모님을 따라 한국 전통극이나 오페라, 혹은 클래식만 보았지 뮤지컬에 대해선 문외한이었다. 아는 정보라고는 학교 음악 시간에 배우는 <노래, 춤, 연기가 모두 들어간 종합예술>이라는 정도뿐이었고 미국 드라마 <Glee>에 나오는 뮤지컬 노래들을 조금 아는 정도였다.
이번 기회에 한 번 봐 볼까? 친구 4명과 함께 보기로 하고 좌석을 고르는데 세상에. 십만 원이 훌쩍 넘어가는 가격에 깜짝 놀랐다. 이렇게까지 비싼 줄 몰랐고 갑자기 보겠다고 한 것이 후회될 정도였다. 저 돈이면 먹을 걸 하나라도 더 먹지. 하지만 무를 수도 없는 지경이었다. 문화생활을 즐길 줄 모르는 구두쇠로 보이는 건 자존심 상했다.
다행히 중학생 신분이었던 우리들은 모두 돈을 많이 쓸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고 가장 싼 좌석을 고르기로 결정했다. 학생 할인 30%까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만 원에 가까운 돈이었다. 공연을 보기 전까지는 마음속에 계속 아깝다는 생각이 맴돌았다.
하지만 어쩌겠어. 이왕 보게 된 거 좋은 문화생활 하나 했다고 생각해야지. 우리는 극장에 도착했다. 한강진 역에 위치한 블루스퀘어였는데 큰 규모에 꽤나 놀랐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천장에 각종 초록색 장식이 매달려 있었고 벽에는 커다란 드래곤 모형이 설치되어 있었다. 신나서 더 돌아다녀보니 공연 때 배우들이 입는 의상과 소품이 진열되어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냥 딱 공연만 보고 나온다고 생각했던 내게는 무척이나 새로운 경험이었다.
우리는 티켓을 받아 좌석이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3층 오른쪽의 가장 구석진 자리였다.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의 표정은커녕 동작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걱정 반 기대 반의 마음으로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뮤지컬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공연 전 지켜야 할 수칙이 안내되고 곧 깜깜해지더니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음악소리가 들렸다. 귀와 머리를 울리는 소리에 약간의 전율이 흘렀다. 왠지 기대해도 좋을 것 같았다.
내한 공연이었는지라 무대와 자막을 번갈아 가며 봐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그런 불편함도 잊은 채 스토리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특히 주인공 초록 마녀 엘파바에게 공감이 가기 시작하면서 나도 모르게 이끌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야유 속에서 혼자 춤을 출 때, 마법사님을 만나고 싶어 간절하게 노래 부를 때, 그토록 원하던 곳에 도착했을 때 등 모든 장면들이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극에 완전히 몰입한 상태가 되었다. 당시 한참 가지고 있던 고민이나 걱정들이 떠오를 겨를도 없이 내 머릿속은 온통 두 마녀의 이야기와 현란한 음악, 무대로만 가득 차있었다.
그렇게 극이 절정으로 치닫았다. 드디어 유일하게 알고 있던 곡인 'Defying gravity'가 나왔다. 더욱 집중해서 보고 들었다. 한계를 두지 않고 부조리에 맞서 싸우던 엘파바가 드디어 중력을 거슬러 하늘로 비상했다!
우리가 앉아있는 3층 높이까지 날아올랐던 것 같다.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 순간에는 신기하게 엄청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음악, 간절함과 확신이 담겨있는 가사. 동시에 코러스들의 엄청난 에너지가 합쳐져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전율을 안겨주었다. 그 순간 세상의 모든 것들이 사라지며 엘파바와 나만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 머릿속을 때리는 단 하나의 생각.
‘내가 저기 있어야 하는데?’
거짓말처럼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정말이지 나는 운명을 느꼈다. 저기에 있어야 했다. 소명이라는 게 이렇게 알게 되는 것인가? 온몸에 전율이 흐르며 눈물이 계속 흘러내리던 그때의 느낌은 몇 년이 지나도 몸에 생생하다.
충격적인 여운을 남긴 채로 무대는 암전이 되었고 곧바로 인터미션 시간이 다가왔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야, 너 울어?”
“야야 얘 운다!”
친구들은 멍하니 앉아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나를 보며 놀려댔고 화장실에 가겠다며 일어섰다. 그때서야 정신이 조금 들어서 일어나려고 했는데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했다. 친구들은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방금 느낀 이 충격적인 느낌을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강렬한 충격이었던 탓인지 웃기게도 입을 움직여 말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단지 내 속에서 아까의 그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더듬거리며 한 말.
“얘들아, 나.. 새 인생을... 찾았어.”
사실 그때 2막을 어떻게 감상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눈으로 보고는 있었지만 계속 그 느낌을 떠올리고 있었던 것 같다. 뮤지컬이라는 것을 공부할 생각을 하니 끊임없이 입꼬리가 올라갔다. 얼른 집에 가서 자료를 찾아보고 싶었다.
이 경험을 한 것은 인생을 바꾼 엄청난 행운이었다. 감동은 한동안 사라지지 않았고 현재 그 당시의 순간을 떠올려 보아도 아직 생생하다.
그 뒤로 뮤지컬에 빠져 살았다. 각종 포털 사이트에 있는 뮤지컬 카페에 가입한 뒤 회원 등급을 제일 높은 단계로 등업 하고 온갖 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뮤지컬이 조금이라도 관련된 것이라면 귀가 번쩍 뜨여서 눈에 불을 켜고 찾아보곤 했다. 뮤지컬 영화를 죄다 다운로드해서 매일마다 보고 들었으며 역사 공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내가 뮤지컬의 역사만큼은 꼭 알고 싶어서 책을 몇 권씩 사거나 빌려보고는 했다.
중학생 때는 빈 음악실이나 강당을 찾아다니며 몰래 연습을 해댔고 고등학생 때는 매일마다 연습실에 남아 노래를 부르고는 했다. 주말이나 방학에도 거의 매일 연습실에 나가서 선생님과 조교님들이 귀찮아할 정도였다. 노래할 장소가 마땅치 않았을 때는 집 근처 강가에 가서 노래를 부르곤 했다. 비가 오는 날에도 우산을 쓰고 강가 다리 밑에 가서 노래를 부르곤 했다. 비 오는 날엔 사람들도 별로 없고 노랫소리가 빗소리에 묻혀 나에게만 들리기 때문에 더 선호하는 편이었다!
엄마랑 단 둘이 살았던 고등학생 때는 비싼 뮤지컬 공연을 볼 형편이 되지 않아 학교를 다니며 알바를 하고는 했다. 뷔페 알바를 하면서 번 돈으로 뮤지컬 공연의 제일 싼 좌석을 예매했고 화장품 가게에서 일한 돈으로 뮤지컬 프로그램 북과 뮤지컬 관련 책들을 구입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뮤지컬 위키드를 볼 때 느꼈던 운명적인 느낌, 그거 하나였다. 많은 공연을 보고 다니던 이유가 뮤지컬을 좋아해서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때 느꼈던 전율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였다. 안타깝게도 그 정도의 전율은 지금껏 두 번 다시 느껴보지 못했지만. 먼 훗날에 엘파바로서 무대에 서게 되는 날이 온다면 다시 한번 느껴볼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