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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트로브잣나무 Jul 27. 2021

가지각색 아르바이트 (고등학생 편)

내 인생 첫 아르바이트는 고등학교 1학년 말에 시작되었다.

빠른 년생이라 법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나이가 아직 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돈이 조금 궁했었나 보다. 사촌으로부터 알게 된 일자리가 있었고 나는 망설임 없이 일을 하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하교 후 매일 5시간 동안 천호역 근처에 있는 한 뷔페에서 최저시급을 받으며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조금 설렜다. 내 힘으로 내가 돈을 벌 수 있다니!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돈을 버는 게 정말 힘든 일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일단 체력적으로 참 힘들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수업시간에 조는 일이란 불량학생들이나 하는 행위라고 생각한 꽤나 꽉 막힌 학생이었던 나는 수업시간엔 절대 졸지 않았다. 하지만 그랬던 내가 수업시간에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업무의 강도가 많이 빡셌다. 지금부터 나의 첫 아르바이트 경험담을 이야기해보겠다.


일하는 곳에서는 상하의 유니폼을 제공해주었다. 머리망과 구두는 제공해주지 않았기에 지하상가에서 만 얼마짜리 검은색 단화와 승무원들이 할 법한 검정 리본이 달린 머리망을 하나 구입했다. 신발은 참 촌스러운 디자인이었지만 엄마의 조언에 의하면 편한 게 장땡이었기에 푹신푹신한 단화를 택했다.


하교 후 헐레벌떡 일하는 곳으로 20분 정도 지하철을 타고 간다. 꽤나 큰 빌딩의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 굽이굽이 들어가다 보면 직원식당과 이어진 탈의실이 나온다. 주어진 카드로 출석체크를 한 뒤 탈의실로 들어가 주위에서 옷을 갈아입는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힐끗 보며 재빨리 하얀 블라우스와 검정 치마를 입는다. 넥타이를 매고 스타킹을 신은 뒤 머리를 깔끔히 묶으면 준비 완료다. 그렇게 일을 하러 나간다.


뷔페의 규모는 매우 컸으며 분리된 룸 형태의 공간도 꽤 있었다. 직원 수도 정확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천장이 높았고 살짝 노란빛이 도는 공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하는 업무는 손님들이 비운 접시를 수시로 치우고 손님들이 나간 공간을 깨끗이 청소하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와인잔과 식기 세척, 쓰레기 버리는 일 등을 했다.


첫 2-3시간은 버틸만했다. 하지만 거의 쉬는 시간 없이 빠른 걸음으로 트레이에 무거운 접시들과 잔들을 싣고 왔다 갔다 하다 보면 발과 팔이 점점 아려오기 시작한다. 게다가 난생 첫 알바였고 아는 사람들도 없었기에 쉬는 시간이 없는 건 줄 알고 일만 주구장창 했더랬다. 나중에 알고 보니 눈치껏 쉬면 되는 것이었다. (ㅠㅠ)


노동 자체가 주는 신체적 고통만 있었다면 다행이었을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내가 일하는 곳이 엄청난 규모의 유명 해산물 뷔페라는 점이었다.


하교 후 저녁도 먹지 못하고 뷔페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보면 배가   고파진다. 그런데 내 눈에 보이는 것들은 온통 빛깔 좋은 각종 회들, 기름이 좔좔 흐르는 종류별 고기들, 그리고 생전 처음 보는 예쁜 디저트들과  요리들이었다.


그게 그렇게 고문일 수가 없었다. 손님이 남긴, 건드린 흔적이 없어 보이는 멀끔한 음식이 있으면 이거 정도는 몰래 먹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굴뚝같이 차올랐다. 하지만 혹시나 탈이 나거나 누군가에게 들킬까 봐 아쉬운 마음으로 접시에 있는 음식물들을 쓰레기통에 부어버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트레이에 빈 접시를 가득 담아 주방 내부로 들어가는데 같이 일하는 언니 오빠들이 손님들이 남긴 접시의 음식들을 우물우물 먹으며 수다를 떠는 모습을 목격했다.


아니, 저걸 먹어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과 동시에 간절히 먹고 싶다는 생각이 치고 들어왔다. 그들 중 종종 내게 말을 걸던 언니 한 명이 내게 물었다.


"너도 이거 먹을래?"


그 어떤 말도 나의 욕망을 달콤하게 자극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느껴지는 시선들에 그거 먹어도 되는 거예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배고픈 본능이 저 멀리 앞섰나 보다. 네, 먹을래요 하곤 연어가 들어간 가장 깨끗해 보이는 롤 초밥을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그 이후 다른 사람들도 먹는다는 사실을 위안삼아 주위 사람들의 눈을 피해 깨끗해 보이는 음식들을 재빨리 입 안에 욱여넣곤 했다.


참 어리고 배고팠던 날들이었다. 아마 내가 가장 어렸던 걸로 기억하지만 홀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들은 대부분 또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들 어린 나이에 스스로 일을 돈을 버는 것이 대견하게 느껴진다.


일을 하다 보면 가끔 어른들이 팁을 주기도 했다. 만원에서 많게는 5만 원 정도. 처음엔 내가 이걸 받아도 되는 건가? 싶어서 같이 일하는 다른 분께 은밀하게 물어봤는데 팁 문화에 익숙한 분들이 가끔 주시기도 하고 어린 친구들이 기특해 보여 주기도 한다며 기쁘게 받으라고 했다. 그 말에 안심이 되었고 이후에 누군가 팁을 주실 때마다 감사하며 기쁘게 받았다. 퇴근길 지하철에 지쳐 앉아 주머니에 꾸깃 넣은 돈을 꺼내볼 때면 내가 열심히 잘하고 있구나 하고 보람을 느꼈다.


하지만 그렇게 오래 일하지는 못했다. 가장 큰 이유로는 체력적인 이유로 학업에 지장이 갔고 2학년이 되면서 공연에 참여해야 했기에 일을 할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일하는 곳의 분위기가 당시 내게 무섭게 느껴졌던 것도 한 몫했다. 특히 같이 일하는 오빠들이 처음 보는 내게 장난으로 욕설이 섞인 반말을 툭툭 던지는 게 무서워서 그들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게다가 퇴근 후 탈의실로 가는 길에 대여섯 명이 주차장에 모여 무려 교복을 입고 담배를 피우는데 괜히 나를 위협할 것 같은 마음에 뛰어 들어가곤 했다. 그렇게 딱 2달을 채우고 그만두게 되었다.


그 이후 고등학교 2학년 여름 방학 기간에 엄마 친구분이 운영하는 로드샵 화장품 가게에서 일하기도 했다. 이웃나라 공주가 우리 왕국에 놀러 온다는 핑크빛 컨셉으로도 유명한 화장품 가게였다. 실제로 살짝 오글거리는 멘트를 쓰는 것이 지침이었기에 나는 웃음을 살짝 참으며 손님들에게 멘트를 날리곤 했다.


역시나 앉아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없었다. 게다가 지하철 역과 무척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기에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나의 업무는 크게 3가지로 나뉘었다. 포스(결제), 청소, 그리고 제품 설명이었다.


지금도 별 관심이 없지만 그때는 더더욱 화장품에 대해 문외한이었던지라 손님이 없을 때마다 제품에 적혀있는 설명을 외우다시피 보았다. 모르는 단어들은 기억해놨다가 점장님께 여쭤보거나 집에 가서 검색해보았고 (스마트폰을 남들보다 늦게 사서 바로 검색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나도 이것저것 발라보며 나름 연구도 해 보았다.


뷔페 알바에 비하면 매우 낮은 강도의 아르바이트였기에 할 만했다. 재미있게 했던 것 같다. 화장품에 대해 공부할 수 있는 계기도 되었고 센스나 언변도 키울 수 있었기에 좋은 경험으로 남아있다. (뷔페 알바 바로 다음으로 해서 그랬을 수도..)


고등학생 시절 나의 알바 경험들이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도 꽤 다양한 알바들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전공을 살린 알바나 일들이 점차 늘었고 2021년부터는 하는 일의 전부가 전공 관련 일들이 되었다.


2020년까지만 해도 전공과 무관한 일들을 풀타임으로 하며 돈을 벌었다. 언젠간 좋은 경험과 밑거름으로 남겠지만 아직은 그 시간들이 아깝고 아쉽다.


아마 모든 취준생들의 딜레마일 것이다. (예체능은 대부분 취업 개념이 딱히 없지만) 원하는 일에 정착하기 전 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하며 생계를 이어나가고 그 와중에 미래를 위한 준비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부모의 경제적 지원이 있지 않는 이상, 혹은 부자가 아닌 이상 많은 이들이 이겨내야 할 숙제인 것 같다.


다음 글에서는 그 이야기를 써볼까 한다. 대학교를 다니며 했던 일들! 전공 관련 일들과 전공 무관 일들, 그 경계에서 부딪히는 나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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