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전해 듣기로 아버지는 H계열 대기업을 다니셨고, 어머니는 유치원교사를 하셨다. 듣기로라고 표현한 것은 내가 정확히 기억하는 시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5살이었던 97년도 IMF가 터졌고 우리 집은 처음 위기를 겪게 된다. 아버지는 직장을 그만두시게 되었고 어머니도 일을 구하로 나가게 된다.
그 이후 나와 여동생은 할머니 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IMF로 무리한 탓이었을까, 2002년 대한민국이 뜨겁던 해가 지나서 아버지는 심장병으로 아주대 병원에 입원하시게 된다. 2일간에 걸친 수술을 잘 마무리되었지만 아버지는 2년 넘게 병원생활을 하셔야 했고, 어머니는 홀로 나와 동생의 뒷바지를 해야 했다.
그때가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일이었다.
친구들과 어울리길 좋아했던 나였지만 집에 사건을 겪고 나니 혼자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 찰나 중학생이 되었고, 초등학교 옆에 있는 중학교로 들어가게 된다. 촌동네에서 남들과 크게 다를 거 없는 중학교 시절을 보냈지만, 마음 한편에는 이대로 지내면 안 될 거 같다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다.
공부를 했다. 아버지 병원비가 많이 들어갔기에 과외나 학원은 꿈꿀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조금이나마 나쁜 친구들을 멀리하고, 괴롭히는 애들 무시하고, 선생님이 내준 과제들을 묵묵하게 하는 거뿐이었다. 그렇게 3년을 보내다 보니, 나는 좋은 성적으로 시에서 괜찮은 고등학교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면'이 '동'으로 주소가 되어있는 학교로 들어간다. 그때 당시 힘들기로 유명한 학교였고, 내가 다닌 중학교에서 8명 정도만 갈 수 있었던 나름 명문사립고였다. 학교를 바꾸니 좀 더 좋은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게 되었다. 이상한 애들도 많았지만(지금도 연락하는 친구) 그래도 학습하는 분위기가 확실히 달랐다.
고등학교 시절은 또 다른 경쟁터였다. 나름 공부는 열심히 하였지만 3학년 모의고사 성적으로는 수도권 4년제에 들어가기 힘들었다. 그러던 중 운 좋게 논술시험을 잘 봐 수도권 4년제 대학에 수시로 홀로 합격하게 된다. 고등학교 1학년때부터 독서모임에 들어가 매달 책을 읽은 것이 수시 논술은 결정타가 되었다.
그렇게 수도권 대학에 입학했다. 한 단계 점프를 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용돈은 없었기에 과외와 학원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었다. 경제활동도 하고 대학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니 조금씩 삶이 잘 풀리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대학 1학년을 다 넘기지 못한 12월 예상치 않게 어머니의 교통사고가 있었다.
그렇게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불쑥 인생에 찾아왔다.
어머니는 깨어났지만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긴 시간 병원생활을 해야 했다. 집안 상황이 녹록지 않았지만 병무청에는 입영통지서가 날아왔기에 나는 군대로 향했다. 돌이켜보면 군생활만큼 현재와 미래에 대한 걱정 없이 지냈던 시기도 없었다. 그만큼 그 시절 현실은 나에게 도피하고 싶은 걱정과 불안에 연속이었던 거 같다.
포병으로 군대에 들어갔지만, 휴가 준다는 말들이 많아 군생활하며 상담관과 이발관을 했다. 그러다 보니 여러 사람들과 각자 살아온 얘기들도 하게 되었고, 나 또한 낯선 사람과도 좀 더 진솔하게 말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때처럼으로 사람들 얘기를 듣고 공감하는 일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역하고 잠시 상담사의 꿈을 꾸었지만 현실이 녹록지 않아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학교에 다시 복학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여윳돈 마련이 필요했다. 어렵게 살아서 그런지 돈 버는 거에 관심이 많았고, 1학년때부터 투자소학회에 들었던 것이 대학교 3학년때는 투자소학회 회장까지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대학교 3학년때는 전국대학생투자교육협의회에서 투자공모전 수상을 하여 가족모두 63 빌딩으로 초청을 받았다. 그때만 하더라도 당연히 나는 금융권에 취업하리라 생각했던 거 같다. 내 인생을 좀 더 화려하고 멋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4학년이 되었을 때 내가 지원한 모든 은행, 증권사에서 최종 탈락을 했다.
인생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첫 좌절이었지만 쉬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최종까지 떨어진 다음 해 바로 공공기관에 취업하게 된다. 200:1의 경쟁률을 뚫고 들어간 그때 나이가 26살이었다. 어린 나이에 공공기관에 들어왔기에 예쁨을 받았고 운 좋게 좋은 선배들을 만나 좋은 사회생활을 보냈다.
정권이 바뀌고 공공기관 취업문이 열리면서 나보다 나이 많은 후배들이 많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대기업이나 증권사를 가지 못한 게 한이었지만, 공기업이라는 안정적인 직장에서 커리어를 시작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기관은 정부정책에 힘 받아 빠르게 성장했고 나는 운 좋게도 조직에서 빠르게 승진했다.
그러는 중에 사기를 당해 돈을 날리기도 했지만 부업을 하며 돈 벌 수 있는 다른 길이 있다는 걸 배웠고, 돈이 없어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기도 했지만 자격증공부를 하며 좀 더 실용적인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나에게 항상 힘이 돼준 여자친구도 만났고, 경제적으로 독립하였고 내 명의로 된 차도 구하게 되었다.
그렇게 조금씩 하나둘 잘 풀리는 거 같았다.
하지만 그녀와도 더 나은 미래를 그리기에는 서로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가 않았다. 서로의 집안이 바라본 눈높이가 달랐고, 그렇게 나는 상실을 겪게 되었다. 내 힘든 시절을 함께 지켜준 사람이었기에 상실에 더 마음 아팠고 스스로가 많이 미워졌다. 그렇게 32살을 맞이하며 나는 삶을 통달해 보려고 노력한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지금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난 삶을 돌아보면 내가 원하던 계획대로 착착 이뤄졌던 것은 잘 없었던 거 같다. 그 순간에는 앞으로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해서 선택했지만, 그 판단이 잘못될 때도 있고, 내가 예상하지 않은 결과로 인해 상황이 뒤바뀔 때도 있었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몇 년 전에는 부동산중개업으로 강남에서 잘 난리던 친구가 지금은 다 망하고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결혼을 한다고 상견례까지 했던 친구도 서로 갈 길을 가고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다. 어느 친구는 나보다 먼저 하늘나라로 떠났다고 한다.
세상에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세상에는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참 많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온전히 내 잘못은 아니고, 계획대로 된다고 해도 온전히 내가 잘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어떤 상황을 마주하더라도 내가 선택해야 할 것은 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살면서 종종 듣는 얘기가 "왜 이렇게 열심히 살아"라는 말이었다. 각자마다 주어진 환경과 상황을 다르기에 섣부르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행복해지고 싶어서"이다. 돌이켜보면 어려운 순간들이 많았고, 그런 전환점을 내복하고 지금까지 이렇게 있을 수 있는 건 좌절이나 포기해서가 아니라 "행복"을 찾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예전에는 주어진 상황이 불만족스럽고 속상했다. 하지만 지금은 부모님에게 지원받지 못한 거에 대한 아쉬움도 크게 없고, 내가 이렇게 살았다고 누군가에게 샤우팅 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냥 한 번뿐인 인생에서 남들처럼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노력했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밤이 오면 낮이 오듯이, 어둠이 끝나면 빛이 온다.
영원히 불행하고 영원히 행복한 건 없다.
요즘 들어 나는 위에 말이 좋다. 지금 힘들다고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요. 지금 좋다고 하여 그것 또한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순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면, 지금의 순간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앞으로를 대비해 끊임없이 발전하고 노력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인 거 같다
인생이 계획대로 되지는 않지만,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운을 잡을 기회가 생길 것이고, 인연이라는 것은 언제 어디서든 만날지 모르는 거 같다. 그러니 앞으로의 미래를 너무 낙관하거나 기대하지도 말고, 지금 주어진 내 일에 삶의 행복을 바라본다. 우리의 모든 선택은 결국 행복하고 싶어서 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