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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게 Sep 23. 2021

내일 딱 망해도 이상하지 않은 여름 비수기 나기

꽃집의 비수기는 유난하다

유난히 길고 극단적이다. 중간이 없다. 1년 중 반은 휘몰아치게 바쁘고, 나머지 반은 내일 딱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한가하다. 샵이 위치한 상권에 따라 특성이 확연하게 달라지기 때문에 모든 꽃집에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닐 수 있다.


상반기는 크리스마스로 시작해서 졸업식, 입학식, 인사이동, **day, 결혼식, 어버이날, 스승의 날 등의 이벤트들로 채워져 있다. 하반기는 공식적인 행사와 이벤트가 거의 없고, 무더위가 찾아오는 데다 여름휴가, 추석 등 개인적으로 챙겨야 할 일들이 많다.


그래서 상반기에 ‘죽게’ 일해서 번 돈으로 나머지 반년을 버틴다고들 한다. 비수기 반년 동안은 상반기에 바닥난 체력을 회복하고, 불규칙한 식사로 찐 살을 빼는 등 외모도 가꾼다. 매장에 구역을 정해서 하루에 한 구역씩 정리정돈을 하기도 한다. 장사에 몰두하느라 미루어 두었던 일도 추진하고, 매출을 끌어올리기 위한 운영 아이디어를 생각하기에도 좋은 시간이다. 남는 시간에는 공부도 할 수 있고, 듣고 싶었던 꽃 수업을 들으려고 유학길에 오르는 플로리스트들도 많다. 그간 못 봤던 사람들도 만나고 여행도 한다.


하지만 현실은

이렇게 쭉 나열해보니 그럴듯하지만 현실은 뚝 끊어지다시피 한 매출로 인해 불안감이 엄습해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을 때가 많았다. ‘내 꽃집’을 먼저 연 여러 선배 플로리스트들이 여름에 많이 힘들 테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일러주었지만 막상 비수기가 현실로 다가오니 적잖이 당황스러워 첫 2년은 마음의 불안과 비수기 적자에 한숨 짓느라 시간을 다 허비했다. 예고편도 충분히 듣고, 꽃집에서 일했던 경험이 적지 않았는데도 내가 주인이 되어보니, 손님이 돌아올지 말지, 내가 그동안 잘 해왔는지를 심판받는 느낌이랄까.


내 가게를 시작하고 처음 2년은 요령이 너무 없어 상반기에는 나를 완전히 갈아 넣는 기분이 들었다. 긴 성수기의 끝이 보이는 5월 7일쯤에는 내가 내가 아닌 상태가 된다. 반면 비수기, 하반기에는 내가 이렇게 망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루에도 10번씩 하며 정신이 피폐해져 갔다.


아주 작은 매출이라도 벌겠다고 마음 편히 어디 한 군데 놀러 가지도 못하고, 무식하도록 쉬지 않고 가게를 오픈해 두니 몸과 마음이 지쳐버렸다. 매출 대비 매입 조절을 못하는 (심지어 손만 큰) 초짜 자영업자는 여유자금으로 가지고 있던 통장 속 현금을 ‘0’으로 만드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럴듯한 상품을 가득 채워 두면 손님이 오시겠지 하면서 생물인 꽃과 식물을 사고 버리기를 반복했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는 것을 잘 가꾸고 다듬어 판매해야 한다는 것. 남들 쉴 때 나도 쉬어야 한다는 것. 추석이 지나고 찬기운이 돌면 언제 그랬냐는 듯 손님들은 다시 찾아온다는 것. 이 모든 걸 오픈 3년째 접어들어서야 깨닫게 되었고, 이후 여름 비수기를 그나마 다른 일에 집중하며 보낼 수 있었다. 이렇게 맨땅에 헤딩하며 가게를 운영했는데도 망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다.

일이 항상 생각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4년 차부터는 샵 운영이 완전한 안정기에 접어들어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비수기를 보낼 수 있었는데, 최근에는 예상치 못한 코로나라는 변수를 만났다.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기에 언택트라는 급격한 환경 변화가 더해졌다. 비수기 불안증이 다시 도졌고, 어떻게든 중심을 잡아보려고 나는 이번 여름도 내 마음과 싸우고, 변화에 적응하려 고군분투했다.


아침, 저녁으로 서늘한 기운이 돌더니 다시 손님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내 무기력도 그렇게 길게만 느껴지던 여름과 함께 가버렸다. 벗어날 수 없는 영세 자영업자의 굴레인 건가?

소상공인 파이팅! 꽃집 주인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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