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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랜들리 Jun 16. 2024

그런 생각 해본 적 없는데

유월 02

"난장판이네?"


와아- 동기 몇 명이 박수를 치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유월이 서있었다. 유월은 옆으로 비키라며 손짓을 하더니 잔디밭에 털썩 앉았다.


학교 정문 광장 앞. 이미 잔디밭과 옆 계단에는 빈 맥주병이며 소주병, 그리고 종이컵이 어지럽게 놓여있었다.


“뭘 얼마나 마신 거냐?”

내 얼굴을 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유월이었다. 나는 손등으로 볼의 열기를 체크하고 앞에 놓인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우리는 종종 밥을 먹거나 심심하면 문자를 주고받으며 친해졌다. 유월은 이런 식으로 틱틱거리곤 했는데, 이제는 그의 말투에 익숙해지고 있다.


유월은 우리가 편해졌는지 술자리에 자주 나타났다. 그가 농담을 던지면 모두가 웃었고 한껏 분위기가 살아났다. 그에게는 늘 주위를 유쾌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왁자지껄한 주변을 뒤로 한채 쓱 일어나니 유월이 내 손목을 덥석 잡았다.


“어디가?”

“저 저.. 화장실”

갑작스레 몰린 시선에 당황한 나는 그대로 굳어 말을 더듬었다.


“얘 저번에도 이러다 몰래 가지 않았어?"

“그래, 너 핸드폰 두고 가"


결국 핸드폰을 넘기고 화장실을 다녀와야 했다. 일어나니 술기운이 훅 올라왔다. 유월은 왜 그렇게 스스럼없이 팔목을 잡는 걸까. 괜한 오해를 할까 봐 팔목을 비틀어 빼내야 했다. 팔목에 그의 감촉이 남아있는 것 같다.


아직 초여름이라 덥진 않았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이 볼의 열기를 식혀주었다. 더 마실 기운은 없었지만 집에 가기엔 눈치가 보였다.


대화에 집중하지 못한 채 앞에 놓인 종이컵만 갈기갈기 뜯었다. 유월도 심심했던지 바닥에 잔디를 조금씩 뜯어 내 쪽으로 던졌다.


“잔디 잡아 뜯지 마요"

“왜 내 맘인데?"


바지에 붙은 잔디를 손에 주워 모았다. 그러자 유월은 내가 만든 손동굴에 농구를 하듯 잔디를 던져 골인을 맞추었다.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다.




"너도 연애하면 달라"


박오빠가 카페에서 연애의 필요성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나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면서 지금은 또 좋은가 보지. 적어도 난 그런 미친 짓은 하지 않으리라.


"할 사람이 없잖아"

"소개해줘?"

"됐어"


누군가를 좋아하는데,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연애까지의 확률은 더 낮을 것이다. 그런 시간 낭비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제이는 정말 특별한 경우였다.


박오빠와 제로언니는 아마 그래서 매일같이 싸우면서도 지금까지 만나는 거라고 생각했다. 서로가 아니면 안 된다는 로맨틱한 이유보다는 좀 더 현실적인 이유로.


"서로 똑같이 좋아해서 사귀는 경우가 어딨냐? 좋아하는 쪽이 고백하고, 괜찮으면 만나보는 거지."

"오빠랑 제로언니, 둘 중 누가 먼저 좋아했는데?"

"내가 더 좋아했지. 그러니까 고백했고"

박오빠가 배시시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근데 지금은 제로가 나 더 좋아하는 것 같아"


그다음은 제로 언니에 대한 자랑이었다. 요리부터 공부까지 빠지는 게 없다느니 하는 얘기는 끝이 없었다. 처음으로 둘이 부럽다는 생각을 하며 커피를 들이켰다.




‘도서관 왔죠. 6층까지 걸어서 올라왔잖아요’

‘그래서 나는 집에서 하잖아. 얼마나 하려고?’


시험 기간. 도서관에 늦게 간 탓에 학생들이 많았다. 겨우 발견한 구석 자리에 책을 피고, 유월과 문자를 주고받고 있었다.


‘모르겠어요. 근데 충전기 없어서 핸드폰 꺼질 예정. 저 이제 공부할게요.’

‘내가 충전기 가져다줄까?’


됐다며 거절했지만, 자기도 어차피 공부하려던 참이라 상관없다는 식이었다. 굳이 온다는 걸 이해할 순 없었지만, 더 거절하기도 애매했다.


곧 유월이 도서관에 나타났다. 그 이후로 우리는 시험기간 내내 도서관에서 함께 공부를 하게 되었다.


“아까 그 형한테 카톡 왔어"


도서관에서 나오며 유월이 말했다. 나가는 길에 마주친 같은 과 선배 얘기였다. 둘은 농구를 같이 하는지 꽤 친해 보였다. 몇 마디 나누는 동안, 옆에 선 나는 먼저 가야 하나 고민했다.


"근데, 나한테 우리 사귀냐고 물어보더라?”

“아, 그래요? 그 오빠가 오해했네”

“너는 나랑 사귀는 생각해 본 적 없어?”

갑자기 그런 말을 꺼낸 유월의 말에 당황한 나는 침착한 척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아, 정말 단 한 번도?”

벌써 기숙사 앞 길목이었다. 유월이 발걸음을 멈춰 서서 얘기했다.


“근데 나 아직 답장 안 했어."

"그렇다고 말하고 싶어서. 나는 너 좋아하거든.”


유월은 평소와 다르지 않은 목소리로 덤덤하게 사귀자고 했다. 오히려 삐걱대는 건 나였다. 횡설수설을 하다가 날이 너무 춥다며 대뜸 집에 돌아가봐야겠다고 했다. 실제로 날이 춥기도 했다.


“내가 보기엔 너 지금 돌아가면 대답 안 할거 같은데”

유월은 입고 있던 후드를 건네줬다.


“이거 입고 지금 말해주면 안 돼?”


그날, 유월은 그 형에게 사귄다는 답장을 보냈다.




뻥-


골키퍼가 시원하게 찬 공은 중앙까지 원만한 곡선으로 날아갔다. 선수들은 일제히 한 곳으로 몰려들었고 공 쟁탈전이 시작되었다. 그중에는 유월도 있었다. 경기가 시작한 지 꽤 지났는데도 아무도 지치지 않는다. 괴물 같은 체력들이다.


축구 경기의 규칙을 잘 모르는 나는 그저 유월의 움직임을 보고 있었다. 땀이 배인 머리를 털어내고, 한 손으로 옷을 팔락거리는 유월. 이내 다시 뛰기 시작한 탄탄한 다리 근육. 그리고 그 아래로 새파란 잔디. 유월은 언제나 저렇게 생동감이 넘친다.


어둑해진 밤, 커다란 흰색 조명이 경기장을 비추고 있다. 다리는 저리고 축구는 지루하다. 날이 선선하니 근방이나 한 바퀴 돌고 와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나 한 바퀴 돌고 올게”

옆에 앉은 동기에게 말하고 얼얼한 다리를 일으켰다.


‘나 운동 잘해서 형들이 좋아해’

언젠가 유월이 그런 말을 했다.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진짜야’하고 덧붙이며. 그렇구나 하고 유월에게 대답하긴 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운동을 잘해서 좋아하는 건 아닐 거라고.


유월의 뛰고 걷고, 마시고 하는 모든 일련의 동작에는 남다른 생명력이 담겨있다. 형들은 아마 유월의 그런 아이 같은 면을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도 그런 그를 좋아한다. 이따금씩 그 앞에서 시체라도 된 기분이 든다.


자리로 돌아오니 동기가 발을 동동거리며 말했다.

“유월 오빠가 두 골이나 넣었어! 아 못 봐서 아쉽다”


경기가 끝났다. 유월은 성큼성큼 다가와 내 소매를 잡고 쑥스러운 듯 웃으며 말했다.

“내가 두 골이나 넣었는데”


고민하다 결국 ‘잘했어’ 하고 대답했다. 유월은 건너편 누군가와 수고했다는 인사를 하는 와중에도 내 소매를 꼭 붙들고 있었다. 구릿빛 팔은 나무토막처럼 단단해 보였다.


우리는 아직 이 관계가 어색하다. 덜컥 친구에서 연인이 된 이 관계가. 그래서 유월이 이렇게나 애매하게 내 소매를 잡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미숙한 어린애같이. 땀이 약간 배인 팔은 조명을 받아 은근한 광이 돌고 있었다.


“수건 없어?”

그렇게 말하며 유월의 팔뚝을 쓰다듬어봤다. 미끈거리는 팔 안쪽으로 근육이 움직이는 게 갓 잡힌 물고기 같다. 당황한 듯한 유월은 굳은 채로 나를 봤다. 팔을 빼지도 못한 채, 어디 둘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백할 때는 그렇게 담담하더니, 사귀고 나서의 유월은 이렇게 나를 쑥스러워할 때가 있다. 사귀기 전이었다면, '아, 왜 만져'하고 툭하고 쳐냈을 수도.


예전에는 틱틱대기도 했는데, 지금은 전혀 그러질 않는다. 그게 왜인지 아쉬웠다. 대체 왜. 뭐가 아쉬운 걸까. 왜 나는 유월이 짜증 내길 바라는 걸까.


싱싱한 제철 채소를 고르는 사람처럼 유월의 팔을 쓰다듬고 눌러보았다. 멋진 팔이라고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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