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프랜들리 Jun 25. 2024

어떤 우정은 연애 같고, 어떤 연애는 우정 같다

유월 03

'언니, 뭐 해?'

'나, 유미랑 있어.'


오랜만에 연락한 제로언니의 답장은 어딘가 딱딱했다. 원래도 살가운 편은 아니었지만, 그 말은 어딘가 이상했다.


조용한 기숙사 방 안. 약속이 있다며 휘몰아치듯이 나간 룸메이트의 옷과 화장품이 어지럽게 흩어져있다. 침대에 엎드려서 핸드폰을 하려니 팔꿈치가 저려서 빙글 돌아누웠다.


‘아 지금 바빠?’

‘아니, 왜?’

‘유월은 친구들 만나러 가서 심심해서 연락했지. 박오빠는?’

‘박오빠는 왜 찾아?’


차가운 대답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답장을 망설이는 동안, 언니에게서 문자가 하나 더 왔다.

‘아, 할 말 있어. 학교 앞 치킨집 여섯 시’


대뜸 약속을 통보하는 언니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결국 알겠다고 답했다. 아무래도 박오빠 이야기일 것 같았다.


며칠 전 삼겹살 집에서 박오빠와 저녁을 먹었다. 한바탕 제로언니와 싸우고 축 처진 그를 위로해주어야 했다.


"그냥 우리 사이가 망가지는 것 같아서"

"그럼 망가뜨리지 않으면 되지"

"그게 어디 그렇게 쉽냐"


박오빠는 한숨을 내쉬며, 가끔은 사귀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적어도 그때는 제로와 싸우진 않았다고. 그런 생각이라면 차라리 헤어지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올 뻔했었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헤어졌다면,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생각했다.




다닥다닥 붙은 테이블마다 사람들이 들어차있었다. 기름 냄새와 난방 탓에 치킨 집은 답답할 정도로 훈훈했다.


제로와 유미 언니는 이미 테이블 한 구석에 앉아 있었는데 표정이 좋지 않았다. 진짜 헤어지기라도 한 건가. 자리에 앉자마자 맥주를 한잔 시켰다.


"뭐 시켰어?"

내 질문에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부자연스러운 침묵이 흐르는 와중에 나는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입을 연 건 제로언니였다.

“너, 오늘 내가 왜 부른 줄 알아?”

“너 박오빠랑 자주 연락하는 거 알아.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좀 심하지 않냐?”


이어진 말은 나와 박오빠에 대한 이야기였다. 매번 점심을 같이 먹는다는 것부터 연락을 주고받는 것. 그리고 내 행실과 언행까지. 제로언니는 테이블 위로 하나하나 쏟아냈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알잖아. 그런 사이 아닌 거."

나는 급기야 박오빠와의 카카오톡 창을 열어 보였다. 아무런 사이가 아님을 증명하려 했지만 빤히 보는 두 사람의 눈에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이런 거 보여줄 필요 없어. 누가 이런 거 보고 싶대?"

"그런 사이 아닌 거,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아. 그거 말고 지금 니 태도 얘기 하잖아"


“너, 나중에 이런 식으로 하면 사회생활 절대 못해”

돌연 유미 언니가 그렇게 말했다. 억울함에 눈물이 왈칵 나왔다. 그 후로는 유미 언니의 알 수 없는 질책이 이어졌다. 결국 휴지 반 통을 쓰고 나서야 시끄러운 치킨 집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치킨 집 사건 이후로는 일부로 박오빠를 피해 다녔다. 제로언니에게 한 소릴 들었는지 걸핏하면 오던 박오빠의 연락도 차츰 줄어들었다. 전화가 올 때도 가끔 있었지만 연락하지 말아 달란 문자를 남기면, 더 이상 전화벨이 울리지 않았다.


“그 책, 그렇게 재밌어?”

카페에서 유월이 물어봤다.


“응, 재밌네”

사실 그렇게 재미있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더럽게 재미없는 책이었다. 그렇게 말한 이유는 나를 힐끔힐끔 보는 유월의 시선이 느껴져서, 애써 모른 척하는 것이었다. 눈치를 봐야 하는 건 난데, 되려 나를 살피는 그를 이해할 수 없다.


제로언니는 치킨 집에서 성이 차지 않았는지 유월에게 연락해 나와 박오빠의 사이를 고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 외로 유월은 질책하지도, 그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유월이었다.


오히려 요즘 이상하게 굴고 있는 건 나였다. 우리 사이의 담백함이 사라지고, 알 수 없는 것들이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우리 사이가 맞는 건지 모르겠어'


며칠 전에는 유월의 집에서 그런 말이 덜컥 나왔다. 잠깐의 침묵 후, 유월은 나한테 바라는 것이 없다고 했다. 그냥 같이 있어주면 되는 거라고. 침대에 걸터앉은 유월은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것만으로 자신은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고.


그래도 그렇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눈을 맞춰야 할 것 같아서 미안해지는 것이다. 박오빠는 사귀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망언을 했는데, 나도 다를 바 하나 없다. 현실로 돌아온 나는 이내 책을 덮고 말했다.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집에 돌아와서는 미국 드라마 ‘로스트’를 봤다. 며칠 전부터 질리도록 보고 있던 이 긴 드라마의 끝을 무조건 보리라는 마음이었다.


“집 잘 들어갔어? 뭐 해”

유월에게 문자가 왔다. ‘재미없는 드라마 보고 있어’라고 보내려다 설명이 길어질 것 같아 ‘그냥 있지’라고 카톡을 바꿔 보냈다. 책상 위에는 편의점 빼빼로가 조용히 놓여있다.


헤어지기 전, 유월은 삼색 묶음의 빼빼로를 줬다. 오늘 11월 11일이었던가.


“감동이네, 고마워. 잘 먹을게”

미적지근하게 그렇게 말해버렸다. 딱히 그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런 말을 한 게 미안했지만, 달리 다른 말을 할 틈도 없이 유월은 가버렸다.


빼빼로 데이에는 제이가 생각난다. 우리가 살던 곳에는 한국 빼빼로를 파는 데가 없었다. 그래서 한 번은 제이가 직접 ‘한국의 맛’을 알려주겠다며 엄청나게 큰 빼빼로를 만들어줬다.


큰 바게트 빵에는 초코 시럽이 덕지덕지 발라져 있었는데, 도통 무슨 맛으로 먹어야 하는지, 애초에 이 큰 바게트 빵을 자르지도 않고 어떻게 먹으라는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어서 웃음이 나왔다.


차라리 감동이라고 말하지나 말걸. 유월이 준 빼빼로를 하나 뜯어 입이 넣어봤지만 속이 울렁거려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었다. 고작 하나 먹었는데 소화할 수 없는 기분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유월이 언제부턴가 내 앞에서 자신을 하나씩 지워내는 기분이다. 그건 절대 내가 원하는 게 아닌데. 이건 서로에게 좋지 않았다.




벌써 기말이라니.


도서관은 긴 테이블이 양 옆으로 죽 이어진 큰 공간이었지만, 학생들로 꽉 차 있어 후덥지근했다. 그나마 비어있는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 앉아야 할 것 같다.


대각선 방향에는 제로언니가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마주치면 괜히 서로 껄끄러울 것 같아 멀찍이 자리를 잡았다.


기분이 묘했다. 저번 중간고사까지만 해도 이 도서관에서 유월과 같이 공부를 했는데 지금은 혼자다. 그때나 지금이나 유월과 나는 달라진 게 없지만. 우리는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을 뿐이다. 누구 하나 맞춰주거나 맞춰지는 것 없이 원래의 모습대로. 나는 도서관, 그는 집.


헤어지자는 말을 한 건 불과 몇 주 전이었다. 운동장 돌계단에 앉아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그런 말 할 줄 알고 있었어”

그가 예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너가 한 번도 나를 먼저 보자고 부른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마음이 없는 너가 나를 부른 이유는 하나밖에 없지 않으냐’라고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뜨뜻미지근한 연애가 끝났다.


교제를 피니, 생각보다 시험 범위가 너무 넓었다. 벌써 글러먹은 듯한데.




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고개를 올리니 박오빠가 있었다. 시험공부를 하러 온 박오빠는 가방에서 책을 꺼내 테이블 위로 올렸다. 건너편에 제로언니가 있다는 건 알까 싶었지만, 이내 책으로 고개를 내렸다. 박오빠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둘은 아직도 냉전 중인 듯했다.


두어 시간 후쯤, 문자가 하나 왔다.

‘프랜아, 할 말 있어. 내려와.’

제로언니였다. 그 사건 이후로는 첫 문자인 셈이었다. 얼음이 된 나를 두고, 이미 언니는 내 옆을 스쳐 도서관을 문을 열고 나갔다.


“언니, 무슨 말할 줄 아는데, 내가 부른 거 아니야. 박오빠가 갑자기 내 앞에 와서 앉았어”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그런 말이 나왔다. 당황한 듯한 제로언니는 이내 하려던 말을 꺼냈다.


“프랜아, 나는 그냥 너한테 섭섭한 거야.”

“내가 박오빠 때문에 얼마나 그동안 힘들었는 줄 알잖아. 누구보다 너가 제일. 나 같으면 다른 자리 가서 앉았어.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어?”


“아, 내가 가만히 있어서?”

“그래, 가만히”

헛웃음이 나왔다. 곧 죽어도 미안하단 얘기를 듣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미안해 내가”

이 상황을 끝내버리고 싶어서 자포 자기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제로언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도서관으로 돌아가 짐을 쌌다. 박오빠는 어디가? 하고 입 모양을 했지만, 그를 무시하고 도서관을 나왔다.


앞으로 발을 쿵쿵 찍어가며 걸어갔다. 단단히 꼬여버린 이 관계가 이젠 지긋지긋하다. 제로와 박, 두 사람과 사귀는 기분이다. 정작 유월과는 그렇게 간단히 끝나버렸는데, 그 둘이 뭐라고.


결국 제로언니는 내게서 사과를 받아냈다. 어처구니가 없다. 유월에겐 미안하다는 말조차 미안해서 제대로 된 사과 한 마디도 못했는데 그 말이 너무 쉽게 나와버렸다. 사람이 이렇게나 간사하다.


'이 싹퉁머리'

사람 마음을 가지고 노는 이기적인 여자 애. 어디서 제이가 그런 말을 하는 것 같다. 이젠 어떤 게 우정이고, 연애인지. 누구의 잘못인지 알 수가 없다.

이전 06화 그런 생각 해본 적 없는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