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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랜들리 Jun 30. 2024

만신창이들의 밤

유월 04

허름하지만 단란한 술집이었다. 형광등 조명과 딱딱한 의자가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지만, 제로언니와 박오빠의 단골 가게라 자주 왔었다. 이런 데를 왜 좋아하냐고 물어보면 '어쩐지 걷다 보면 이쪽으로 오게 된다'며 둘이 똑같이 말하곤 했다.


이미 한 차례 술을 거하게 마신 학생들이 중앙 테이블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제로언니는 “저기 앉자”라고 구석 자리를 짚더니 자리에 털썩 앉았다.


“뭐 먹을래? 나 상관없어”


상관없다는 말은 제로언니의 단골 멘트다. 언니는 자주 이렇게 선택권을 넘기곤 한다. 털털해서 뭘 고르든 정말 상관없어했고, 음식을 가리는 나와 달리 뭐든 잘 먹곤 했으니. 그게 배려라고 느끼면서도, 어느 한편으로는 무심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꼬아 들어버리는 내 나쁜 버릇일 수도 있지만.


“어묵탕 어때?”

“그래”


오늘 아침, 제로언니에게 '우리 술 한 잔 할래'라는 문자를 받고 나온 자리였다. 예전 같으면 즐겁게 느껴졌을 자리가 이젠 일처럼 느껴졌다.


박오빠와 헤어졌다는 건 친구를 통해 건너 들었다. 그런 것치곤 제로는 생각보다 차분해 보였다. 오히려 전보다 한 층 누그러진 듯했는데, 마냥 후련해 보이지만은 않았다. 그렇다고 이제와 알뜰살뜰 눈치를 살피며, 속 이야기를 캐물을 사이는 아니지 싶었다.


빨간 앞치마를 두른 아주머니가 모락모락 끓는 어묵탕을 스텐 테이블 위에 올렸다. 박오빠 얘기가 나올 거라는 내 예상과 달리, 대뜸 다른 얘기를 꺼내는 제로언니였다.


“나, 유월 오빠랑 술 마신 거 알아?”

“아, 그래?”

“너 헤어졌다며. 그날 우리, 너한테 전화했는데 안 받더라?”

“일부로 안 받았어. 유월이 술 마시고 전화하는 거 같아서.”


“너 되게 매몰차다”


언니는 눈이 커서 빤히 쳐다보면 내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무섭게 느껴질 때가 있다. 치킨집에서 그런 말을 하는 언니와 나 중에서 누가 더 매몰찬지 모르겠지만.


“내가 헤어지자고 했는데, 전화받았으면 나쁜 사람 되는 거 아니야?”

“안 받았어도 너는 이미 나쁜 애야”


“그래, 그래서 더 나쁜 애 되기 싫었어”

언니의 말에 계속 말리는 기분이라 새침하게 그렇게 말해봤다. 어이없다는 듯이 실소한 언니는 앞에 놓인 술잔을 시원하게 비웠다.


“내가 왜 유월 오빠랑 술을 마신 거 같은데?”

“둘이 친하니까”

“아니, 나는 유월 오빠랑 친하지 않아. 우리는 너 없을 때 따로 술 마시는 사이 아니야.”


박오빠와 나를 겨냥하는 말이었다. 우리는 칠칠치 못한 너희와 다르다고. 대답을 기다리는 제로언니의 눈이 따가워서 눈을 내리깔 수밖에 없었다.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곤 대답했다.


“글쎄, 그럼 모르겠는데”

“너 때문이잖아”


정답을 알려준 언니는 자신의 잔에 소주를 따르며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 쉬운 답을 왜 모르냐는 듯이.


“넌 진짜 나쁜 애야”

다시 한번 판결을 내린 언니는 술잔을 들이켰다.




제로언니가 제대로 취해버렸다.


어찌어찌 술집에서 나왔지만, 결국 학교 앞 돌계단에서 발이 묶였다. 워낙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이라, 마시는 대로 내버려 두었건만. 제로언니는 계단에 다리를 쭉 뻗은 채 헤실거리고 있다. 결국 나도 포기한 채로 돌계단에 털썩 앉았다.


언니는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너는 그러면 안 된다느니, 속상해 죽겠다느니 하는 말을 했다. 이제 다 끝났는데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싶어서 픽 웃음이 나왔다. 술투정이 조금 웃기다고 생각하며. 몇 번의 투정 후에 제로언니는 박오빠에게 전화를 걸겠다며 핸드폰을 꺼냈다.


“언니, 그냥 집 가자. 전화하지 마”

부득불 우겨대는 언니를 막을 순 없었다. 무릎을 세워 자세를 잡은 언니는 귀에 전화기를 댄 채로 응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다시 통화 버튼을 누르고 기다렸지만 박오빠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너 핸드폰 줘봐”

언니의 말에 마지못해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여보세요’

그제야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를 받는 박오빠였다. 또 괜한 오해를 살까 봐 신경이 곤두섰다. 하필 내 핸드폰으로 전화를 하게 된 통에 집에 갈 수도 없었다. 어찌 됐든 우여곡절 끝에 둘이 통화를 하게 되었으니, 나는 담배를 피우겠다며 자리를 피했다.


학교 옆 도서관 쪽으로 빙 둘러 걸었다. 술 취한 친구를 부축한 채로 정문을 가로질러가는 학생도 보였다. '야야 정신 차려.' 하는 소리도 간간이 들렸다.


이 시간대의 학교 앞은 꼭 누군가 만신창이가 된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질척이는 모습으로 어디선가 나타난다. 마치 <하울의 움직이는 성> 속의 오물을 뒤집어쓴 하울 같다. 그리고 옆에는 부지런히 하울을 챙기는 소피가 있다. 지금 제로언니의 소피는 나고, 유월의 소피는 제로언니였다.


그날 새벽, 유월이 전화를 걸었을 때 몇 번이나 전화가 왔지만 일부러 받지 않았다. 그건 우리 둘 모두를 위해서였는데. 그도 이렇게 만신창이였을까. 항상 깔끔한 유월의 모습만 본 나는 상상이 가지 않았다. 역시 전화를 받았어야 했을까.


담배 하나를 다 태우고 돌아가보니, 언니는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아직 때가 안되었나 싶어, 자리를 피해 주려니 언니가 내게 말했다.


“너랑 얘기한대, 더 이상 나랑 얘기하기 싫대”


자포자기한 언니는 핸드폰을 건네주더니 그대로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제로언니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무너지는 언니를 보고 싶은 건 아니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기분이다.


“왜?"

“제로 지금 취했어?”

“어, 그런 거 같아, 왜”

“나는 제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냥 둘이 얘기해, 오빠”

“아니, 난 제로랑 더 이상 할 얘기 없어”

“나도 오빠랑 할 얘기 없어.”

잠깐의 정적 후에 박오빠가 말했다.


“프랜아, 부탁해서 미안한데, 제로 잘 바래다줘. 너무 취한 거 같아. 헤어졌는데 내가 갈 순 없잖아”


전화가 끊어지고 제로언니를 낑낑대며 집까지 끌고 갔다. 겨우 언니를 방까지 들여놓고 나오니, 이마가 끈적거려 앞머리가 달라붙었다. 대체 연애가 뭐길래.




캄캄한 새벽, 모든 것이 적막에 휩싸여있다. 간간이 차가 부웅하고 지나가기도 했지만 이내 정적이었다.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가는 내 발소리만 들렸다. 옆으로 학교 담장이 죽 이어진 이 길은 유월이 항상 바래다주던 길이다.


유월과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그는 자신의 고등학교 친구들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간 술자리에는 그의 친구들로 왁자지껄했다.


"프랜 씨 얘기, 사귀기 전부터 들었어요. 지겨울 정도였다니까요."

"얘 진짜 고민 많이 했어요. 여자 문제로 이렇게 고민한 건 처음 아닌가?"

모두가 나를 알고 있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친구들은 내게 많은 이야기를 해줬다. 간간이 유월이 너무 많은 얘기를 하지 않도록 자제시키기도 했지만, 친구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유월이 만난 몇 명의 여자 친구가 있었지만, 그가 별로 내켜하지 않아 헤어졌다는 것. 이렇게 진심인 유월은 처음이라는 것. 그래서 아마 그에게는 나와의 연애가 제대로 된 첫 연애일 거라고도.


"아, 정말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죄의식에 마음이 불편했다. 그런 말에 그냥 웃어넘길 수 있다니, 내 자신이 위선적이라고 생각했다.


모두가 모르고 있지만, 나는 알고 있지 않은가. 나는 그들이 말하는 착한 여자애가 아니라는 걸. 그렇게까지 유월을 위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다는 걸.


당장이라도 뛰쳐나오고 싶은 심정이었다. 두 침대와 책상, 그리고 조그만 화장실이 달린 기숙사 방으로. 그러지 않기 위해 앞에 놓인 술잔을 덥석 잡아 들이켰다.


친구들과 유월은 적당히 취해 보였다. 술집을 우르르 빠져나온 그의 친구들이 2차 장소를 골랐다. 집에 가보겠다고 말하니 유월이 바래다주겠다고 했다.


가보겠다며 인사를 하던 중에 친구 한 명이 내게 말했다. 유월이 힘들게 하면 얘기하라고. 자신이 혼내줄 테니. 그 우스갯소리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들 어때?"

"어, 재밌더라."

몇 마디를 주고받다 보니 벌써 기숙사 앞이었다. 손을 흔들고 돌아서려는데 유월이 붙잡았다.


"내가 많이 좋아하는 거 알지"

유월이 내 어깨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섬유유연제 향과 함께 알싸한 술냄새가 났다.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내 머리를 한대 쳐서 유월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면, 기꺼이 그를 위해 한 대 맞아주고 싶다고.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고, 그래서 어쩌면 헤어져야겠다고. 나는 위선적인 데다가 잔인하기까지 한지도 모르겠다.


- 유월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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