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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랜들리 Jul 16. 2024

머리 자르는 날

오일 02

‘머리 언제 잘라줘?’


오일이 대뜸 그런 문자를 보냈다. 점심으로 먹은 김치볶음밥 냄새가 거실을 떠다니고 있는 일산 집. 침대에 엎드려서 그 의미를 해석하려 애쓰는 중이었다.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고 창문을 열었다.


'머리 자르기' 임무는 해외연수 기간 중 어느 남자 선배의 머리를 잘라주면서 시작되었다. 머리를 자를 곳이 마땅치 않다는 선배의 말에 선뜻 나서서 잘라주겠다고 한 것이 발단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말 낮, 바닥에 신문지가 깔린 어느 거실 한복판에서 생애 첫 남자 커트를 하게 되었다.


막상 남의 머리에 가위를 대려니 불안했지만, 이내 머리카락을 서걱서걱 잘라냈다. 결과는 꽤 괜찮았다. 선배는 '생각보다 잘했네'라고도 했다. 그 이후로 몇몇이 내게 농담 반으로 커트를 부탁했는데, 오일도 그중 하나였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했지만, 한국에서 부탁할 줄은 몰랐다.


‘한국에서요?’

‘약속했잖아. 거짓말쟁이야?’

‘원하시면 잘라 드릴게요. 근데 보장 못해요.’

‘그래 알겠어’


결국 우리는 약속 날짜를 잡았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다. 침대 턱 쪽으로 머리를 떨어뜨리고 생각해 봤다. 구체적으로는 내가 커트한 그 선배의 머리 모양을. 그 머리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나 본데.


머리로 피가 쏠리는 기분에 다시 고개를 침대로 올리고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아마추어치곤 잘했다고.




“좋아하는 거 아니야?”


친구는 앞에 놓인 바닐라 콜드브루를 한 모금 마시고 의미심장하게 나를 바라봤다. 우리는 과제를 하려고 24시간 프랜차이즈 카페에 왔다.


지금이야 낮이라 사람들로 북적이지만, 간단한 요리부터 커피까지 메뉴가 다양해서 밤샘 공부를 하기에 최적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전공책과 노트북, 얼음이 반쯤 녹은 잔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그런 사이 아니야”

녹아내린 얼음이 고인 테이블을 휴지로 닦으며 대답했다. 나도 잠깐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해외연수 당시, 오일과는 오며 가며 가깝게 지냈다. 아침 맨 얼굴로 대뜸 가서 필요한 걸 달라고 떼쓰기도, 잠옷바람으로 모인 저녁에는 술이나 마시며 티격태격하는 그 정도의 사이였다.


더욱이 그를 싫어했던 때에는 선배 대접은커녕, 없는 사람 취급을 했다. 오해가 풀린 뒤에도 선배 대접을 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동네 친구처럼 그를 대했기에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었다.


“그럼 왜 굳이 너한테 머리를 잘라달라고 해?”

“내가 남자 머리를 좀 잘 자르긴 했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친구를 보며 속으로 웃었다.




이상한 시간. 이상한 만남.


점심인지 저녁인지 모를 애매한 대낮의 고깃집, 손님은 우리 넷 뿐이었다. 오일은 고기를 굽고, 내 친구 둘은 앞에 앉아 불판 위의 고기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치익- 고기가 익는 소리가 식당을 채웠다. 오일의 가방에는 뜯지 않은 학용품 가위 한 세트가 있다.


한 시간 전, 오일은 ‘여기, 가위 살 데 있어?’라고 문자를 보내더니, 만나자마자 자랑스럽게 가위를 흔들어 보였다. 미용 가위도 아닌 학용품 가위를. 이해하기를 포기한 나는 '그래요'하고 짧게 대답해줬다.


친구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멍하니 고기를 뒤집었다. 오늘 그녀는 그런 사이인지 아닌지 보면 딱 안다며 감별사 노릇을 하러 온 거다. 사람 구실을 하는지 가늠하는 꼬장꼬장한 아버지처럼.


결국 이번에도 친구를 데려가겠다는 말에 오일은 '뭐, 그래'하고 대답했다. 그러니까 이 조합은 각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만나는 엄숙한 자리인 셈이었다.


원래 어디 사세요? 아 거기. 저도 가봤어요. 그런 형식적인 말들이 오가는 중에 맥주와 소주가 나왔다. 퍽퍽한 분위기에는 윤활제가 필요했다. 우리는 서로의 잔에 맥주를 가득 따라주었다.




“얘가 이렇게 눈치가 없어요."

"가끔은 진짜 무슨 생각하고 다니는지 모르겠다니까요.”

“그치, 그런 구석이 있지.”

“거기 있을 때도 진짜 자기 멋대로 했다니깐. 웃긴 애야.”


술이 들어가고 농담이 오가는 중에 안줏거리는 자연스럽게 공통분모인 나였다. 벽에 걸린 초짜 화가의 미술작품이라도 품평하는 듯한 분위기 속에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었다. 나는 어서 화제가 전환되길 바랄 뿐이었다.


잔이 부딪히는 와중에, ‘머리 자르기’라던가 '그린라이트 맞추기'와 같은 각자의 임무는 증발한 지 오래였다. 이미 번호까지 교환(나로서는 첫 만남에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한 그들은 이제 10년 지기 친구들이었다.


술집을 나오니 밤은 깊었고, 가게 조명은 빛났다. 얼마나 마셨다고 취한 기분이 드는 건지. 뜨끈한 볼을 감싼 채로 조용히 친구 옆에 섰다. 아슬아슬한 기분이었다. 오래 있을수록 난감한 일만 생길 것 같았다.


“저희 갈게요, 조심히 가세요”

친구와 나는 오일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늦은 밤, 괜한 오해를 사기 싫어 평소보다 더 건조하게 말했다. 그는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얼굴이었는데, 애써 물어보지 않았다.


드디어 집. 푹신한 이불에 냅다 누워 버렸다. 결국 머리는 잘라주지 못했다. 알아서 자르겠지. 그게 뭐라고.


본인은 별 생각이 없을 텐데 괜히 연연하는 것 같아 민망해졌다. 오일은 머리를 자르러 와서는 왜 술이나 마시고 가는지. 생각을 떨쳐버리고 샤워를 하러 화장실을 갔다.




샤워를 마치고, 축축한 머리를 수건으로 단단히 동여 멘 채로 침대에 엎드려 누웠다. 둥둥. 관자놀이가 두근거렸다. 그 소리가 귀까지 들렸다. 스펀지처럼 술을 빨아들인 뇌가 눈을 누르는 기분이었다.


귀가 먹먹할 만큼 조용해졌다. 불과 한 시간 전에 유쾌하게 술을 마신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방은 너무 차분하다. 어떤 사람들과 함께 하든, 각자의 장소로 돌아가야 하는 순간은 언제나 고집스럽게 온다.


밀린 과제와 학교, 그리고 그 외 해야 할 것들이 고스란히 남겨진 이곳으로. 결국 이렇게 오롯이 혼자이게 되는 것이다. 그 사실이 만족스러우면서도 실망스러워서 나는 이 괴리감에 항상 적응하기가 어렵다.


건너편 방에서는 친구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누구와 그렇게 통화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고 생각하던 중에 문이 벌컥 열렸다.


“야, 오일 오빠랑 한참이나 전화했어.”

침묵을 깨며 들어온 친구는 울분을 털어놓았다. 무거운 몸을 들어 올리니 제대로 성질이 난 친구의 표정이 보였다.


“왜? 무슨 일인데”

“너, 눈치 바닥이야. 당장 전화해.”

단어 하나하나에 온점을 찍듯이 친구가 말했다.


“아니 무슨 일인데”

친구는 니가 직접 물어보라더니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어안이 벙벙한 나는 오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으응-’

오일의 목소리는 이미 취한 듯 늘어지고 있었다.


‘제 친구랑 무슨 얘기했어요?’

‘무슨 얘기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모르죠. 제가 알 리가 없잖아요’

핸드폰 너머로 웃는 소리가 들렸다. 어이없다는 듯이. 그리곤 곧바로 오일이 말했다.


‘너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야?’

부자연스러운 정적이 흘렀다. 그 말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오일이 빤히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겨우 한 마디를 했다.


‘저 좋아하세요?’

‘아 그걸 이제 물어보는 거야?’

또다시 정적이었다.


‘잠깐 나올 수 있어?’




핸드폰으로 부른 택시는 순식간에 집 앞으로 도착했다. 갓 샤워를 한 몸은 차게 식었고 머리카락은 축축했다. 손등을 볼에 가져다 대보니 뜨거운 김이 아직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나오기 전 재빨리 얼굴에 팩트를 두드렸지만, 그래도 맨 얼굴이 신경 쓰였다.


택시는 막힘없이 고속도로를 뚫고 학교로 향했다. 친구도, 오일도 나보고 눈치가 더럽게 없다고 한다. 아직도 감이 오질 않는 걸 보면 알만하다고 생각했다. 귓바퀴만 보이는 택시 아저씨는 묵묵히 차를 몰고 있었다. 괜한 억울함에 입이 근질거렸다. 아저씨, 제가 그렇게 눈치가 없는 거예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랬다. 거실 소파에서 쪼그려 앉아 있는 내게 오일이 ‘이거나 덮어’라며 담요를 던져줄 때. 어깨가 아프다며 주물러 달라고 이상한 어리광을 부릴 때. 아닌 밤중에 전화를 걸어올 때. 그리고 머리를 잘라달라고 했을 때.


새벽 할증이 붙는 이 시간은 위험하다. 뭐든 은밀한 이야기는 이 시간에 새어 나온다. 우리는 조금 위험하지만 흥미진진한 말을 나누리라. 곧 오일이 있는 학교 근처에 도착할 텐데, 그전에 나는 마음을 결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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