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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랜들리 Jul 30. 2024

지킬과 하이드는 한 사람

오일 03

“자 여기, 물”


오일은 가볍게 물 뚜껑을 돌리고 내게 건네줬다. 그의 동작은 언제나 경쾌하다. 그에 반해 나는 버스 좌석에 몸을 맡긴 채 축 늘어져 지독한 멀미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가 건넨 물을 단숨에 꿀꺽꿀꺽 반통 가까이 비웠다. 차가운 생수는 꿈같이 벅차오르는 맛이다.


한산한 대형 버스 안, 멀리 보면 괜찮아질 거라는 그의 말에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창 밖을 내다봤다. 복사한 듯이 일정하게 지나가는 나무.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는 집들, 그 뒤로 커다란 산이 펼쳐져 있었다. 어디쯤인지는 알 길이 없다.


“아까 멀미약이라도 먹고 탈 걸. 손 줘봐”


오일의 커다란 손이 내 손을 감싸더니 검지와 엄지 사이를 지그시 눌렀다. 마디마디가 곧고 단단한 오일의 손은 부드럽고 정확하다. 그 옆에 내 손은 검고 앙상하기만 해서 마치 아프리카 어린이 손 같았다.


“나 아프리카 어린이 손 같지 않아?”

픽-하고 웃은 오일은 그러네.라고 대답했다.


오일과 만난 지는 몇 달쯤 되었지만, 이렇게 덥석 손을 잡거나 등을 쓸어주는 그의 행동은 좀처럼 익숙해지질 않는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아마 그도 굳어버린 내 등의 감각이라던가, 어색하게 내보이는 손동작에서 어느 정도 눈치 챗으리라.


처음 그를 만날 때만 해도, 몇 주 내로 헤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성격부터 사소한 취향까지 모든 것이 다른 우리는 공통점보다는 다른 점이 많았다. 그래서 이 관계는 내게 있어서 꽤 실험적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우리 사이는 생각보다 꽤 오래 유지되고 있었다. 어쩌면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선배 중 하나는 ‘너희 꽤 오래 버티네?’라고도 했으니.


“그만해도 돼. 나 이제 괜찮아”


창가로 머리를 기대니 대각선 방향으로 거대한 산이 보였다. 평소 같았으면 지금쯤 카페에서 노트북을 두드리거나 침대에 누워 있었을 텐데. 별안간 버스를 타고 여행을 가고 있다.


어젯밤, 오일이 대뜸 내게 여행을 가자고 했다. "괜찮다면 내일."

괜찮다면 내일이라니. 황당했던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적어도 일주일 정도는 필요한 거 아닌가. 악의 없이 당당한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그래. 하고 대답해 버렸다.


그렇게 잠깐 사이에 홀려버려 완전히 다른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정말이지, 우리는 한 치 앞의 미래도 알 수 없다. 잊고 있었다. 내가 원한다면 언제든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빽빽하고 짙은 브로콜리 숲을 보며 문득 깨달았다.


오일은 나를 위해 싫은 것들을 좋은 척해주었고, 나는 싫은 척하며 오일이 하는 말과 행동을 좋아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묘하게 맞물렸다. 오일은 가끔 나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덜컥 저지르곤 했는데, 나는 그 뒤에서 그를 따라가는 재미가 있었다. 오늘의 충동 여행처럼.


“우리 도착하면 뭐 먹을까?”

멀미가 가라앉자마자 유쾌하게 오일에게 물어봤다.




점심은 근처 냉면집을 가기로 했다. 오일은 냉면을 좋아하고,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어쩜 이렇게 하나같이 다 안 맞을 수가 있나 싶다.


차가운 면을 '밥'으로 먹는 것도 이해할 수 없을뿐더러 면도 잘 끊기지 않아 먹기 불편하기만 하다. 오일은 웬만하면 내게 맞춰주는 편이라 한동안 냉면을 피할 수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흔쾌히 양보를 해줄 생각이었다.


도착한 냉면집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간신히 빈자리를 찾아 주문을 마치자마자 스테인리스 그릇에 담긴 냉면과 만두, 밑반찬이 나왔다.


살얼음과 채 썬 오이, 달걀 반쪽이 얹힌 냉면은 꽤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몇 젓가락 휘휘 저어 먹어보니 역시나 내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왠지 질겅질겅 했다. 그러는 사이, 오일은 이미 반접시를 해치웠다.


오일은 뭘 먹든 간에 밥 한 톨 남기지 않고 싹싹 비워낸다. 내가 편식을 하는 날엔 실랑이가 생기기도 했다. 더 먹어봐, 싫어, 안 먹을래 몇 마디를 주고받으면, 오일이 내 접시를 가져갔다. 그리고 묵묵히 비웠다. 그게 왠지 야릇하게 느껴졌다.


와글와글한 냉면 집. 그가 그릇을 깨끗하게 비울 때까지 착하게 앉아 기다렸다. 내 그릇도 함께 비워주길 내심 기대하며.




어두운 조명과 테이블을 빼곡하게 채운 접시와 술잔들. 다닥다닥 붙어 앉은 동기들은 어디 과, 어디 교수님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앉은 나는 어색하게나마 입꼬리를 끌어올리려고 애썼다. 개강파티는 항상 이렇게 왁자지껄하지만, 그에 비해 별로 재미는 없다.


스몰 토크에 재주가 없는 나는 그저 '어디 살아요?' 같은 관심 없는 질문 따위를 던지느라 이미 지쳤다. 대체 다들 무슨 얘기를 하기에 재미있는 걸까. 뒷 테이블에서 와하하 웃는 소리가 들리더니 박수소리까지 이어졌다. 아마 오일이 앉아있는 테이블일 것이다.


아까부터 오일 옆에 앉은 여자애가 신경 쓰였다. 앞머리를 일자로 내린 귀여운 신입생 여자애. 웃을 때마다 옆 사람을 때렸는데 오일도 몇 번 맞은 듯했다. 어깨 뒤가 저린 나머지, 결국 뒤쪽 테이블을 흘긋 보고 말았다. 배가 뒤틀리는 기분에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을 타고 밖으로 나갔다.


술집 유리문을 열고 나오니 찬바람이 훅 느껴졌다. 만약 오일이 나와 사귀지 않았더라면, 그 여자애한테 관심을 보였을까. 아니, 어쩌면 사실 조금 관심이 있을지도. 예쁜 사람을 보면 자연스럽게 호감이 생기는 것처럼. 나도 그렇지 않은가. 잘생긴 사람을 보면 얼굴을 붉히는 것처럼. 기분 나빠할 필요가 전혀 없다.


집에 갈까 고민하고 있을 때, 신입생 케이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누나, 취했어요?”

"아니, 그냥 피곤해서"


쪼그려 앉아 바닥을 보고 있자니, 다리가 저려와 일어났다. 이 남자애, 신입생인데도 벌써 이쪽저쪽으로 발이 넓었다. 오일 옆에 앉은 여자애를 아는지 물어볼까.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 케이가 담배에 불을 켰다. 오 담배 뭐야? XX요. 아 그거 너무 독해. 시원하잖아요. 으으. 별로야. 결국 별 의미 없는 얘기를 하다 함께 들어가게 되었다.


자리에 돌아오니 다들 자리를 한 번씩 바꿨는지, 오일이 내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번엔 이쪽에서 술을 마실 모양이었다.


다른데 앉기도 뭐해서 그대로 내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어쩐지 나중에는 내 옆에 앉은 케이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다들 한 차례 취해 시끄럽기만 한 술자리에서 케이와 나는 그나마 덜 마신 편에 속했다.




“야, 너 잔 다 안 비웠잖아”

오일이 농담을 던지자 주변 사람들이 낄낄대며 웃어댔다. 망설이던 케이는 결국 술잔을 비웠다. 아까부터 오일은 케이에게만 술을 먹이고 있었다. 장난이라고 하기에는 점점 도를 지나치고 있었다.  참다못한 내가 몇 번은 그만하라고 타일러 보았지만, 오일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뭐 해? 한 잔 더 받아"

이제는 협박에 가까워진 말투였다. 주변 사람들은 그저 이 상황을 재미있어하며 보고 있었고, 오일을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케이에게 '싫으면 싫다고 말해'라고 했지만, 대선배인 오일의 말을 거절하기가 난감한 듯 케이는 그저 주는 대로 술을 마시기만 했다.


비워진 케이의 잔. 오일이 다시 한번 그의 잔에 술을 따르려고 하자, 나는 그의 팔목을 잡았다.


"그만하지 그래?"

"왜? 아, 너 더 못 마셔?"

오일은 돌연 케이를 보며 연기했다.


"강요한 적 없는데? 못 마시겠으면 얘기해"

최악이었다. 눈살 찌푸려지는 상황에 참다못한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디 가?”

대답해 줄 필요를 느끼지 못한 나는 그대로 돌아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대충 씻고 침대에 누우니 이미 시간은 2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오일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지만, 그에게 연락할 생각은 없었다.


불을 끄고 적막 속에 누워있으니 이제야 조금 살 것 같았다. 오일은 가끔 고등학교 일진처럼 강압적으로 변하곤 했다. 특히 이런 술자리에서. 그런 모습을 보일 때마다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사람, 술 좋아하잖아. 소문이 별로야'


오일과 만난다고 했을 때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도 나한테는 안 그러니까. 그렇게 나는 눈과 귀를 닫았다. 결국에는 이렇게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만약 이대로 헤어지게 된다면 어떨까. 헤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오일이 다른 사람을 만나는 걸 지켜볼 수 있을까. 아까 그 여자애가 떠올랐지만 확신이 서질 않았다.


도어록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문이 끼익 하고 열리더니 침대 한쪽이 푹 꺼졌다. 나는 돌아 누운 채로 계속 자는 척을 하고 있었다. 오일에게는 바깥냄새가 났다.


"프랜, 자? 내가 미안해"


고작 그 한마디에 마음이 반쯤 사그라들었다. 분명 오늘 헤어질 거라는 마음이었는데, 저 말이 뭐라고. 내 마음이 이렇게나 가볍다.


웃기지도 않지만, 그래도 약을 올리는 게 좋을 것 같아 이대로 있어보기로 했다. 푸흐흐 결국엔 참지 못하고 웃어버리고 말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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