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 04
오일은 어학연수를 마치기 위해 한국을 떠났다.
"장거리 연애? 그거 절대 오래 못 가"
단호한 친구의 말에 나는 어쩌면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외로 우리의 연애는 순탄했다.
장거리 연애의 시작은 카카오 전화였다. 우리는 매일 통화했다. 딩디링딩, 딩디링딩딩. 이 전화연결음은 언제 들어도 긴장된다. 지겨울 정도로 자주 듣는데 아직까지도 그렇다.
다른 사람이 받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순간의 미묘한 기분을 나로서도 이해할 수 없다. 그는 전화를 순식간에 받아버려서, 핸드폰 화면을 집중해서 봐야 했다. 동그랗게 빈 그의 프로필 사진을. 딩디링딩, 딩디링딩딩.
화면이 바뀌고, 그가 전화를 받았다. 나는 ‘굿모닝’ 하고 인사를 했다. 비록 저녁이었지만, 이제 막 일어났을 그를 위해. 그는 후후 웃더니 ‘거긴 저녁이잖아?’하고 대답했다.
거긴 저녁이잖아. 그의 덤덤한 말투를 속으로 따라 해 봤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잠에서 덜 깬 듯했지만, 언제나 오일이었다. 그게 나를 안심시켰다.
"오늘은 뭐 해?"
여느 때처럼 그가 물어봤다.
"학교 가고, 똑같지. 오빠는?"
"오늘 나 애들이랑 시내로 나가"
"오오 재밌겠네"
잠깐의 침묵 후에 내가 말했다.
"나도 오늘 약속 있어, 친구랑"
"친구 누구?"
"있어. 오빠 모르는"
“내가 모르는 친구가 있어?”
오일은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라는 듯이.
“내가 그렇게 친구가 없어 보여?”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으으- 하는 소리와 함께 뚝뚝 소리가 났다. 오일이 침대에서 일어나는 소리다. 그는 매일 아침 목을 양옆으로 꺾는다. 예전에는 그게 조금 기괴하게 느껴졌는데, 지금은 아쉬울 뿐이었다. 그건 곧 전화를 끊어야 한다는 신호였다.
“나 오늘 좀 일찍 가봐야 하는데”
”응응 알겠어"
현실로 돌아왔다. 그가 있는 싱그럽고 이국적인 아침에서 해가 지는 서울의 저녁, 작은 침대 속으로. 갑작스러운 침묵과 오일의 부재는 가끔 너무 매몰차게 느껴진다.
전화가 끊어지면 다시 이곳에 익숙해지기 위해 애써야만 했다. 곧 약속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오늘 내 약속은 사실 후배 케이였다. 분명 그는 싫어할 테지만.
오일은 보수적이었다. 그에게 남녀사이에 친구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케이는 내게 좋은 친구였다. 그건 일종의 반항이었다.
나는 자정이 되자마자 집을 들어가야만 했다. 며칠 전엔 몇 차례 언성이 높아진 끝에 택시를 탔다. 나 지금 택시 탔어. 응응, 집 가서 다시 전화할게.
택시 안에서 어두컴컴한 창 밖을 보며 생각했다. 장거리 연애는 고작 핸드폰에 내 마음을 모두 쏟는 기이한 일이라고. 핸드폰이 고장 나면 우린 어떻게 되는 걸까. 연결고리가 끊긴 우리는 헤어진 거나 다름없는 사이이지 않은가.
케이와 만난 건 수업이 끝난 직후였다.
"안녕, 케이"
며칠간 해외여행을 다녀왔다는 케이는 얼굴이 새까맣게 타 있었다. 그는 배낭여행에서 겪은 에피소드를 하나둘 풀기 시작했는데, 환하게 웃을 때마다 새하얀 치아가 유난히 도드라졌다.
나는 집, 학교를 오가는 지루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여행이며, 동아리에서 만난 새 친구며 하는 케이의 이야기는 다른 세상 이야기처럼 들렸다. 그는 충동적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고, 두루두루 친화력을 뽐내며 쉴 틈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대단하다 정말, 피곤하지도 않니?"
"내가 재밌어서 하는 건데요, 뭐"
그런 부분은 오일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오일은 케이보다 더 시니컬하고, 새하얗지만. 핸드폰을 확인하니 그에게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지만, 일부러 받지 않았다.
케이는 식성 또한 놀라웠다. 순식간에 테이블의 음식을 해치우는 모습에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마지막 남은 토마토 조림을 겨우 건져먹곤 술과 안주를 더 시켰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내 이야기를 꺼냈다. 요즘 내 신데렐라 같은 일상을.
"힉- 그래서 중간에 택시 타고 갔다고요?"
"저번에도 그랬어. 친구랑 같이 집에서 들어가서 인증샷 찍어서 보내야 했다니깐"
"아이 그건 좀 심했네"
다시 오일에게 연락이 왔다. 핸드폰에는 부재중 전화가 10통 넘게 찍혀 있었다.
"음 나 전화 좀 받고 올게"
"어디야?"
"밖이야"
"누구랑 있어?"
"케이, 술 마셔"
"너 진짜.."
오일의 목소리에서 할 말을 잃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더럽게 눈치가 빠르고, 촉도 좋다. 그에 반해 나는 눈치도 없고 거짓말도 서툴러서 결국 이렇게 다 실토해버리고 만다.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너, 앞으로 니 마음대로 해. 나도 이렇게 매번 화내는 거 지치니깐. 이럴 거면 우리 그만하자"
온몸의 피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의 말을 의심했지만, 이미 너무 또렷하게 들었다.
"진심이야?"
"응, 그만해"
잘못했다는 말을 듣기 위해 어설프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미련이 없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는 끊어졌다. 일방적이고 과격한 그의 태도에 손 끝이 떨렸다.
내가 저지른 짓이었지만, 이런 걸 바란 건 아니었다. 나는 급히 술집으로 돌아가 케이에게 인사한 후, 택시를 잡았다. 오일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다.
딩디링딩, 딩디링딩딩. 이 와중에 청량한 전화 연결음은 낯설게 느껴졌다. 내 상황을 비웃는 것 같았다. 오일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불 꺼진 침대에 누웠다. 한 시간 전만 해도 괜찮았던 기분이 전화 한 통으로 무너졌다.
우리가 이렇게 처참해진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마음의 여유가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 조금만 가까웠더라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거라고.
그와 헤어진 이후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내 일부를 가지고 그 나라로 달아난 기분이었다. 그게 억울하기도 했다. 끝내 전화를 받지 않는 오일 덕분에 깨달았다. 나는 생각보다 그를 많이 좋아하고 있었다.
‘나 정도면 괜찮지’
그가 언젠가 그렇게 말한 게 떠올라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오전 8시의 카페는 고요했다. 오픈 준비를 하며 이리저리 쓸고 닦고, 재고 확인을 하다 보니 어느새 오전이 훌쩍 지나갔다.
커피 머신이 웅웅 소리를 내며 오늘의 첫 테스트 샷을 추출했다. 뜨거운 에스프레소가 스테인리스 잔에 떨어지는 걸 보며 생각했다. 이런 똑같은 일상도 나쁘지 않다고. 뭐든 손에 익어버려서 아무 생각 없이 몸이 먼저 움직이게 된다. 그래서 좋았다.
언젠가 나는 카페 사장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일상을 상상했다. 어둑해진 저녁, 회사에서 퇴근한 오일이 내가 있는 카페로 오는 장면을. 나는 쇼윈도로 비치는 오일을 보며 반가워하다가 이내 울상이 되어 말한다. ‘아 오늘 손님이 많았어, 마감 좀 도와줘’ 그럼 오일은 한숨을 내쉬고 잔소리를 한 두 마디 하다 마감을 도와줄 것이다.
오일은 결국 내 사과를 받아주었다. 우리는 다시 매일 밤 전화를 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날 이후로 나는 그가 원하는 대로 제때 집에 들어갔다. 케이와의 연락도 자연스레 끊겼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가도, 오일의 목소리를 들으면 하염없이 약해져 버렸다.
두 번째 샷을 추출했다.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카페 안. 넓은 공간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 묘하게 느껴졌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오일은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고, 그의 전화나 목소리, 그의 얼굴까지 전부 내 상상 속의 일이라고. 사실 나는 남자친구를 너무 만들고 싶은 정신 이상자일수도.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과 안정적인 연애를 해도 결국 이렇게 공허해지고 마는 것이다.
어학연수 기간 동안 오일의 집에서 같이 지내고 싶다고 한 여자 후배가 있었다. '거처를 구할 동안만' 이라고는 했지만, 오일은 그 후배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당연히 거절했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나는 ’다행이네‘라고 했지만 사실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내 걱정은 그가 바람을 피울까 봐가 아니었다. 그가 말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몰랐을 거라는 사실이 내 속을 뒤집었다. 오일이 여자후배와 같은 집에 살고 있더라도 알 방법이 전혀 없는 거다. 언제부턴가 내 기분과 하루가 온전히 오일에게 달려있었다. 마치 아끼는 유리잔을 순진한 아이에게 맡긴 기분이었다. 완전히 눈이 가려진 채로.
에스프레소를 물에 부으니 투명한 유리잔이 빠르게 탁해졌다. 결국 우린 남인 것이다. 서로를 통제하려 해도, 아무리 마음을 표현해도 말이다. 각자의 부모님에게서 태어난 각자의 존재다. 언제든 한쪽이 돌아서면 끝나버리는 유리잔 같은 관계. 마음이 취약해지는 기분이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날이 추워 시킨 코코아는 밍밍해서 처치곤란이었다. 마시멜로는 애매하게 녹아 끈적하게 컵의 표면에 달라붙어 있었다. 오늘은 미루던 과제를 이 카페에서 반드시 끝내야겠다는 마음이었다. 저녁 시간, 막판 스퍼트를 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오일에게 카톡이 왔다. 이 시간이라면 그곳의 새벽일 텐데. 의아했다.
‘너가 싫어할까 봐 얘기 못한 게 있어’
예기치 못한 불행은 언제나 느닺없이 찾아온다고 했던가.
실시간으로 올라오던 카톡은 이내 작은 화면을 가득 채웠다. 그건 싸움에 휘말린 오일의 이야기였다. 그는 심각한 일이 아니라며 나를 안심시키려 했다. 하지만 이건 심각한 일이었다.
오일은 이전에도 몇 번 싸움에 휘말린 적이 있었다. 한 번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휙 돌아서 집으로 가버리기도 했다. 그는 그런 내가 너무하다고 했지만, 나는 오일의 그런 모습을 볼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이번이 네 번째. 이제 누가 먼저 싸움을 걸었는지는 더 이상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네 번이면 충분했다.
그다음 타깃은 나일수도 있다. 둥둥. 마음이 울렸다. 이건 위험신호였다. 지금이라고. 더 늦기 전에 지금 끝내라는 경고 같았다. 카페 아르바이트생이 마감 시간을 알렸다.
버스를 타고 창밖을 바라봤다. 날이 습하고 눅눅하다. 비가 올 것 같았다. 창에 머리를 대고 오일에 대해 생각했다. 정확히는 나와 오일의 관계에 대해. 나와 그의 관계는 정의하기가 어렵다.
그의 좋은 점, 그의 나쁜 점. 그런 것들을 분간하기엔 나도 딱히 그에게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이런 생각을 되풀이하다간 결론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내 결심한 나는 곧장 문자를 보냈다.
‘그냥 우리 그만하자’
그렇게 보내놓고 나서 나도 놀라고 말았다. 내가 이런 말을 이렇게 쉽게 하는 사람이었나 싶어서. 그 말은 우리의 대화방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미룰 수도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