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01
조용한 강의실, 창 밖으로는 해가 진다. 학기의 첫 주였다. 교수는 앞으로의 수업을 설명했다.
연달아 두 개의 수업을 마치고, 마지막 수업. 2,500원짜리 커다란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이 시간을 버텨내야 했다.
오후의 강의실은 축 처진 미역 같다. 이 미적지근한 분위기는 뭐라 설명할 수가 없다.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한데, 빨리 끝내 달라는 비명이 들리는 것 같다.
색다른 수업이니 뭐니 해도, 일찍 끝나는 수업이 가장 좋은 수업이다. 혀를 긁어 올려 하품을 참아내야 했다. 교수님이 팀별 과제 조를 앉은 대로 슥슥 나눴다. 이제 눈도장을 찍고 인사만 하면 끝이다.
모르는 사람들과 빙 둘러앉아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사도고요. 전공은 중국어과예요”
사도라는 남자가 자신을 소개했다. 곰돌이처럼 착해 보이는 인상. 중국어과라서 괜히 중국인처럼 보였다. 예상대로 수업은 자기소개 후에 마무리되었다.
“저.. 혹시"
일어서려는 찰나, 사도라는 남자가 말을 걸었다. 빨리 가고 싶어 안달이 난 나는 조금 짜증이 났다.
“어… 네”
"방송 영상 수업도 들으시죠? 그 수업 오리엔테이션 때 뵌 거 같아요”
부전공 수업을 두 개나 신청했는데, 아는 사람이 없었다. 언어 계열 학과에 같은 부전공, 그것도 수업이 두 개나 겹친다면 친하게 지내야 했다. 머리를 굴리곤 산뜻하게 인사했다.
"아 정말요? 신기하네요"
사도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 이후, 사도를 방송영상 수업에서 보게 되었다.
수업 시작 전, 강의실은 어수선했다. 방송영상학과 학생들은 보는 사람마다 인사를 하느라 바빴다. 그 모습을 홀린 듯이 보다가 창가에 앉은 사도를 발견했다. 나랑 같은 처지인 그는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바로 옆에 앉았다.
“진짜 이 수업 들으시네요?”
말을 트자 대화는 막힘없이 술술 이어졌다. 중국어 통역부터 영상 편집 아르바이트까지 하는 그는 바쁜 대학생활을 하고 있었다.
영상편집 실력이 수준급이겠다고 감탄하니, 그는 그 정도는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와의 대화는 생각보다 즐거웠다. 모처럼 괜찮은 친구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수업을 마친 후는 공강이었다. 여름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밝고 평화로웠다. 학교 후문의 단골 카페에 갔다. 오늘은 완벽한 날씨와 종종 시켜 먹던 와플을 즐길 틈이 없었다. 다음 수업의 쪽지 시험 문제를 외워야 했다.
짙은 우드톤의 이 카페는 유독 어둡다. 그래서 유리통창을 전부 열어두는데, 자연광이 들어와 오히려 좋았다. 3시. 애매한 시간의 이 카페에는 나와 뿔테안경의 남자, 그리고 보이진 않지만 포스기 뒤에 있을 사장님 밖에 없다.
오늘 만난 사도가 생각났다. 그런 차분한 느낌의 사람은 오랜만이다. 내 주변에는 수선스럽거나 거침없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에 반해 사도는 나와 비슷한 결의 사람이었다.
왠지 선비와 차를 마시고 나온 기분. 선비라니. 속으로 웃었다. 내가 붙인 별명이지만 너무 잘 어울리지 않는가. 아마 그도 이 카페를 좋아하리라.
인위적인걸 좋아하지 않는다. 인위적인 조명, 인위적인 만남. 인위적인 딸기맛 사탕. 누군들 안 그러겠냐마는 나는 특히 그렇다.
그래서 사도가 인상 깊었다. 첫 만남에 그런 자연스러운 대화는 쉽지 않으니까. 눈에 띄거나, 어디 가서 이목을 끌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그건 그것대로 좋았다.
띠링- 카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런두런 들리는 말소리가 왠지 익숙해서 고개를 들어보니 오일이 있었다. 너무 놀란 나는 다른 데로 눈을 돌릴 생각도 못했다.
그도 나를 보고 놀라더니 휙 하고 고개를 돌렸다. 오일 앞에는 앞머리를 내린 여자애가 있었다. 헤어지고 나선 첫 마주침이었다. 오일은 카페 한 구석에 새 여자친구(로 보이는)와 자리를 잡았다.
여기는 내 단골 카펜데. 장소를 빼앗겼다는 생각에 분한 마음이 들었다. 책으로 눈을 돌렸지만, 온 신경이 그 테이블을 향했다.
한때는 누구보다 잘 아는 사이였는데 기를 쓰고 모르는 척하는 이 상황이 웃겼다. 없어서는 안 될 것 같던 사람이, 이제는 인사조차 껄끄러운 사이라니. 불과 몇 달 사이에 말이다.
앞에 앉은 여자는 오일의 관심을 끌려는 듯 조잘조잘 말을 했다. 다시 보니 옷차림이 아찔했다. 과하게 달라붙는 짧은 반바지에 내가 죄책감이 들 정도였다.
오일은 어쩐지 분위기가 차가워진 듯했지만,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옷차림, 신발, 그가 들고 있는 핸드폰 기종까지. 모든 것이 똑같다. 달라진 건 관계일 뿐이다. 나만 쏙 빠진 오일의 세계. 그렇게 보니 오일과 짧은 바지 여자가 꽤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달랐다. 사귀기 전부터 데면데면했던 것도 그런 이유다. 나는 좋게 말하면 모범생, 나쁘게 말하면 재미없는 타입이었고 오일은 좋게 말하면 잘 노는 사람, 나쁘게 말하면 날라리였다. 우리 사이에는 언제나 그런 벽이 존재했다. 애초에 어쩌다 눈이 맞은 건지도 모르겠다.
한 곳에 머물러있을 것 같던 마음이 이렇게 쉽게 바뀐다. 그건 속상한 일이다. 그 말은 누구든지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뜻이니. 오래오래 함께 하자라던가, 사랑한다던가 하는 말들이 분명 진심일 때가 있었는데 말이다.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 나는 짐을 챙기고 카페를 나왔다.
역시, 내편은 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