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 05
사람들로 빼곡한 주말의 영화관. 팝콘기계를 보고 있었다. 기계 안에서 팝콘이 두두두 불어나고 있다. 영화관 안이 온통 이 끈적한 캐러멜 향이다.
맛보다 향이 더 좋은 것들이 있다. 커피 볶는 향, 델리만쥬, 캐러멜 팝콘도. 막상 시키면 그 맛이 나질 않는다.
“팝콘 먹고 싶어?”
어느새 온 그는 손에 표 두 장을 들고 있었다. 검은 롱코트를 입고 있는 그의 이름을 기억해보려 했지만, 생각나지가 않는다.
지난주에 알게 된 사람이었다. 그가 나보다 한두 살 위라는 것만 어렴풋이 알 뿐, 그 외에는 전혀 아는 게 없었다.
“아니, 별로”
그는 근데 뭘 그렇게 보냐며 싱긋 웃었다. 그리곤 핸드폰 시간을 확인하더니 들어가자고 했다. 새카만 영화관의 스크린에서는 광고가 재생되고 있었다.
의미 없는 광고를 보던 중, 그가 말을 걸어왔다. 영화 평이 좋았다는 그에게 '그렇구나'하고 건조하게 대답하곤 다시 스크린으로 눈을 돌렸다.
몇 주 전에는 어느 남자애한테 엄청나게 긴 문자를 받았다.
'프랜아, 모르는 척하지 마'
그렇게 시작한 문자는 핸드폰을 빼곡하게 채우고도 스크롤을 내려야 끝이 났다. 마음이 없다면 그만하자는 말이었다.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고. 모르는 척하는 것도 지겹다고.
별안간 피시방에서 받은 이별통보였다. '그래. 미안해'라고 문자를 보낸 뒤, 다시 게임으로 눈을 돌렸다. 과연 2주짜리 연애도 연애라고 할 수 있을까.
남자한테 차였는데 감흥이 없었다. 오히려 나쁜 사람이 될 뻔한 걸 간신히 면했다는 생각에 홀가분했다. 하지만 결국 알아버린 것이다. 내가 모르는 척하는걸.
아니야. 그냥 심심하니까, 아무 사이 아니야. 그렇게 말해 놓곤 사실 알고 있었다. 내 앞에 앉은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시선이라던가, 불필요한 친절, 그리고 머리를 매만지는 특유 손짓에서. 그건 감각이라는 것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묘한 기류가 흐르면 그 안에 내가 확실하게 있음을 느꼈다. 아주 생생한 형태로. 그 안에서 쌓이는 우리의 서사가 달콤하면 그만이었다. 아슬아슬한 만남의 끝이 어떻든 간에. 이 순간, 그 눈에 내가 담기면 그뿐이다.
영화는 후반부를 향해 가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이런 만남과 헤어짐이 신발에 붙은 벨크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찌직- 소리 한 번에 떼어지고 붙는 것처럼 가볍고 간편하다. 마음이 없는 대도 있는 척, 있는 대도 없는 척하기 시작한 건, 오일과 그렇게 되고 나서였다.
영화가 끝나고 주변에 환해졌다. 아직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중인데, 사람들은 벌써 영화관을 빠져나가고 있다. 불이 켜지자마자 스프링처럼 벌떡 일어나는 사람도 있었다.
대단한 현실감각이다. 나는 내 몸, 나만의 삶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는 중인데, 사람들은 빠르게 현실로 돌아간다.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로. 빨간 의자에 멍청하게 나만 앉아있다. 그리고 옆엔 나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그.
“어때 재밌었어?”
“응, 재밌다.”
그의 눈이 나를 살피는 게 뻔히 보여서 모든 게 시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앞 돌계단에서 친구와 캔맥주를 마셨다. 계단 구석마다 자리를 잡은 학생들, 그리고 가방을 멘 학생들이 느릿하게 걸어 다닌다.
별의별 사건 사고가 터지는 캠퍼스지만, 이곳 돌계단만큼은 스머프 마을처럼 평화롭다. 마음까지 경건해지는 기분이다.
“근데 이번에도 잘 모르겠어”
그 사람에 대해 얘기했다. 친구는 ‘그건 너무했다’라든가, ‘이번엔 좀 오래가라’든가 몇 마디 거들었다. 그 거리감이 좋았다.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적당한 관계. 친구 관계에서는 연인과 다른 산뜻함과 담백함이 있다.
“그 사람, 만났는데 이름이 기억이 안 나더라”
그 말에 친구는 ‘이놈의 기집애’를 연발하며 내 팔을 찰싹찰싹 때렸다.
“오일은? 안 보고 싶어?”
“글쎄, 뭐 딱히”
단편적으로 그가 생각날 때도 있다. 이 돌계단에서 그와 맥주캔을 땄던 때나 누군가 그에 대해 불쑥 말을 꺼낼 때. 하지만 그 정도였다. 지금은 그가 어떻게 지내는지도 모른다. 아무렴, 상관도 없었고 이대로 모르는 편이 좋았다.
"아 그때 웃겼잖아"
마음이 시시각각 변한다. 날씨는 좋고, 이 자리는 재미있는데 도통 집중을 할 수가 없다. 눈은 친구를 향해 있었지만, 머릿속은 이미 오일에 대한 생각이 족쇄처럼 남아 버렸다. 결국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다 헤어져 버렸다.
사방에 벌써 캄캄해지고 가로등이 켜졌다. 어두운 곳을 좋아한다. 오일과 내가 새로 발견한 술집의 조도가 딱 이 정도였다.
그 술집에서 오일이 나를 봤다. 그는 가끔 나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볼 때가 있다. 시선이 따가웠던 나는 고구마칩이 담긴 종지로 눈을 내렸다. 왜 보냐고 물어보니 그는 ‘그냥’이라고 대답하곤 안주로 나온 고구마칩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원래 나 너 보는 거 좋아해”
잘도 그런 말을 한다 생각한 나는 부끄러웠는데 오일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나도 그처럼 뻔뻔하게 저런 말을 하고 능글 맞게 웃어 보이는 사람이고 싶다.
“우리 그 처음에 만났을 때 말이야”
“응”
“나 오일 되게 싫어했어”
“알아. 나도 너 되게 재수 없어서 싫었어”
“어쩐지. 그럴 것 같았어”
앉아있던 스툴을 양옆으로 움직이며 말했다.
“신기하다 그치”
당장이라도 오일이 저 어두운 골목에서 나타날 듯하다. 내가 좋아하던 이상한 미소를 보이며. 진짜 어디서든 나타나지 않을까 싶어 두리번거렸다.
이건 오일이 그리운 게 아니라, 그때가 그리운 것이다. 지금 시간이 늦었고, 밤길이 삭막하니까. 그게 뭐든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 게 속상해서. 추억을 곧잘 미화하는 내가 아쉬워서 드는 생각이리라.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
오일은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하는 편이었다. 그 말이 남사스러웠던 나는 말을 돌렸다. 사실 그렇지 않아서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내 마음은 그런 무거운 단어랑 거리가 멀었다. 그보단 가볍고 산뜻했다.
지갑에는 예전에 그가 준 그림을 꺼내 가로등에 비춰봤다. 파란 볼펜으로 얼마나 꾹꾹 눌러 그렸는지 얇은 종이가 우둘투둘하다. 오일이 이걸 주면서 말했다. 엄청 열심히 그렸음.
우리의 마지막 연락은 지저분했다. 며칠간은 부재중, 또 며칠간은 연락이 폭풍처럼 왔다. 처음에 오일은 부정했고, 이내 남자라도 생겼냐며 화를 냈다. 그리고 나는 나대로 천천히 갉아먹혔다.
당장이라도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꺼내 오일에게 연락할 수도 있다. 잘 지내냐느니 하는 진부한 문자를 남겨볼 수도 있고, 눈을 딱 감고 전화를 해버릴 수도 있다. 이거 엄청난 미련이네.
사람은 절대 행복 속에서 행복을 찾지 못한다. 불행과 고통에서 행복의 때를 기가 막히게 찾아낸다. 이 냄새나는 칙칙한 거리에서 새삼스럽게 사랑을 발견했다.
- 오일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