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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랜들리 Sep 23. 2024

인정하는 순간 풍선처럼

사도 02

사도는 수업 직전, 건물 앞에서 마주쳤다. 왠지 오빠라는 호칭은 낯간지러워서 고민 끝에 그를 '사도 씨'라고 불렀다. 그의 앞머리는 오늘도 신기하게 찰랑거렸다.


“이거, 저번에 궁금하다고 해서 가져와 봤어요”

그는 주머니에서 빨간 봉지를 꺼내 내밀었다. 약간 구겨진 봉지엔 중국어가 휘갈겨져 있었다. 이 사람, 별 걸 다 기억해주고 있다.


그는 이번에 중국에서 사 온 과자라며, 친구들이 좋아한다고 덧붙였다. 목소리도 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분하고 고요하다. 목소리가 왜 고요하게 들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느낌이 든다.


별안간 사도와의 눈 맞춤이 괜히 부끄러웠던 나는 과자로 시선을 옮겼다. 그냥 과자를 말할 뿐인데 비밀 이야기라도 듣는 듯하다. 딱히 할 말이 없어진 우리는 잠깐의 침묵을 지켰다.


“저는 사탕 있는데. 드실래요?”

주머니에서 이클립스 통을 꺼내 흔들자, 그는 빙긋 웃으며 달라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이클립스를 문채, 수업에 들어갔다. 흘긋 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기분 좋은 불안에 휩싸인 나는 모르는 척하며 사탕을 녹였다.




고급스러운 베이지 톤의 인테리어와 높이 트인 천장, 그리고 베이커리 스탠드 위에 쌓인 빵들. 오늘은 여기서 친구를 보기로 했다. 학교 앞 카페는 비싸고 시끄럽다. 단골 카페는 오일에게 뺏겼다. 거의 다 찍은 음료 쿠폰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여기 잘 안 오잖아”

친구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터무니없이 낮은 소파는 불편해 보였다.


“그냥, 기분 전환”

말하면서 이 카페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다. 특히 시나몬 가루가 뿌려진 핫초코가 마음에 들었다.


“나, 요즘 친해진 사람 있다?”

친구에게 사도 이야기를 꺼냈다.


"뭐야"

수상한 기운을 감지한 친구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그와의 첫 수업, 사소한 대화까지 털어놓았다. 친구는 흥미로웠는지 이내 사진까지 보여달라고 했다.


"그런 사이 아니라니까"

"알겠으니까 일단. 보여줘 봐"

친구는 피냄새를 맡은 상어 같다. 사진이 뭐라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카카오톡을 찾았다. 하지만 프로필 사진이 없었다. 결국 우리는 붙어 앉아 그의 SNS를 뒤지기 시작했다.


"영어로 쳐봐, 학과가 뭐라고?"

그녀의 지시에 따라 나는 중국어과 사람들의 프로필을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같은 학교인 덕분에 사진을 찾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결국 찾아낸 사진을 친구에게 보여주었다.


“이 사람, 너무 다른데”

사진을 본 친구가 말했다.


"뭐가?"

"너가 만난 사람이랑 다르다고. 느낌이"

어느 정도는 동의했다. 나는 화려한 사람이 좋았다. 한눈에 꽂히는. 오일이 떠올랐다.


"그렇겠지. 그냥 친해진 거야, 별 마음 없어"

큰 의미 없는 일이었다. 친구가 생겼다는 단순한 해프닝. 애초에 친구에게 시시콜콜 얘기한 이유를 나로써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가 준 중국 과자 탓이다. 별생각 없이 준 선물인걸 알면서도, 오랜만에 받은 선물에 느끼는 뜻 없는 설렘인 것이다.




카메라 실기 수업. 어두운 강의실에서 세 대의 커다란 카메라 앞 스튜디오만이 빛났다. 학생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교실, 카메라 프레임 안에는 한 학생이 스크립트를 읽었다. 몇 번째 반복 중인 스크립트 내용은 지루했다.


사도는 건너편 구석에서 여학생과 스크립트를 보며 상의하고 있었다. 녹음 중이라 목소리를 낮추기 위해 이따금씩 손으로 입 주변을 가리고 속닥거리기도 했다.


그가 방송사 PD를 해도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실제로 비슷한 PD를 본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사도가 갑자기 고개를 드는 바람에, 나는 다급하게 카메라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보이진 않지만 여전히 얘기 중일 것이다. 그의 톤으로 낮고 조용하게. 마음 한 켠이 서늘했다.


빨간 카메라 불빛이 규칙적으로 깜빡거렸다. 최면에 걸리는 기분으로 보고 있자니, 마음이 차분하게 잠겼다. 친구가 다른 친구랑 얘기한다고 마음이 가라앉는 건 속좁은 일이다. 어린애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두운 교실 때문일 거라고 위안 삼았다.


카메라 프레임 안에는 뒤로 머리를 단정하게 넘긴 여학생이 또박또박 스크립트를 읽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사람에게 불쑥 빠지는 순간이 있지 않은가. 어쩌면 나는 생각보다 사도를 더 좋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인정하는 순간, 마음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그건 위험한 일이다. 한 번 떠오르면 걷잡을 수 없어진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안고, 쉽게 행복해져 버린다.




"도대체 뭐가 좋은데?"

"글쎄. 그냥."

친구에게 그렇게 대답해 버렸다.


그런 식으로 싱겁게 말할 만큼 가벼운 마음은 아니었지만, 뭐라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그것보다는 내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정말이지, 어떤 점이 좋은 걸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 점퍼 주머니 속에서 손바닥만 한 거울이 만져졌다. 며칠 전, 언제 어디서 사도를 마주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덜컥 샀다.


그를 갑작스럽게 마주치게 되면 거울이 소용 없어지겠지만, 마스카라가 번진 채로 마주하는 무시무시한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막상 거울을 볼 일은 없었다. 그래도 마음은 안정되었다.


며칠 전에는 아침부터 그가 생각났다. 알람을 다섯 개나 맞춰놓고도 쉽게 일어나지 못하던 날. 세 번째 알람을 간신히 끄고 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토스트가 입천장을 긁을 때에도, 오늘이 사도와의 수업이 있는 날임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다.


시간이 넉넉해서 화장에 더 신경 썼지만, 그런 화장은 실패하는 법이라도 있는 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허겁지겁 뛰어서 가까스로 열차를 탔지만, 막상 도착해서는 천천히 걸어갔다. 열심히 빗질한 앞머리가 망가질까 걱정하면서. 그러다 프린트가게에 들러 필요한 유인물을 출력하고 나오자마자, 사도와 마주쳤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흔들었고, 그도 웃어주며 인사했다. 아침부터의 모든 찰나의 순간이 빛을 발했다. 세 번째 알람을 듣고 일어난 것도, 한 번의 열차를 놓친 것도 어쩌면 이 순간을 위해 있었던 것처럼.


어떤 점이 좋았는지 굳이 말하자면, 물이 빠져 옅은 갈색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이, 그리고 그걸 몇 가닥 손가락으로 정리할 때의 가지런함도. 웃을 때 기울어진 고개의 각도가 적당했다. 이렇게 얘기하면 친구는 나를 미쳤다고 할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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