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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랜들리 Oct 04. 2024

와이파이가 아니라 블루투스였으면

사도 03

더운 밤, 오일을 마주쳤다.

친구와 술기운을 식히러 나온 것이 문제였다.


그는 술집 앞에서 담배를 들고 서 있었다. 더럽게 자주 마주쳤다. 그리고 언젠가 본 여자애의 뒤통수. 이 불편한 마주침이 뻔한 CC의 결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특별했든 간에 결국 우리도 CC의 클리셰를 거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엔 마음이 소란스러웠다. 하지 못한 말을 털어내야 할 것 같았다. 오해라던가, 입장 같은 걸 깔끔하게 매듭지어야 하는 거 아닌가. 다들 이런 식으로 껄적지근하게 헤어질까.


관계를 깔끔히 정리한다고한들 그건 무슨 소용일까. 어차피 더는 볼 사이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 생각 이후론 얽힌 오해나 입장 같은 것을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여자 애가 눈에 띄었다. 정확히는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날 듯한 귓바퀴가. 언젠가 오일이 그랬다. 여자의 귓바퀴가 머리 사이로 튀어나온 것이 무섭다고. 그게 대체 왜 무섭고 싫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웃기다고 생각했다.


가끔 내 귀가 머리 사이로 보일 때면 그가 ‘으- 머리머리’ 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게 귀여워서 일부러 머리를 그렇게 만들기도 했다. 그때의 나도, 지금의 나도 난데, 두 사람이 완전히 다르다.


'아 젠장. 저기 전여친'

'아 그 여자?'


혹 그런 얘기가 오갈까. 내가 그의 '전여친 컬렉션'의 일부가 된 것 같아 묘하게 기분이 안 좋다. 둘의 애정 행각을 상상해 봤다. 그건 아무래도 비위가 상하는데, 그건 그때의 나에 대한 죄책감이리라.




새벽 2시. 중간고사 기간의 도서관은 최악이다. 오래된 도서관에서는 찝찝한 냄새가 나고, 테이블마다 바싹 붙어 앉은 학생들은 피곤에 절여져 있었다. 나는 술이라도 걸친 듯 몽롱한 기분이었다. 이상하게 살짝 상쾌한 기분도 들었다.


눈앞에 책을 펼쳐놨지만, 사실 사도의 답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못 참고 핸드폰을 켰다. 그는 반대편 빌딩 빈 강의실에서 공부 중이라고 했다. 틈틈이 조금만 더 버티자는 등, 피곤하다는 등의 문자가 이어졌다.


'이 시간에 누구랑 카톡?'

친구가 공책을 건넸다. 째려보는 이모티콘도 함께 그려져 있었다. 딴짓 그만하고 공부하라는 의미 같았다. 나는 공책에 '사도'라고 적어 돌려줬다.


의자에 걸린 흰 비닐봉지가 바스락거렸다. 그 안에는 편의점에서 사 온 군것질이 가득했다. 우리는 고카페인 커피우유를 사러 갔는데 하필이면 그게 없었다. 대신 박카스, 비타민 음료부터 젤리, 초콜릿까지 이것저것 집어온 것이다.


우리는 도서관으로 돌아오는 내내 낄낄댔다. 고작 스누피가 그려진 커피우유를 사러 갔다가 쇼핑을 하게 된 게 웃겨서. 흰 비닐봉지가 중간고사 기간의 우리 정신상태를 보여주는 것 같아서.


핸드폰의 검은 창이 반짝하고 켜졌다. 친구의 공책에 급하게 노트를 휘갈겨 쓰고 일어났다.

'나 잠깐 나갔다 옴!'


도서관에서 나오니 숨 쉬기가 편해졌다. 밤공기는 적당히 포근하고 쌀쌀했다. 중간중간 켜진 가로등이 거리를 한층 더 운치 있게 만들었다. 골목 가로등 아래 담배에 불을 킨 사도가 있었다. 발걸음이 가벼워진 나는 곧장 그쪽으로 달려갔다. 사도는 싱긋 웃었다.


사도는 몇 시에 집에 갈 예정이라든가, 너무 피곤하다든가 하는 얘기를 했다. 나는 주머니 속 젤리 봉지를 만지작거렸다. 어떤 타이밍에 건넬지 고민하며.


“이거 하나 드세요. 아, 그냥 다 드세요”

곰젤리 하나를 주려다 그만 초콜릿, 사탕까지 그의 손에 와르르 부어버렸다. 그는 한 손으로 받으려다 어리둥절하며 두 손으로 받았다. 그의 손가락에 반짝이는 것이 꿰어있었다. 저게 뭘까.


“저 그럼 이만 갈게요”

왜인지 당황해 버린 나는 그대로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난데없이 군것질을 한가득 받은 사도가 벙찐 채로 있었지만, 성큼성큼 도서관으로 돌아갔다. 교생 선생님한테 초콜릿을 건넨 학생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도서관은 여전히 답답했다. 친구는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자리엔 빈 음료수 병이 늘어져 있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지금은 말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사도는 내 문자에 언제나 친절하게 회신한다. 고객센터 상담사처럼. 하지만 답장하지 않으면 대화는 맥없이 끊어진다. 사실 이 문자도 내가 억지로 이어 붙인 것이다.


지하철 와이파이가 그렇지 않은가. 누구나 원한다면 친절하게 연결이 가능하다. 연결되었다가 몇 정거장만 지나면 꺼져버리고 마는. 우리 관계가 딱 그렇다. 애써야 그제서 연결된다.


이제 도서관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빠져나갈 시간이다. 나는 초콜릿을 하나 조각내 입에 넣었다. 사도는 집에 간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이제 더 이상의 문자는 없을 것이다. 내가 또 구실을 만들지 않는 한.


이래서 짝사랑이나 군것질은 하지 말라는 거다. 단박에 기분이 좋아졌다가, 한 순간 추락해 버린다. 결국 나는 하지 말라는 건 다 하고 있는 셈이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말이다.


우리 사이가 지하철 와이파이가 아니라 블루투스 같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버튼을 켜면, 온전히 둘만 연결되어 호환 가능했으면.




‘프랜 씨, 커피 드셨어요?’

교수님과의 면담 전, 사도에게 연락이 왔다. 나는 '아뇨'라고 답장을 했다. 카페에서 반쯤 남긴 커피를 앞에 두고 뻔뻔하게. 오늘 면담은 사도와 함께 가기로 했다.


후문 앞.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있는 사도의 모습이 보였다. 사도는 알까. 그의 친절함이 내 일주일치 군것질이 되어준다는 걸.


교수님과의 면담은 순조로웠다. 우리는 방송 쪽은 쉽지 않다느니, 뭘 하든 간에 잘할 거라 믿는다는 등의 격려를 들었다. 익숙한 내용이라 흥미롭진 않았지만, 시간은 짧게 느껴졌다. 면담이 끝난 뒤, 사도가 말했다.


“교수님, 저희한테 바라는 게 많은 거 같네요”

“저는 영상편집은 잘 못하는데. 골치 아파요”

“아, 영상 편집. 그쵸. 왜요?”


“사도 씨 시간 괜찮을 때, 저 프로그램 좀 봐줄 수 있어요?”

어디서 용기가 나왔는지, 대뜸 그런 부탁이 나왔다. 목 뒤부터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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