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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랜들리 Oct 27. 2024

풍선 조각을 줍는 일은 어렵다

사도 04

먼지가 쌓인 LP판과 책, 유리병의 콜드브루 커피포트. 창 밖의 맑은 날씨와 다르게 어둑한 이 카페는 낮에는 커피, 저녁에는 술을 팔았다. 사장님이 틀어놓은 팝송, 간간이 부는 바람, 운 좋게 앉은 푹신한 소파 자리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내 앞에 앉은 친구만 가준다면.


"얼굴만 보고 간다니깐?"

거의 눕다시피 앉은 친구가 말했다. 정중하게 꺼져달라고 해봤지만, 픽 웃더니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예전에 키우던 페르시안 고양이가 딱 저랬다. 터무니없이 태연하고 당돌하게 자리를 잡는다. 결국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핸드폰 시계만 확인했다.


"아휴, 간다 가"

친구는 달콤한 시간을 보내라며 매장에서 갓 구운 쿠키를 사주곤 사라졌다. 나는 친구가 나가자마자 틴트를 꺼내 입술을 덧바르곤 노트북을 꺼냈다. 곧 사도가 올 시간이다.


무거운 영상 편집 프로그램을 돌리니 노트북이 윙윙 소리를 냈다. 잔뜩 얽힌 영상 클립을 보며 진작 정리할 걸 후회했다. 마치 친구를 집으로 초대해 놓곤, 방정리를 깜빡한 것이나 다름없다. 시퀀스를 이리저리 옮겨 나열하던 중, 문이 열리며 사도와 눈이 마주쳤다.


사도는 웃으며 앞자리에 가방을 툭 놓고 내 옆에 앉았다.

"아 이거구나. 에러 창"


노트북 화면에 집중한 볼의 곡선을 봤다. 그는 모를 거다. 옆에 앉은 그의 행동에 내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 지극히 평범한 행동이 누군가의 하루를 만들기도 한다는 사실을.


“커피, 뭐 드실래요?”




“이럴 때는 이쪽으로 들어가서 다시 부팅해 보시면 돼요”

사도는 조곤조곤 설명을 해주며 막힌 영상을 하나씩 풀어갔다.


조용한 오후였다. 머신이 원두를 가는 소리가 들리면 매장은 커피 향으로 가득해졌다. 혼자 노트북을 두들기는 학생, 친구와 수다를 떠는 테이블, 그리고 우리 둘.


내가 언젠가 이 순간을 그리워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는 사도에게 웃으며 말할 수 있을까. 이 순간의 나는 카페 사람들이 우릴 커플로 오해하길 바랬다고.


“이제 잘 돌아가네요”

그가 환히 웃으며 말했다. 창밖은 어느새 어두워져 있었다. 사도는 가봐야 한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테이블 위에는 빈 유리잔, 건드리지 않은 쿠키, 그리고 깔끔하게 정리된 영상들만이 남았다.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너 그거 착각이야’

식어버린 쿠키가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학교 건물 앞, 전공 수업을 마치고 나오니 학생들이 왁자지껄했다. 담배를 피우든 피우지 않든, 수업이 끝나면 어쩐지 모두 이 광장에 모였다. 그중에 반가운 얼굴도 있었다. 사도, 그리고 여자. 학생들 사이로 지나가는 둘을 보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마다 어울리는 모습이 있다. 누군가와 같이 있는 게 어울리는 사람, 혼자 있는 것이 어울리는 사람. 내 눈에 사도는 혼자 있는 모습이 익숙했다.


“왁!”

친구는 뒤에서 나타났다.

“뭐 봐? 왜 멍 때리고 있어”

친구가 두리번거리자, 왠지 다급하게 얘기했다.


“아 아니야. 그냥 아는 사람 봐서”

“왜 넉이 나가있어”

"가자 가자"

점심은 치즈밥이었다. 후문에 있는 치즈밥집은 친구가 좋아하는 곳이었다.


“아까 사도가 여자랑 있는 거 봤다”

“에이 설마 여자친구겠어? 아닐 거야. 그럼 왜 잘해줘?”

숟가락을 들 때마다 밥알에 치즈가 엉겨 붙었다. 밥을 돌솥에 누를 때마다 치익치익하고 익는 소리가 났다.


“그 반지, 그 여자 거 아니야?”

“패션 반지일 수도 있지”

패션 반지를 끼는 남자가 많던가. 내 주변엔 없는데 말이다. 치즈가 얇은 실처럼 늘어졌다. 이게 왜 맛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밥알이 입 안에서 미끄덩거리는 느낌이 싫다.




조별 과제 미팅을 끝내고 나오니 노을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드디어 끝남'

건물 앞에서 친구에게 답장을 보내고, 카카오톡 프로필을 내리다 손이 멈췄다. 사도의 새로운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등대 앞에서 환하게 웃는 여자의 사진이었다.


왜 그래? 사실 알고 있었잖아. 반지도, 여자도. 사진을 다시 볼 자신이 없어 핸드폰을 주머니 깊숙이 넣었다.


이 길은 우리 둘이 종종 함께 걸었던 길이었다. 몇 번은 말없이 걷기만, 또 몇 번은 몇 마디를 나누곤 했다. 집으로 가는 그 침묵 속에서 나는 자주 시간과 우주에 대해 생각했다.


과거는 특정 시점에 멈춘 게 아니라, 계속 그 속에서 반복되고 있을 거라는 어떤 가설을.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땐 터무니없다고 생각했지만, 듣다 보니 꽤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길에서는 그게 사실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매번 무언가를 떠올리게 한다. 길은 너무 짧고 그 시간들은 순식간에 지나갔지만, 그 순간만큼은 변하지 않고 과거 속에 보존되어 영원할 거라고.


터진 풍선 조각을 주워 담더라도 하늘을 둥둥 떠다니던 순간들도 있었으니, 그 시간을 기리면서 기쁘게 주워 담자고.


- 사도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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