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 01
화장대에 앉았을 땐 진공상태에 있는 기분이었다.
기이한 기분은 그렇게밖에 설명되지 않았다. 뭐랄까, 진공팩에 담긴 육포처럼. 탁상등만 달랑 킨 어두운 방. 갓 청소한 바닥과 화장대는 반질거렸고, 정적이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꾸물거리기를 10분째. 곧 나가야 했지만 거울 속 얼굴은 여전히 밋밋했다. 간간히 멀리서 들리는 차 클랙션 소리에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겨우 손등에 파운데이션을 짜낸 후에야 화장을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문자를 보낼까. 얼굴에 파운데이션을 찍어 바르는 순간에도 생각했다. 물론 그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적막은 깨기 싫을 정도로 청결했다. 곧 전혀 다른 공간에 있게 되리라는 사실을 어쩐지 믿기 어려웠다. 왁자지껄한 웃음, 어색한 인사, 테이블 위 술잔과 맥주잔. 예측가능한 일임에도 도통 실감할 수 없었다.
오늘은 리오의 생일이었다. 리오는 학원에서 알게 되었는데, 어느새 그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게 되었다. 고작 술을 마시는 거면서 천진하게 '생일파티'라고 단어를 붙인 게 귀엽다고 생각했다. 향수를 꺼내 코트에 뿌렸다. 어쨌거나 약속은 약속이니까.
“언니, 왔어요?”
시내의 호프집이었다. 죽 이어 붙인 테이블 사이로 은정이 손을 뻗었다. 그 외에도 학원에서 본 얼굴이 몇몇 있었지만, 대부분 리오의 친구들인 듯했다. 이미 맥주 한 잔을 비워낸 은정의 얼굴은 발그스름했다.
"뭐 마실래? 아 오빠도 더 마실래요?”
그녀는 내게 주류를 묻곤 자기 몫까지 맥주를 두 잔 더 시켰다. 테이블 앞 상대는 낯선 사람이었는데 이미 오빠라고 부르기로 한 모양이었다. 은정은 살그마니 말을 놓으면서 친해지는 타입이었다. 그 의도가 무해해서 누구든 눈감아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단박에 술자리 분위기에 녹아든 듯했다.
"우리 짠해요. 짠.”
그 상큼한 능청스러움에 내심 감탄하며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취업 준비를 하던 여름, 학원을 다녔다. 사실 취업보다는, 그냥 무언가 하고 싶었다. 흰 모니터에 도형을 그리고, 색을 채우는 작업. 깔끔하고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손목이 아파올 때까지 스케치북을 크레파스로 문지를 때도 있었는데, 고작 클릭 한 번으로 도화지를 가득 채워버리는 것이.
옆 테이블에서는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리오 양옆에 앉은 친구 둘이 안주로 나온 치킨 시저 샐러드의 토마토와 새싹채소를 맥주잔에 집어넣곤 고심하고 있었다.
"이거 넣어?"
"아, 그건 심하잖아"
리오가 몇 번 중얼거리기도 했지만, 친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잔을 만들어냈다. 잔 위에는 치킨 조각이 위스키의 레몬처럼 올라갔는데, 꽤 그럴듯한 잔이 되었다. 미친 거 아니야? 리오가 그런 말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웃음소리가 터졌고, 나도 덩달아 입을 가리고 웃었다.
2차를 가자는 말이 오가며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 틈에서 어색하게 선 나는 양볼을 손등으로 짚어봤다. 뺨은 뜨끈했다.
은정은 금세 친해진 누군가와 한바탕 깔깔대며 얘기하고 있었다. 고작 1시간 같이 있었다는 이유로 알 수 없는 사람들 무리에 섞인 이 상황은 어딘가 비현실적이었다. 친구 하나가 리오를 질질 끌고 나왔고, 우린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리오 친구예요?”
누군가 내 보폭에 맞춰 걸으며 말을 걸었다.
“네, 학원에서 만났어요”
흘긋 보니 리오의 술을 따라주던 친구 중 하나였다. 큰 키에 눈매가 날렵한, 인기가 많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와 대화하며 걷게 되었다.
그는 자신을 이수라고 소개했다. 리오와는 중고등학교 동창이라고. 그는 매년 생일 파티를 거하게 여는데, 이번에는 모르는 사람이 많아 놀랬다고도. 아아 네. 나는 무성의하게 대답하고 땅바닥을 보며 걸어갔다.
“네? 안 들려요”
그가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가까워졌다. 순간 말이 꼬였다.
2차 술집에서도 우리는 테이블을 죽 이어 붙여 앉았다. 이수가 맞은편에 앉았고, 은정이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대화는 무난하게 이어졌다. 이따금씩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면 이수와 눈이 마주쳤다. 별안간 민망해진 나는 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아직 보고 있을까. 눈을 돌렸을까. 옆시야를 따라 볼이 간지러웠다.
은정은 술기운이 올라오는지 조금 과감해졌다. 옆에 앉은 이수의 어깨를 손으로 은근하게 잡기도, 얼굴을 기대기도 했다. 노골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불청객이 된 기분에 속이 거북해진 같기도 했다.
"언니, 더 안 마셔?”
다들 빠르게 잔을 비운 중에, 내 잔은 반이나 넘게 차 있었다. 얼굴은 아직도 뜨끈했다.
“천천히 마시려고. 저 바람 쐬고 올게요”
같이 나가자며 이수가 따라나섰다.
술집 밖 공기가 차가워서 숨통이 트였다.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가게 전광판들이 다닥다닥 붙은 이 거리는 모든 것이 과하다. 조명, 사람, 담배꽁초까지도. 옆에 선 이수에게 흘긋 눈길을 주다 이내 바닥의 담배꽁초로 눈을 내렸다. 뭐라도 말을 꺼내야 할 것 같았다.
“담배, 안 펴요?”
“전 담배 끊었어요”
“근데 왜 나왔어요?”
“그냥 얘기하려고요”
“무슨 얘기요?”
“네? 뭐든요”
뭘 그런 걸 물어보냐는 투로 그가 얘기했다. 무례했나 싶어 그의 눈치를 살피기 위해 고개를 올려봤다. 아까와 똑같은 눈이었다. 차가워 보인다고 생각한 눈은 온갖 다정함을 담고 있었다. 그 눈을 피하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무슨 얘기라도 꺼내야 했던 나는 이내 관심도 없는 걸 물어봤다.
“은정이, 귀엽죠?”
“네, 귀엽죠. 애기던데요”
“그쪽한테 관심 많아 보이던데”
“전 관심 없어요”
더 이상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는 약간 짜증이 난 것 같았다. 잠깐의 침묵 후에 그가 말했다.
“번호 좀 알려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