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 02
학원에 가지 않는 날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야겠다는 다짐만 한 시간째. 눈을 겨우 떠 핸드폰을 확인하니 점심이 훌쩍 지나 있었다. 이것저것 눌러보다 결국 핸드폰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도 카페예요?'라는 문자를 받았다. 가볍다. 라기보단 어쩐지 산뜻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학원을 갔는지 혹은 공부 중이냐는 지난 말들이 카카오창을 밝게 장식하고 있었다. 몇 번은 답장을 보내기도 했지만, 그걸 대화라 부르긴 민망했다. 내 답은 단조로웠고, 별다른 질문도 없었다.
어쨌거나 형식적인 어투를 유지하는 게 안전할 거라 여겼다. 안전? 어떤 안전을 바라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무튼간에 복합적인 이유라고 생각했다.
씻고 나오니 정신이 맑아졌다. 한낮의 방은 불을 켜지 않아 어두운 채로 고요하게 잠겨 있었다. 화장대에 앉아 로션을 찍어 바르며 그를 떠올렸다.
고작 한 번 본 사이.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낯선 사람의 친절은 아무래도 미심쩍다. 내 장기를 팔아먹을 수도 있지 않은가. 물론 그렇진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장기 팔이까진 아니더라도, 호색한이나 바람둥이. 아니면 친절한 게이? 멋대로 흘러가는 잡념에 그 사람을 그런 식으로 해석한 게 미안했다. 사실 문자만 놓고 본다면, 그래도 간지러운 관심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에게 엄지를 든 이모티콘을 보냈다.
에어컨 바람이 도는 카페 안에서 학원 과제를 했다.
아파트 단지 끝에 위치한 카페 주변으로는 별다른 상가가 없다. 있는 거라곤 기차가 다니는 철길, 그 앞으로 뻗은 긴 풀들. 동 떨어져 있는 느낌.
주말이나 주중 할 것 없이 한가한 이곳은 그래서 좋다. 특히 이 높고 큰 창. 커다란 통유리창 바깥으로 하늘이 파랗게 다 보인다. 예전에 호텔 로비에서 본 창문이 이랬던 것 같다. 그러던 중 문자가 왔다.
‘내일 놀러 가도 돼요?’
공부해야 한다는 걸 알 텐데, 물어보는 게 황당했다.
'저 공부할 건데요'
'저도 할 거 있어요'
뭘 하겠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이 상황은 난감하면서 묘하게 유쾌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카페에서 자꾸 유리창 밖을 봤다. 곧 그가 온다는 생각에 겁이 났다. 공포스럽다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혼날 사람처럼 구는 나를 좀처럼 이해할 수 없다.
크고 복작거리는 카페. 항상 가던 그 카페는 아니었지만 전체적으로 고급스러운 분위기였다. 아일랜드 테이블 위에 쌓인 베이커리, 은색 프레임의 의자, 브런치를 즐기러 온 중년 아주머니들, 노트북을 두드리는 20대 몇 명.
그를 내 공간으로 초대하는 건 왠지 버거운 느낌이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안전의 문제일까. 역시 괜히 만나자고 했다는 생각을 되뇌며 화장실을 갔다.
거울을 보니 눈 밑으로 아이라인이 번져 있어 티슈를 뽑았다. 딱히 관심이 있는 것도, 뭘 어쩔 계획도 없지만. 그럼에도 단장하는 건, 마치 그거 같지 않은가. 품질 등급 결과를 기다리는 고깃덩어리. 컨베이어 벨트에서 돌아가는 맨살의 고기를 떠올렸다.
괴이하다 싶었지만 다른 마땅한 비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눈을 벅벅 티슈로 문질러 눈 밑이 빨개졌다.
겨우 잡생각을 떨치곤 포트폴리오에 집중을 했다. 한 장 반쯤 완성했을 때, 테이블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톡. 손가락이 테이블을 살짝 두드려서 고개를 드니 그가 있었다. 빙긋 웃은 이수는 내 앞에 털썩 앉았다.
"잘 지냈어요?"
그를 만났다는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겨우 두 번 본 사람과 카페에 마주 앉아 있었다. 무슨 얘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았는데, 어쩐지 전에 만났던 때보다 더 어렵게 느껴졌다. 음료를 시킨 그는 곧바로 귀에 이어폰을 꽂고 핸드폰을 했다. 막막했던 나도 그게 차라리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각자의 시간에 집중했다.
금세 분위기에 적응하고 나니, 포트폴리오 작업은 순조로웠다. 잡아둔 구성이 꽤 마음에 들어, 희미한 뿌듯함을 느낀 나는 앞에 있는 사람을 흘긋 봤다. 그는 영상이라도 보는지 핸드폰을 가로로 들고 집중하고 있었다.
여기 계속 이렇게 있을 생각인 건가.
그게 내내 신경 쓰였다. 어쨌거나 날은 저물어가고 있었고, 그와는 앉아있기만 했다. 누가 보면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처럼. 여기까지 온 그를 이대로 보내기엔 마음에 걸렸고, 그렇다고 이제 와서 대화를 하자니 그건 그것대로 이상했다.
"저녁, 드실래요?"
결국 그렇게 물어봤다. 우린 카페에서 꽤 오래 앉아 있었고, 저녁 시간대였으니까. 적어도 그게 예의라고 여기며.
같은 빌딩의 치킨집. 양파와 크림이 잔뜩 올라가는 치킨을 시켰다. 메뉴 선택이 맘에 드는 건 아니었지만, 대표 메뉴라며 추천하는 종업원의 말에 얼떨결에 시켜버렸다.
어색한 분위기라도 깨고 싶어 맥주를 시키니, 그도 머뭇거리다 따라 한 잔을 시켰다. 애매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앞에 놓인 뻥튀기를 집어 먹었다. 먼저 말을 꺼낸 건 그였다.
"사실, 여기 못 올 거라 생각했어요"
그 말에 뜨끔했다. 물론 충동적인 만남이었다. 내 입장에서야 그랬지만, 그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는 건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어떻게?라고 떠올려보면 그간의 뜨뜻미지근한 반응 때문이지 않을까 싶어 미안함이 스쳤다.
"그래서 지금, 좀 신기해요"
그는 그렇게 덧붙이고 갓 나온 맥주를 들이켰다.
형식적인 대화는 재미없었지만, 지루하진 않았다. 누나랑 아빠랑 산다는 이야기, 그때 본 고등학교 동창들은 이 근처에 다 살다 보니 자주 본다는 이야기.
사실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엄마 얘기를 하지 않는 이유. 혹은 왜 여기까지 온 건지. 그 대신 아 그래요? 라든가, 어쩐지.라는 말을 하며, 술잔을 비웠다.
저녁을 먹고 나오니 날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날씨는 나무랄 데 없이 시원했고, 나무향이 간간히 났다. 귀뚜라미 소리, 도로등의 일정한 조도. 그런 것들이 괜히 마음을 들뜨게 했다. 우리는 도보를 따라 죽 걸었다.
카페, 치킨집, 편의점. 익숙한 풍경을 눈에 담다가 문득 옆을 돌아보면 그가 있었다. 새삼스러운 기분이 드는 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런 사람과, 이런 곳이라니. 마치 누군가 그를 여기 오려 붙인 느낌이었다.
별안간 그가 이 동네에 와본 적이 있는지 궁금해졌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별뜻 없는 질문이긴 하지만, 그 말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기도 했고, 괜히 그런 말을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니 버스 정류장이 보였다.
"버스 타고 가세요?"
"네, 근데 데려다 줄게요"
그는 캔커피라도 주듯이 가볍게 말을 건넸다. 곤혹스러웠다. 날 것 그대로의 관심은 소화하기 어려웠다.
"괜찮아요"
“걷는 거 좋아해서 저도 괜찮아요”
괜찮다는 말에, 또 괜찮다고 말하는 건 반칙이다. 더 이상 거절을 할 수 없게 만든다. 언젠가 나도 써먹어야겠다고 다짐하며, 그와 집을 향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