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비 올 때, 투명한 미생물 같은

이수 03

by 프랜들리

캄캄해진 저녁, 카페 밖으로는 계속 비가 내렸다.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마다 조명이 닿아 길게 반짝였다. 창 밖에 보이는 것들이 모두 축축하다. 자동차, 나무, 가로등. 이 모든 게 처량해 보였다. 도로에 세워진 차도 비극적으로 느껴질 만큼.


"비, 계속 올 거 같네요"

창밖을 본 이수가 말했다.

"어쩌죠"


카페 문이 열릴 때마다, 손님들은 젖은 머리를 털거나 우산을 접어 내렸다. 그때마다 후덥지근한 비 냄새가 따라 들어왔다.


"기다려야겠네요"


우리 둘 다 우산은 없었다. 비를 맞아도 상관없지만, 여차하면 가다가 하나 사도 된다. 이수는 비를 맞기 싫어하는 듯했지만.


이수는 요즘 매일 3시쯤 내가 있는 카페로 왔다. 영상을 보거나 게임을 하기도 했다.


일종의 스터디 모임. 같은 거라 생각했지만 그러기엔 공부하는 건 나뿐이라, 이 만남을 정의하기 어려웠다. 그런지는 일주일이었다.


이수는 이어폰을 꽂은 채 양손으로 폰(아마 게임)을 두드리고 있었다. 덩치 큰 여덟 살 아이와 있는 기분이었다.


아직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 낯선 사람이, 내가 아는 사람이라는 게. 며칠을 함께 있었는데도 생경한 기분이 가시지 않는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그의 어깨 부근으로 눈을 내렸다. 그는 여전히 내 눈에 익숙하지 않다.




"많이 바빠요?"


이수가 말을 걸었을 땐, 노트북에 뭔가를 써 내려가다 흐름이 끊기고 말았다. 그의 손에는 장우산이 들려 있었고, 쥐색 후드티 어깨가 젖어 있었다. 건너편 편의점에 다녀온 모양이었다.


미안한 마음에 뭔가 말해야 할 것 같았지만, 고맙다고 하기에도 난감했던 나는 '아, 우산을' 하고 대답해버리고 말았다.


사온 우산이 무색하게도 비는 금세 그쳤다. 쾌적한 카페를 나오니 끈끈한 공기가 살갗에 달라붙는 기분이었다. 거리는 젖은 풀잎 냄새로 가득했다.


어떤 소설에선 이 냄새를 젖은 종이 향이라 했는데, 그러기엔 너무 사랑스럽다. 흙 속 미생물이 만들어 내는 냄새라고 한다. 미생물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투명한 작은 벌레쯤일 거라 생각했다.


우리 관계가 그런 비슷한 거라 생각했다. 작고 투명하고 향이 나는 미생물 같은 거. 어쩌면 거슬리는 벌레.


"내일은 제가 일이 있어서 못 와요."

이수가 말했다. 한 손에는 택도 떼지 않은 우산을 들고.


"아 그렇구나"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부당? 왜 그런 마음이 드는 건지는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었다.


뭔가 설명을 덧붙여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수를 흘끗 봤지만 날이 어두워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암묵적으로 비 웅덩이를 피해 걷는데 집중했다.


교차하는 운동화 끝을 보며 이상한 허탈감이 드는 건 왜인지 생각했다.


고작 일주일이었다. 그 사이 이렇다 할 일도 없었는데, 어쩌다 말 한마디에 영향을 끼치고, 또 받게 되었는지. 그게 거슬렸다.


사실은. 그가 오지 않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다. 나는 또 그런대로 하던 것들을 하면 된다. 허탈함은 곧 어떤 확신으로 자리 잡았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땐 집 앞이었다.


"다음 주에 또 와도 되죠?"


그 말을 들었을 땐 왜인지 안심했지만. 이내 다시 불안해졌다. 변한 것이 없음에 안심하고, 또 우습게 변한 게 없어서 불안해졌다. 네 혹은 아니요. 대답하면 될 일인데 그 쉬운 말을 하지 못한 채 또다시 공백이었다.


"제가 왜 매일 여기 오는지 알아요?"

무서울 만큼 직접적인 질문에 당황했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까지 피해온 질문.




어떤 감정이 올라와 목이 막혔지만 시간을 들여 적절한 말을 골라가며 말했다. 당신이 좋은 것도 같은데, 사실 그런 것보단 만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취업을 준비하고 있고, 지금은 중요한 시기라서. 또 근데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착한 사람이 아니라서, 지금의 관계를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다고.


두서없이 말하다 보니, 결국 남김없이 말하고 있었다. 어느새 우린 집 앞 공터의 벤치에 앉아있었다. 가만히 듣던 그가 말했다.


"제가 맞출게요, 아닌 것 같으면 차버리면 되죠."

뜻밖의 경쾌함에 실소가 나왔다.


아침의 학원.

강사를 기다리는 강의실은 뭔가 잠겨있다. 한쪽에선 누군가 하품을 하고, 다른 한쪽에선 엎드려 있다. 대체로 뭔가를 창의적으로 만들어내는 수업이라기엔 늘 잿빛 분위기다.


나는 정사각형을 만들어 흰 화면에 의미 없이 복사해 붙였다. 수업이 끝나면 그를 만나기로 했다. 그 사실만으로 강의실이 더 이상 칙칙해 보이지 않았다.

keyword
이전 19화날 것의 관심 소화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