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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랜들리 Jul 09. 2024

오만과 편견

오일 01

해외연수는 그간의 어지러운 관계를 정리하기에 적절한 핑계였다.


여름 즈음, 학교 동기 선배들과 이곳으로 연수를 왔다. 언제나 화창한 곳이었다. 서울처럼 변덕스러운 날씨에 내 마음까지 우중충해질 일은 없었다. 가끔 끓는 더위에 땀이 티셔츠 뒤로 붙긴 해도, 그건 그것대로 좋았다.


날씨 덕분인지, 이곳은 언제나 느긋했다. 시간도, 사람들도. 나 또한 덩달아 느슨해지곤 했는데, 물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현지화되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유독 그런 분위기를 잘 타는 유학생들도 있었는데, 그런 동기들을 '누가 봐도 현지인'이라며 놀리곤 했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이곳의 생활처럼 느슨했다. 적당히 가깝고 멀었다. 평온한 시간이 점차 달라지기 시작한 건, 생각지도 않은 사람에게 문자를 받으면서였다.


‘안녕 프랜. 나 오일인데, 여기 어학연수 왔다며?’

‘갑자기 이런 말 해서 미안한데, 나 번역 좀 도와줄 수 있어?’

누군가 했더니, 다짜고짜 부탁하는 태도가 그답다고 생각했다.


‘혼자서는 어려워서. 맛있는 거 살게.’

갑작스러운 부탁에 미안했는지 그는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그래요, 그럼’

나는 짧게 답장을 했다. 딱히 거절할 핑곗거리도 없었다.


그는 과 선배였다. 어찌 됐든 그의 친구인 다른 선배 덕분에 이곳에 빠르게 집을 구할 수 있었다. 고마워서라도 도와주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신입생 시절, 처음 만난 그의 인상은 좋지 않았다. 과방에서 동기들과 떠들고 있을 때 문을 쾅쾅 두드리며 그와 그의 친구들이 들이닥쳤다. 같이 술을 마시자며 후배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모습은 꽤 강압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결국 ‘재수 없어. 나 집 갈래’라고 제로언니 귀에 속삭이곤 조용히 그 방을 빠져나왔다.


그 이후로도 종종 마주쳤지만, 볼수록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벼운 말투, 장난스러운 허세. 그의 쭉 찢긴 날카로운 눈매도 한몫했다. 그래서 그의 문자를 보고 내심 놀랐다. 접점도 없었거니와, 내가 그에게 살갑게 굴었던 적도 없었으니.




한적한 카페 겸 식당. 푹신한 소파자리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창 밖으로는 야자수가 몇 그루 드려워져 있었는데, 그 사이로 지글지글 끓어오르고 있는 콘크리트 바닥이 보였다.


다행히도 카페 내부는 에어컨 바람이 돌아가고 있어 그런대로 시원했다. 괜히 후드 집업을 걸치고 왔다고 생각하며 아이스티를 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

그는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후드 앞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로 설렁설렁 걸어 들어왔다. 그의 쭉 찢긴 눈은 여전하다고 생각하며 예의상 목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선배”

오빠라는 호칭이 껄끄러웠던 나는 대충 그를 그렇게 불렀다. 그렇다고 깍듯하게 -님을 붙이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뭐 사주시게요?”

그가 웃으며 먹고 싶은 걸 말하라고 하길래, 조각 케이크를 냉큼 시켰다.


필요로 한 번역은 A4 두 장 분량이었다. 몇 분간 옆에서 알려주며 하다 보니, 그가 생각보다 더 전공어를 잘 모른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건 신입생 때 배우는 건데. 신입생 때 뭐 하셨어요?”

“졸업 시험은 어떻게 치시려고 그러세요?”


그가 싫었던 것도 있지만, 반응이 궁금해서 그렇게 말이 나갔다. 생각 외로 그는 그저 실실 대며 '그냥 어려워서'라고 할 뿐, 전혀 타격을 받지 않았다.


덤덤한 반응에 흥미를 잃은 나는 번역을 해서 줘버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묵묵히 그가 내준 숙제를 노트북에 타이핑했다.




번역을 마무리할 때쯤, 창 밖을 보니 그새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마지막 점검만 남겨둔 채로 목을 양옆으로 당겨 뻐근함을 풀었다. 앞에 있는 그를 보니 아까부터 노트에 뭔가를 열심히 끄적이고 있었다.


큰 몸을 웅크리고 뭔가에 집중하는 그의 모습은 조금 기묘했다.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상관할 바는 아니었기에, 굳이 묻진 않았다. 마지막으로 틀린 부분은 없는지 확인하고 그에게 노트북을 건넸다.


“자, 이제 됐죠?”

“와, 고마워. 나 혼자서는 못할 뻔했어 진짜.”


그는 '선물'이라며 손바닥만 한 종이를 내게 건넸다. 알 수 없는 곡선들이 이리저리 꺾여 있는 추상화였다. 나름 디테일에 신경을 쓴 듯 그림은 파란 볼펜으로 꼼꼼하게 색칠되어 있었는데, 그림 아래에는 작게 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어쩌라는 거지’라는 내 표정을 읽은 그가 설명했다.


“너가 내 일 해주는데, 앞에서 앉아서 놀기 미안하잖아. 그래서 그림. 엄청 열심히 그렸음.”

“아.. 네 멋지네요”

선물이라는데 주머니에 쑤셔 넣을 순 없어서, 지갑에 넣어두었다. 그래봤자 종이 쪼가리였지만.


“이걸로 퉁칠 생각은 아니시죠?”




도착한 곳은 물담배와 간단한 요리를 파는 근처 카페 겸 식당이었다. 아담한 테라스에는 라탄 의자와 테이블이 3-4개 정도 배치되어 있었고, 주위는 낮은 나무 울타리로 둘러져 있었다.


“친구 한 명 불러도 되죠?”


둘이 저녁을 먹는다는 것이 낯간지러워서 그에게 대뜸 물어봤다. 말을 꺼내놓고 보니 염치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막상 그는 별 생각이 없었는지 '응, 불러'하고 무심하게 대답했다.


친구가 오자마자 우리는 파스타와 클럽 샌드위치를 시켜 먹었다. 날씨가 좋아 야외에 앉은 건 탁월한 선택이었는데, 기분도 낼 겸 물담배도 시켰다. 새파란 초저녁, 날씨는 선선했고 달짝지근한 물담배 향이 났다.


“프랜이 조금 차갑지”

“얘가요? 상상이 안 가네”


오일과 친구는 화제를 바꿔가며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갔다. 나도 종종 대화에 참여했지만, 말이 쉽사리 떨어지진 않았다. 그건 왠지 모를 죄책감 때문이었다.


우리는 작은 캠퍼스에서 종종 마주쳤지만 나는 선택적으로 그에게 인사했다. 주변에 다른 선배들이 있을 땐 활짝 웃으며 제깍 인사를 했지만, 오일과 단둘이 마주칠 때면 의도적으로 외면했다. 그는 그런 내 만행을 담담하게 받아들인 것 같았다.


카페가 문을 닫을 시간이 돼서야 빠져나온 우리는 자리를 정리하고 인사하며 헤어졌다.


“저 사람, 괜찮네. 좋은 사람인 거 같아”

큰길로 걸어가며 친구가 그렇게 감상평을 남겼다.




으레 유학생들이 그러듯, 저녁 때면 여럿이 모여 밥을 먹기도, 내키는 날엔 술도 마셨다. 오일과는 앞 건물에 집을 구해준 선배 덕에 자주 얼굴을 마주쳤다. 종종 시답지 않은 문자를 주고받기도, 필요한 일이 있으면 서로 불러내기도 했다.


“아, 근데 나는 걔 귀여운지 모르겠어”

“왜, 하는 짓이 웃기잖아”

그날은 여행에서 돌아온 몇몇 동기들과 오일의 집에서 저녁 겸 술을 먹은 날이었다.


바닥에 늘어진 맥주잔. 아슬아슬하게 넘어지려고 하는 캔 하나. 입술자국이 찍힌 유리잔. 그 아래로 말라붙은 와인. 이미 비워진 안주 접시. 그런 것들을 의미 없이 보고 있었다. 누군가가 안줏거리가 되고 있는 지금 이 자리는 재미가 없다.


“안주라도 찾아볼게요”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버겁게 느껴져 빈 캔이 가득 담겨 짤그락 거리는 비닐봉지를 들고 방을 나왔다.


부엌에는 오일이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왜 혼자 치워요. 같이 치워요.”

구석에서 빈 맥주캔을 정리하면서 그에게 말을 걸었다.


“금방 끝나. 왜?”

“설거지할 거 아직도 많네요, 제가 헹굴게요”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려는 사람일 줄 알았는데, 의외라고 생각했다. 수전을 내쪽으로 끌어와 세제를 묻힌 접시를 헹궈냈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니에요?”

“안주 만들려고 했는데, 설거지할게 많더라고”


“부럽다. 나는 요리 진짜 못하는데”

“그래도 계란프라이 정도는 만들지?”

“그게 얼마나 어려운데요”

“라면은?”

“컵라면 좋아해요”


그 말에 호탕하게 웃는 오일이었다. 설거지를 마친 오일은 설거지한 팬을 집더니 능숙하게 각종 야채를 볶기 시작했다. 그래도 라면은 끌일줄 알아야 한다느니, 야채 볶음밥은 만들기 쉽다느니 하는 잔소리를 들으며 그 옆에서 쪼그려 앉아 맥주캔을 하나 땄고, 시답잖은 수다를 떨었다.


거실에서 간간이 와악- 하거나 유리잔을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내가 반 캔 정도 마셨을 무렵에는 야채볶음밥이 뚝딱 만들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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