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 01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든 생각은 한국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한국이니 당연한 일이지만. 고등학교 때까지 외국에서 살던 내게 이렇게 많은 한국 사람(그것도 전부 모르는)은 조금 생소했다.
삼촌의 차에서 본 창 밖은 온통 초록색이었다.
"삼촌, 여기는 산이 많네요."
"응, 그렇지. 한국은 산이 많은 나라지.
삼촌은 담백하게 대꾸해 주곤 다시 조용해졌다. 난생처음 보는 삼촌은 엄마를 닮지 않았고, 말이 없었다. 나라도 10년 이상 못 본 동생의 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히 할 말이 없어서 그의 침묵에 수긍하고 창밖 풍경에 집중했다.
엄마, 아빠의 나라이자 제이가 있는 나라. 우리는 지구 반대편에서 몇 년간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같은 시간 속, 같은 땅을 밟고 있다.
왠지 벅차오르는 기분이 들어 제이에게 연락해볼까 싶었지만, 메일을 주고받은 지도 오래된 데다 대학 입학이 얼마 남지 않아 이내 생각을 접었다.
대학 기숙사에 짐을 옮기고 나서는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MT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술도 마셔봤다. 난생처음 마신 소주는 아세톤 냄새가 났고, 생각보다 역한 맛이었다.
"외국 어디서 왔어?"
나는 아무래도 외국에서 온 티가 났던 건지, 처음 보는 친구들은 그렇게 묻곤 내 대답에 놀랐다.
술자리며 벚꽃놀이며 하는 것에 모든 신입생이 들뜬 학기였다. 덜컥 캠퍼스 커플이 되는 동기들도 있었는데, 자주 붙어 다니던 제로 언니가 그랬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제로 언니는 앞에 놓인 자몽에이드를 쪽 빨곤 그렇게 말했다. 박오빠와 만나게 되었다고. 다른 애들한테는 아직 얘기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너한테는 먼저 얘기해야 할 것 같았다고.
그 당시 동기들끼리는 심심하면 서로를 불러내곤 했다. 그중에서도 나와 제로언니 그리고 박오빠는 학교 근처에 살았던 탓에 밤마다 걸핏하면 연락을 하곤 했는데, 이건 꽤 의외의 소식이었다.
그런 징조도 없었을뿐더러, 제로 언니는 무뚝뚝한 편이었기에 특히 그랬다. 돌이켜보니 둘 사이에 묘한 그런 게 있었던 같기도 하고. 둘이 손을 잡고 캠퍼스를 다니는 모습을 상상해 봤다.
"아직 애들한테는 얘기하지 마"
제로언니는 눈을 부릅뜬 채로 그렇게 얘기했다. 하지만 너무 들떠 보여서 오히려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지 걱정이 들 정도였다. 알겠다고 짧게 대답을 하고 둘의 만남을 응원했다.
오후 1시. 지루한 수업에 끝나갈 때쯤 박오빠에게 문자가 왔다.
'너 다음 공강?'
박오빠와는 공강이 겹치는 일이 많아 요즘엔 제로언니 보다 자주 보는 듯했다. 특히 둘이 그렇게 되고 나서부턴 셋이 볼 일이 없어졌다.
'ㅇㅇ'
'제로는 다음 수업 있대. 밥 먹자.'
도착한 함박 스테이크 집은 우리의 단골 집이었다. 가게가 비좁고 사람이 항상 많긴 했지만, 양도 푸짐하고 가까워서 매주 한두 번은 꼭 오고 있다. 순식간에 주문을 마친 박오빠가 얘기했다.
“아, 제로랑 어제 싸웠어”
“왜 또?”
둘이 싸우면 나까지 피곤해지곤 했다. 속상하다며 술을 마시며 토로하는 제로언니, 억울하다는 박오빠.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회복되는 둘.
“그렇게 좋아하면서 왜 그렇게 싸우나 몰라”
“아, 솔직히 나도 인정해. 내가 잘못했는데, 제로는..”
여느 때처럼 박오빠의 이야기를 들으며 앞에 놓인 함박 스테이크를 열심히 썰었다. 이따금씩 ‘그 말은 너무 심했네’라든가, ‘그게 정확히 언제였는데?’라든가 하는 말을 하며.
“나 제로 진짜 좋아해, 근데 제로가 집착하는 건 힘들어”
“집착”
내가 되풀이했다. 제로 언니는 모든 걸 다 얘기하지 않았지만, 박오빠는 많은 걸 얘기해 주었다. 제로의 귀여운 구석이라던가, 며칠 전에 한 대화, 그리고 어떤 버릇들까지도. 박오빠가 말하는 제로 언니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아무튼 이 함박 스테이크집은 좋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을 하며 박오빠의 말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유월 오빠 부르자.”
흥미진진한 눈으로 옆에 앉은 여자 동기가 말했다.
막차를 타야 한다는 동기 몇이 나가고, 남은 일행들끼리 학교 근처 칵테일 바로 자리를 옮긴 참이었다. 여자 동기의 말에 다른 친구가 지겹지도 않냐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형 불러도 안 나온다니까.”
“이번엔 프랜이가 유월 오빠한테 연락해 봐.”
이미 얼굴이 벌개질대로 벌게진 나는 진토닉을 홀짝거리며 핸드폰을 꺼냈다. 유월.
그는 분위기를 잘 띄우는 과 동기 오빠였다. 술자리가 무르익어갈 때쯤이면 누군가가 유월에게 연락을 하는 건 일종의 버릇이었다. 정작 우리 모임에 나온 적은 없었지만 그래서인지 동기들은 괜한 오기에 그를 더 불러내려고 했다.
이젠 내심 그가 궁금했다. 한 번쯤은 나올 법도 한데 말이다. 어두침침한 조명 탓에 핸드폰의 화면의 불빛이 과하게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오빠, 저희 학교 앞인데 어디세요?’
'왜 불러? 나 못 가. 너네끼리 놀아.'
문자는 거의 매번 그런 식으로 끝났지만, 다음 날까지 대화가 이어질 때도 있었다.
'어제는 왜 또 부른 거야?'
'오빠가 잘 안 나오니까 더 그러잖아요.'
'친구들이랑 있는데 그럼 어떡해.'
종종 어느 교수의 과제가 있다느니, 이번 주가 길다느니 하는 시답지 않은 대화가 오가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가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느라 우리의 술자리에 안 오는 것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하지만 좀처럼 만나게 되는 일은 없었다.
'너 저녁 먹었어?'
'아뇨, 아직.'
'그럼 저녁 먹자'
어쩌다 보니 단둘이 저녁을 먹게 된 날. 학교 정문 앞 계단에서 그를 기다렸다. 이미 저녁 시간의 하늘은 어둑해지고 있었고, 꽤 습한 날씨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후드를 뒤집어쓴 채로 횡단보도를 건너오는 유월이 보였다. 좀처럼 얼굴 보기 힘든 사람. 생경한 기분으로 그가 어슬렁거리며 걸어오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뭐 먹을래?"
샤워라도 했는지 물기가 남은 머리를 탈탈 털며 그가 물어봤다. 생각해 보니 그와는 MT 이후로 몇 번 길에서 마주친 게 다였다. 글쎄요. 그렇게 대답하곤 머릿속으로 메뉴를 고민했다.
“생각해 봐.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신이 있다고 믿겠어?”
그가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내게 물어봤다. 그는 내가 기독교라고 하니, 나를 교인들의 대변인이라고 생각하는지 짓궂은 질문들을 꺼냈다. 내친김에 술도 시킨 우리는 어쩐지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래도 저는 있다고 믿어요.”
은행과 닭튀김을 꼬치에서 분리하며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내 교회 다니는 친구들은 이런 얘기를 하면 하나같이 다 화내더라고? 나는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데.”
“저는 아직 그렇게 신앙심이 깊지 않아서 그런가 봐요.”
"아 그래?"
그는 테이블 위로 팔꿈치를 올리더니 본격적으로 질문하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는 난감하고, 난해할 수도 있는 이상한 질문들을. 과격한 그의 질문에 나는 생각보다 덤덤하게 대답해주고 있었다.
질문이 재미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도발에 넘어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그렇게 신에 대한 토론은 열기를 띠었다.
나중에는 다른 화제로 이야깃거리가 넘어가기도 했는데, 그 얘기도 하필이면 논란거리가 있는 주제라 우리는 한참을 더 얘기했다.
"너 되게 특이하네"
유월은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먹잇감이라도 발견한 듯한 시선이 꽤 따가웠다. 사람들이 하나 둘 빠져나간 술집은 이제 비었는데, 핸드폰을 보니 이미 시간은 2시를 훌쩍 지나 있었다. 그렇게 유월과 집 앞까지 걸어가며 대화를 계속 이어갔다.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헤어지며 그는 무심하게 그렇게 말했다. 그날 이후 우리는 한 층 친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동기들이 꾸준하게 술자리에 불러낸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유월은 차츰 술자리에 얼굴을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