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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랜들리 Jun 01. 2024

우리가 부끄러운 순간이 오더라도

제이 03

“이제 그만하라니깐 정말”


제이는 귓속말을 하는 척하며 내 귀에 바람을 훅 불어넣었다. 도대체 이게 몇 번째인지. 아무리 오만상을 찡그려도 소용이 없었다.


달그락거리는 식기소리와 알 수 없는 팝송이 간간이 들리는 카페 안, 큭큭대는 제이의 웃음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결국 제이의 어깨를 잡고 밀어냈다. 제이는 순순히 밀려나더니 바지를 탈탈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이제 간다”

“벌써?”


금세 갈 준비를 마친 제이는 양손으로 내 머리통을 감싸 정수리에 입을 맞추곤 그대로 카페를 빠져나갔다.  딸랑- 유리문에 달린 작은 종소리와 함께 제이가 돌아보며 씩 웃었다. 나는 아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성의 없이 손을 흔들었다.


이번 주말에는 제이를 보지 못한다. 고모네랑 바다로 여행을 가기로 했댔나. 제이가 빠진 카페는 이제 사람 소리로 가득하다. 고작 제이가 나갔을 뿐인데 이곳은 허전하고 별 볼 일 없어져버렸다.


이제 뭘 해야 할까. 갑자기 넘쳐나는 시간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맥없이 천장을 올려봤다. 평소 제이가 없을 땐 뭘 했는지 생각해보려 했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제이 외엔 모든 것이 지루해져 버렸다.


그날 밤 쿠키통에 맹세한 이후, 달라진 건 없었다. 우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수다를 떨고 밤새서 영화를 봤다. 변한 거라곤 제이가 내 어깨를 감싸 안는 대신 입을 맞추거나 연락을 더 자주 하는 정도였다. 이런 걸 연애라고 부를 수 있는지도 의문스러웠다.


그런데 이럴 때 연애를 실감하고 말아 버리는 것이다. 하필 제이와 헤어질 때 뚜렷한 형태로. 미련 없이 문을 열고 나가버리는 제이한테 왠지 버림받은 것 같아 초조하다가도, 나를 돌아보는 모습에 이내 안심하고 만다. 이런 처연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건 제이밖에 없다.


물론 싸울 때도 있었다. 그런 날에 제이는 유독 다른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했는데, 나는 일부러 관심 없는 척 휙 고개를 돌렸다.


"야, 너 언제까지 그럴 거냐?"


성질 급한 제이가 먼저 툭 그런 말을 하면 냉전이 끝났다. 그제야 나는 울먹이며 서운했던 일을 터뜨려냈고, 우리는 제이의 고모 집에 있는 ‘쿠키 선생’에게 앞으로는 안 그럴 거라는 약속을 해야만 했다.


“약속해.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고”


제이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얘기했다. 제이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쿠키통 옆에 있는 오래된 갓전등으로 눈을 돌렸다. 망할 쿠키 선생이라고 생각하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미안해하고 겨우 대답을 했다.


문이 딸랑 열리는 소리에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평화롭지만 제이가 없는 따분한 카페로. 오래 앉아있으니 찌뿌둥한 기분이었다. 이대로 그냥 가긴 아쉬운 마음에 커다란 블루베리 머핀을 하나 시켜 먹었다.




주말 내내 제이를 못 본다니.

컴퓨터 화면 속 제이와의 페이스북 메시지를 죽 읽어내리며 생각했다. 점심으로 먹은 튀김 냄새가 거실을 떠다니는 주말 낮. 해가 지려면 아직도 한참 남았다. 저녁에 전화를 주기로 한 제이의 말에 내내 주머니 안의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바다 재밌어?'

제이에게 그렇게 메시지를 보내봤다. 물론 답장은 없을 테지만.


제이와의 채팅방에는 ‘뭐 해’, ‘지금 어디’와 같은 무미건조한 대화 내용으로 가득했다. 한참을 메시지 창을 뒤적이다 꺼버렸다. 페이스북 메인 화면의 게시물을 긁어 내리던 중 눈에 걸리는 포스팅을 보게 되었다.


기독교에서 동성애를 금기한다는 내용의 글.


그건 내 친구 선이의 포스팅이었다. 목사님의 아들이기도 한 그는 이런 기독교 포스팅을 어디선가 종종 퍼오곤 한다. 기분이 찜찜해서 스크롤을 내려버렸다.


매주 교회를 다닌 나는 이 관계가 적절하진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이와 난 암묵적으로 그런 민감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우린 펑퍼짐한 성가대 복에 감춰진 손을 슬며시 잡고, 대범하게 팔짱을 끼고 걸어 다녔다.


디링- 얼마 지나지 않아 선이에게 메시지가 왔다.

'프랜아, 혹시 내가 방금 올린 포스팅 봤어?'


등골에 식은땀이 났다. 생각해 보니 지난번 선이에게 얼핏 여자가 좋다고 얘기했던 것 같기도 했다. 괜히 그런 얘길 해선. 무슨 얘기를 꺼내려고 하는 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메시지를 썼다 지우며 고민하다 결국 답장을 보냈다.

'이걸 왜 나한테 보낸 거야?'

'그냥 말해줘야 할 거 같아서.'

‘왜?’

‘본다면 너 기분 나쁘라고 올린 거 아니야.‘


왠지 수치스러웠다. 울컥 감정이 치밀어 올라 선이에게 화를 내고 말았다. 이미 기분이 나쁘다고. 내 마음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거냐고 따졌다.


'미안해, 정말 그럴 의도 아니었는데..'


선이에게 다시는 이런 메시지를 보내지 말라고 하곤, 침대에 엎어져 조금 울었다. 치부를 들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한 게 제이한테 미안해서. 선이의 미안하다는 메시지가 몇 차례 더 왔지만, 답장을 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나는 제이와 별 탈 없이 만났고, 선이와는 몇 번의 어색한 마주침이 있었다. 몇 번은 선이가 나를 보곤 무슨 말을 하려다 말았는데, 애써 묻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학교를 옮기면서 바빠지기 시작했고, 제이는 돌연 한국을 돌아가게 되었다.


'너무 보고 싶을 거야. 프랜아'


공항에서 나를 와락 안은 제이는 찔끔 눈물을 보였다. 나는 신기하게도 배웅을 하는 순간에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언제나 울던 건 나였는데 아이러니했다.


우리는 친구로 남아 연락을 이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이렇게 결국 흐지부지 끝날 거라는 걸. 친구로 남기로 했지만, 그것조차 쉽지 않을 거라는 걸.


몇 달간은 학교 도서관에서 제이에게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을 모아 메일을 썼다.


한국에서 새로 온 친구가 있는데 네가 말하던 한국 춤을 알지 못했다고. 혹시 이런 춤을 아는지 물어보기까지 했지만, 나만 우스운 꼴을 당했다고. 너한테 다시 한번 속았다는 생각이 들어 그게 어이없으면서도 슬펐다고.


네가 꼭 먹어보라 했던 아이스크림을 먹어봤지만 생각만큼 그렇게 맛있진 않았고, 그냥 네가 생각나서 그리웠다고. 너는 동생들에게 사주겠다던 강아지 다섯 마리를 사줬냐고.


도서관은 조용했다. 타닥타닥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너 진짜 바보 같아. 푸흐흐. 어디선가 제이가 키득거리며 웃는 기분이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모니터 화면이 뿌옇게 보였다. 왜 난데없이 도서관에서 울컥하고 마는 건지. 우는 것조차 한 박자 늦어버리는 게 너무 나답다는 생각을 하며.


지금의 나를 선이가 보면 어떨까. 눈살을 찌푸릴까. 아니면 괜한 걸 봤다고, 미안하다면서 눈을 감아 버릴까.


선이한테 말해주고 싶다.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가 그렇게 단편적이지 않았다고. 거기에는 네가 말하는 잘못됨도 있을 테지만 애틋함도, 우정도, 배려도 있었다고. 그러니까 이 정도는 귀엽게 봐달라고.


그렇게 제이와 메일을 쓰는 주기가 하루에서 이틀, 일주일씩 길어졌고, 제이 생각이 일체 들지 않는 날도, 불현듯 생각나던 때도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헤어진 듯 헤어지지 않은 이상한 헤어짐을 맞이했다.


- 제이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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