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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랜들리 May 25. 2024

비밀스러운 밤, 쿠키통에 맹세

제이 02

주말의 첫날.

아침부터 눈이 번쩍 떠졌다.


제이의 집에서 하룻밤 자기로 한 날이다. 엄마한테는 일주일 전부터 말했다. 몇 번이나 얘기해서 지긋지긋한 듯했지만, 어쨌든 허락은 구한 셈이다.


이불을 차고 침대에서 미끄러지듯이 내려왔다. 갓 샤워라도 한 기분. 침대 맡에는 어젯밤에 챙긴 가방이 얌전히 놓여있었다.


잠옷이랑 세면도구, 제이랑 할 보드 게임, 간식. 그렇게만 넣었는데도 가방이 빵빵해져 버렸다. 심심하면 읽을 책도 챙기려고 했는데, 그건 안 들어갈 것 같아 포기했다.


옅은 기름 냄새가 거실을 채우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엄마가 만들어준 계란 프라이와 시리얼이 놓여있었는데, 빨리 먹어야 빨리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입으로 왕창 밀어 넣었다.


순식간에 비워진 접시를 내미니 엄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고 싶어 안달이 났다는 엄마의 말을 한 귀로 흘리고 몸통만 한 가방을 메었다. 이제 정말 모든 준비가 끝났다.


"자기 전에 전화하고, 일찍 자. 딴짓하지 말고."


집을 나서기 전 엄마가 용돈을 주며 신신당부했다. 후후 늦게 잘거지롱. 엄마가 준 용돈을 반으로 접어 주머니에 넣으며 생각했다.


오늘은 제이의 고모가 여행을 간 날이라, 온 집이 제이와 나만의 것이었다. 며칠 전부터 세운 우리의 계획은 이러했다.


마트에 가서 과자랑 먹을 거 잔뜩 사기. 집에서 아주 무서운 영화 보기. 그리고 수다를 떨면서 밤새기! 다시 생각해도 완벽한 계획이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딩동딩동. 초인종을 누르니 제이가 달칵 문을 열고 반겨줬다. '어서 오세요, 손님-' 내게 고개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하는 제이였다. 이상한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는데, 고모가 이걸 하고 있었다며 나름 손님맞이를 한 거다.


나도 원피스를 살짝 들어 올리며 공주 인사를 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손님맞이 놀이가 끝난 우리는 마트부터 가기로 했다. 제이는 오늘 팡팡 써보자며 고모에게 받은 용돈을 흔들어 보였다.


제이는 나를 끌고 다녔다. 한 손으로 카트를 밀고, 다른 손으로는 내 손을 꽉 쥔 채로. 어린 동양인 여자애 둘이 손을 붙들고 돌아다니니 여기저기 시선이 꽂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 무슨 엄마 아빠 같잖아"

제이가 푸흐흐 웃으며 큰 과자봉지를 카트 안으로 툭 넣으며 얘기했다.


그럴 만도 한 게 옷차림이 그랬다. 나는 면 원피스를 입었는데, 제이는 알 수 없는 프린팅의 쥐색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엄마와 매일 아침 옷전쟁을 하는 나와 달리 제이는 원하는 옷을 아무렇게나 입을 수 있었다.


제이는 삐삐 롱스타킹 같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말괄량이에 뭐든 멋대로 한다. 주변에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데 정작 본인은 모르는 것도. 그리고 나는 삐삐를 따라다니는 조용한 여자 애. 이제 제이한테는 커다란 말과 원숭이만 있으면 된다.




“그 마트 아저씨, 완전 이상해!"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제이는 씩씩댔다. 시선 따위, 이젠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계산해 주던 마트 아저씨가 몇 마디를 붙인 게 무슨 대수라고. 아직도 이상한 아저씨네 뭐네하며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다.


겨우 한 풀 꺾인 제이는 그래도 저녁은 제대로 해 먹어야 한다며, 냉장고에 있는 뭔가(고기로 보이는)를 꺼내 프라이팬에 올렸다. 나는 도와주겠다며 나서다가 괜히 팔 안쪽을 살짝 데고 말았다.


"아이고, 이 정신머리!"


제이는 그런 아줌마 같은 말을 하더니 거실 서랍장에서 요란한 그림이 들어간 밴드 하나를 꺼냈다. 유리라도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내 팔을 들곤 살펴보다가 빨갛게 부어오른 부분에 밴드를 갇다댔다. 집중하는 제이의 정수리와 그 아래 작달막한 코가 보였다.


"제이"

"왜?"

뭔갈 바르고 붙여야 할 것 같아 제이를 불렀지만, 괜히 성질을 건드릴 것 같아 붙여주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나 보드 게임 가져왔는데"


고기를 구워 먹은 우리는 보드 게임을 했다. 제이에게 보드 게임의 규칙을 설명해 주고 공평하게 시작했지만, 이 게임을 잘 아는 내가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첫 판을 이길 수밖에 없었는데, 제이가 '이 판은 무효'라고 우기는 바람에 다시 할 수밖에 없었다.




밤에도 후덥지근한 날씨였다. 창문을 열어둔 방 안은 그런대로 시원해서 에어컨은 틀지 않았다. 창문 바깥으로는 야자수가 뻗어 있었고, 귀뚜라미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노란 램프만 킨 방 안 침대에서 앉아서 팝콘과 쿠키를 까먹었다.


침대에 엎드려 무서운 영화를 봤다. 갑자기 뭔가 툭 튀어나올 때마다 너무 놀래서 눈을 감아버렸는데 제이는 '눈 떠! 이건 봐야 해' 라며 나를 단련시켰다. (이런 걸로 겁을 먹으면 안 된다며 정말 내 눈을 억지로 벌려 보게 했다.)


한 시가 넘어가고 있는 늦은 밤, 몰래 깨어있으니 유쾌한 기분이었다. 이 시간에 침대에서 과자는 상상도 할 수 없다. 제이는 거울을 보는 자기 고모 흉내를 냈다. 음음. 콧소리로 허밍을 하며 화장품을 얼굴에 펴 바르는 제이의 모습에 한바탕 웃었다.


"아 나는 너가 세상에서 제일 재밌어."

제이에게 그렇게 얘기했다.

"나중에 제이 같은 사람이랑 결혼해야지"


“나 같은 사람?”

“응, 멋지고 재미있는 사람”

“나 좋아해?”

“그럼, 엄청”

“얼만큼?“

꼬치꼬치 묻는 제이에게 당황했지만, 고민하다 대답했다.

“아마 예전에 너가 그 오빠를 좋아한 만큼”


나를 보던 제이가 물어봤다.

“그럼 우리 애인 할래?”


그리곤 내 입에 자기 입을 붙였다가 떼어냈다. 볼에 제이의 짧은 머리가 닿아 까끌거렸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했다. 아까 데인 팔안쪽이 따끔거리는 기분이었다.


제이는 난데없이 검은 마카를 들고 오더니, 빈 쿠키통에 눈코입을 그렸다. 그리곤 앞으로 쿠키 선생이 우리를 지켜볼 거니 엄숙한 맹세를 하자고 했다. 비밀스러운 밤, 그렇게 우리는 새로운 관계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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