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 01
‘머리가 왜 저렇게 짧지?’
제이에 대한 첫인상은 그랬다.
똑 단발로 자른 머리를 귀 뒤로 꼽고 있었는데, 그 아래로 날렵한 사각 턱을 가진 이상한 여자 애. 한국에서 또래가 왔다는 말에 엄마를 따라 그 집에 놀러 간 날. 첫 외국 생활에 신이 난 제이가 있었고, 나는 그게 조금 얼떨떨했다.
“너 이름이 뭐야? 몇 살이야? 나는 제이. 너 동생 있어?”
"으응. 있어"
“나 한국에 동생 네 명이나 있어. 나중에 강아지도 네 마리 키울 거야.”
그 집을 나왔을 땐 폭풍이 지나간 듯 귀가 먹먹했다. 결국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얼레벌레 있다 나와버렸다. 뭔 애가 저래. 떽떽거리는 게 꼭 참새 같다. 귀가 물에 잠긴 느낌이라 세차게 도리질을 쳤다.
"프랜아, 친구가 말 거는데 왜 시큰둥하게 있었어"
엄마한테 한 소리를 들어버렸다.
치. 엄마는 다 엄마 같은 줄 안다. 처음 본 사이에 낯선 걸 어쩌냔 말이다. 심지어 그 여자애, 내가 부끄러워서 고개를 돌리니 ‘어딜 봐! 나를 봐!’라며 소리를 빽 질렀다. 참내, 얼마나 황당하던지. 그 기집애의 힘준 눈이 뇌리 속에 박혀버렸다.
엄마는 한국에서 온 제이가 여기 친구가 어디 있겠냐며 나를 그 집으로 종종 밀어 넣었다. 역시나 이상한 애. 한국에서는 이런 춤을 춘다며 기괴한 춤을 추기도, 뜬금없는 성대모사를 하기도 했다. 그게 너무 웃긴 나머지 깔깔대고 말았다.
고작 7분 거리에 살고 있는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왈가닥인 제이와 얌전한 나는 신기하게 친구로 제법 잘 맞아떨어졌다.
"너 처음에 완전 싹퉁머리 기집애였어. 알아?"
푸흐흐- 제이의 말에 웃었다. 누가 저런 말을 알려주는 건지. 제이는 나를 종종 ‘싹퉁머리’라고 부른다. 결국 이 이상한 여자애랑 이렇게 친해지게 된 거다.
'다른 애들은 소 닭 보듯 하면서 제이랑은 잘 지내는 거 보면 역시 잘 맞는 사람은 따로 있어'
엄마가 그런 말을 했다.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여기 다른 또래 친구들도 있었지만, 걔네보단 제이가 좋았다. 제이만큼 웃기고 특이한 친구는 없다.
'야! 패스해-'
공차는 소리가 도서관까지 들린다.
학교 점심시간. 이 시간이면 친구들은 운동장에서 축구나 뛰기 시합, 술래잡기 같은 걸 했다. 다리가 부들거리고 정수리가 뜨겁기만 한걸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특히 누가 뒤에서 따라잡는 느낌은 소름 끼칠 정도로 무섭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이 뛰어도 결국은 잡혀 버린다. 터치- 프랜이 아웃!
공놀이도 마찬가지다. 공이 빠르게 날아오는 건 너무 위협적이라 나는 본능적으로 질끈 눈을 감아버린다. 그러다 공에 맞으면 아프기도 엄청 아프다. 그다음은 또 아웃. 날아오는 공을 두 손으로 잡는 오빠도 있는데 볼 때마다 감탄이 나온다.
그래서 결국은 매번 여기다. 노란 카펫이 깔려있고 눅눅한 책 냄새가 나는 도서관. 여기서 나는 뭐든 된다. 빨간 머리 앤이 되어 학교를 가고, 새벽에 고래를 잡으러 바다로 나간다. 책장을 넘기며 제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야, 프랜이! 어디서 뛰고 왔는지 양볼이 빨간 제이가 쌕쌕거리며 도서관 문 턱을 잡고 있었다.
제이는 종종 나를 찾으러 도서관을 왔다. 친구들이랑 놀다 오기도 하고, 이렇게 바로 찾으러 올 때도 있었다. 제이가 오고 난 뒤로는 도서관에서 시끄럽게 굴다 선생님한테 혼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요즘엔 바로 책을 덮고 도서관을 나와 버린다. 우리는 학교 뒤편에 텃밭이라고 부르는 데를 갔다.
제이는 텃밭에서 만나는 불개미들을 모조리 짓뭉개며 말했다.
"걔, 나한테 요즘 친한 척해. 웃겨, 지가 언제부터 나랑 친했다고."
제이는 인기쟁이다. 몇몇 친구들이 알짱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는데, 표면적으로 지낼 뿐이다. 그 옆에 쪼그려 앉아 그 사실을 조금 자랑스러워했다. 결국엔 언제나 나다. 제이는 잘 놀다가도 나를 위해 도서관 앞에서 기웃거린다.
제이는 나를 괴롭히던 친구를 팍 밀쳐버려 싸움에 휘말리기도 했다. 옆에서 울먹이며 말릴 수밖에 없었던 나는 한동안 제이가 알려주는 '싸움의 기술'을 배워야 했다. (양검지로 배를 빠르게 찌르는 기술이라던가, 상대방이 내 몸을 밀었을 때 있는 힘껏 버티기와 같은 기술)
태권도 기합을 넣을 때도 목청껏 소리를 지르는 제이는 항상 긁힌 듯한 목소리를 냈다. 그게 꽤 멋있어 보여서 나도 긁힌 목소리를 내보려고 했지만, 그런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나 고백하려고 내일"
"뭐?"
잠깐은 제이가 좋아하던 교회 오빠도 있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알 정도로 좋아하는 티를 냈지만, 그 오빠는 제이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건 누가 봐도 뻔한 사실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예배당 문 턱 앞. 계단에 쪼그려 앉은 제이는 곧 울기 직전이었다. 대차게 차이고 온 제이의 어깨를 감쌌다. 언제나 그녀의 옆은 내 몫이라는 생각에, 그게 왠지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제이가 고개를 올리더니 대뜸 물어봤다.
"근데 너는 왜 그 오빠 별로 안 좋아해?"
"내 스타일 아니야. 못생겼어."
"너는 예뻐서 그래"
제이는 가끔가다 그렇게 말하곤 했다. 너는 예쁘다고.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간지러웠다.
"내가 그 오빠라면 너를 좋아했을 거야."
한 마디를 덧붙이는 제이. 무슨 그런 말을 쉽게 하는 건지. 얼굴이 뜨거워지는 기분이다.
"아니야. 그 오빠 나한테 관심 없어"
"그래도. 나중에 그 오빠가 너 좋아하면 어떡해"
"그럴 일 없어. 그리고 너가 훨씬 훨씬 아까워"
나는 제이를 꼭 끌어안으며 얘기했다.
그 오빠는 못생기고 재미도 없다. 그에 반해 제이는 인기쟁이인 데다가 얼마나 웃긴데. 다른 누가 제이에게 고백을 한다 하더라도, 제이가 백배는 아깝다. 제이가 눈두덩이를 내 어깨에 꾹 누르더니 이내 축축해졌다. 나까지 서러워지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