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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장장이 Apr 29. 2024

내 남편은 게이

어릴 적부터 이어져  주변인들의 압박 면접은 내게 깊은 대인관계를 허락하지 않았다.


"여자친구 있어?"


"넌 참 특이한 것 같아."


"넌 여자 볼 때 어디 먼저 봐?"


"너 진짜로 남자 좋아하는 건 아니지?"


"난 그런 거 혐오하는 사람이야."

.

.

.


 그들이 원하는 정답, 즉 거짓말을 내놓고 나서야 평화로울 수 있던 우리는 늘 두 뼘만큼의 거리를 둬야 했고 내가 나로 살 수 없는 이 저주를 풀어내는 것이 내겐 가장 큰 숙제였다.

 

남편을 만나 사랑을 알기 전까진...







 

 그의 고향은 대서양 무역의 요충지로, 한때 한국어선들이 한탕을 노리고 물밀듯 쏟아져 왔다는 카나리아제도다. 덕분에 이 머나먼 섬마을에서도 비교적 쉽게 한국인과 한국 문화를 접할 수 있었고, 슈퍼에서 사 먹은 새우깡을 시발점으로 막연하게나마 동양문물을 선망하게 됐다고 한다. 관심사는 자연스럽게 아시아 - 일본 - 애니메이션 - 케이팝 순으로 옮겨졌고 20대 초반, 한국행을 택하기까지 이른다. 그의 한국 친구는 그에게 "준"이라는 한국 이름을 선물했고, 그 이름이 별 이유 없이 좋았다. 몇 달 후에 "준"이라는 잘생긴 한국인을 만나게 될 거라곤 꿈에도 모른 채.


 내 고향 진안은 전주 옆에 있는 작은 군이다. 그만큼의 좁은 시야로 스무 해를 보낸 나는 해외생활을 막연히 동경하게 됐고 자연스레 외국인과의 교제를 꿈꾸게 됐다. 성인이 된 후에야 본격적인 영어공부를 하게 된 나는 차차 내 꿈과 가까워지는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란카나리아라는 생소한 섬에서 온 청년이 느닷없이 내 삶에 나타났다. 당연히 미국 캘리포니아 어딘가에서 묻힐 줄로만 알았던 내 인생은 그렇게 변곡점을 맞았다. 20대 초반, 나의 순정을 빼앗아간 그 사람은 내 첫 번째 남자친구다.


 지구 반대편에서 접점 없이 살아오던 우리 둘에게 하나, 둘 그린라이트가 켜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의 첫 만남은 그다지 운명적이지 않았다. 친구들이 모인 술자리, 늘 그렇듯 친구의 친구의 친구까지 모인 불편한 자리였다. 몸상태가 좋지 않았던 나는 구석에 있는 둥 마는 둥 자리했고, 그 또한 테이블 반대편 구석에 새하얀 피부만큼이나 외롭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때 당시 난 세 번째 외국인 남자친구에게 부지런히 인생공부를 당하는 중이었다. 가스라이팅의 고수였던 그 남자친구는 내 연애사를 반추하게 했고, 결국 외국인과 나는 잘 맞지 않는다는 데이터 기반 분석을 낳게 했다. 그렇게 선입견으로 중무장한 나를 그는 손쉽게 무력화시켰다. 내게 술을 강요하는 친구에게 그가 말했다.


"주지 마! 아프대."


 내 옆에 앉아있던 남자친구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뭐야... 왜 저래?"


남자친구가 눈알을 굴려가며 답했다.


"쟤 원래 저래..."


 원래 그런 그에게 그 즉시 환승을 했어야 했는데 신중을 기한답시고 꽤 뜸을 들여버렸고, 그는 그 사이 다른 연애를 해버렸다. 나와 남자친구는 헤어졌고, 슬픈 척하고 있던 틈에 짧은 연애를 마친 그가 나의 네 번째 연인으로 훅하고 들어왔다. 내 첫사랑의 고향 그란카나리아에서 이번엔 제대로 배달된 남편이 온 것이다.








 연애 3년 간은 도무지 싸울 수가 없이 좋기만 했다. 그러다 느닷없이 찾아온 권태기에 꽤 휘청대긴 했지만 대화로 서로가 바뀔 거란 희망 내지는 착각으로 버틸 수 있었다. 내 부모처럼은 살지 말아야겠다며 이를 악물고 이 사태를 최대한 현명하게 해결해보려 했지만 이 평행선 대치상황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런 현상 유지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라는 질문과 함께 막 다른 길이 우릴 숨조여 왔고 정말이지 밑바닥을 모두 드러내는 대화가 절실했다. 정반대의 이야기를 각자의 입장에서 누구나가 수긍할 수 있는 논리로 펼쳤고, 더 이상 말할 기운이 없어질 때쯤에야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얘기할 용기가 생겼다. 그때의 우리 둘 중 하나라도 그렇게 대담하지 못했더라면 지금의 남편이라는 보금자리도 없었을 것이다.


 남편은 외국인 고무신 1호다. 면회가 허락되는 주말마다 찾아왔기 때문에 사실상 함께 군생활을 했다고 봐야겠다. 모든 선후임들이 그의 존재를 알고 안부를 물을 정도였으니까. 금요일 신세계 백화점 푸드코트 마감세일 시간에 맞춰 이 것 저 것 다양하게도 싸왔다. 늘 보이는 배달 치킨, 피자와는 격이 다른 그의 정성은 군대에서 낮아질 대로 낮아진 나의 자존감 회복에 큰 힘이 됐다. "넌 걔 없었으면 군생활 제대로 못 끝냈을 거야." 우리 엄마의 총평이다. 내가 별나게 재수가 좋았던건지 아님 이곳 스페인 사람들이 다들 스윗한건지 관찰해 본 결과 내가 아주 잘 고른 것으로 판명됐다.  


 누구나의 관계가 그러하듯 이런저런 양념과 함께 지지고 볶다 보니 10년이 흘렀다. 매일 함께 있어도 대화할 거리가 있고, 일하다가 생긴 재밌는 일화를 그에게 말해주려고 일부러 메모도 한다. 양가의 대소사에 참여하, 국내든 해외든 최대한 여행하려 한다. 물론 각자 여행을 할 때도 있고, 싸울 땐 시간과 거리를 두는 법도 배웠다. 사랑하지만 서로 소유하지 않는 관계랄까? 불타게 끌어안는 것보다 나란히 걷는 게 더 편해졌고, 혹여 헤어진다 해도 더 오랫동안 고마운 사람으로 기억하며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조차 들었다. 그렇다면 '베프와 다른 게 뭘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크게 다른 게 없는 것 같다. 다만 그와의 사랑과 의리는 너무도 값지기에 베프보다 저만치 위에 우선순위로 두게 되나 보다. 또한 상실의 아픔을 겪을 때, 내 옆에 별말 없이 자리해 주는 그의 모습을 보고 참 많은 위로가 됐다. 그때 참 많이 필요했고, 있어줘서 정말 고마웠다.


 스페인에서 지내기로 결정한 후 바로 결혼을 하게 됐다. 혼인관계로 누릴 수 있는 거주비자혜택 때문에 굳이 한 결혼이었고, 사랑의 결정체가 결혼인 양 말하는 디즈니식 교육을 탐탁지 않아 하던 우리로선 꽤 무미건조한 과정에 불과했다. 그렇게 몇 달간의 서류절차를 마치고 공증인 앞에 섰다. 상대방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 상대방 부모님 풀네임 등등 헛웃음이 나오는 공증인의 커플 검증 질문이 끝나고 나면 서약서를 읽고 결혼을 하게 된다. 공식 짝꿍이 되는 것이다. 이해도 안 되는 스페인어 백년해로 주례사를 내 입으로 읽고 있노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아주 많이. 그렇게 우리 모두 광광 울어버렸다.








 한국에서 나는 여전히 미혼이다. 그와 나의 사랑은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사회질서를 무너뜨리고, 문란하며, 가증스럽기 때문에 찢어져 마땅한가 보다. 그는 여전히 출입국 사무소를 들락거리며 수능을 치르는 N수생의 심정으로 자신의 등급을 매김 받아야 한다. 비자를 받기 위해선 어느 정도 국가에 대한 기여가 있어야 하는데 이를테면 나이가 적당해야 하고, 돈을 많이 벌어야 하며, 학벌이 좋아야 한. 실제로 이와 같은 항목으로 인간의 점수가 매겨지고 있다. 좀 더 노골적인 표현으로 속내를 드러내자면 출생률에 보탬되고, 세금도 많이 내며, 문과보단 이과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이 점수가 떨어지기 시작한 그는 쓸모 없어짐에 대한 무기력과 결코 나와 함께 터 잡을 수 없는 사실을 품고 살아야 했다.


 우리의 쓸모에 대해 굳이 부여잡고 얘기하자면 "게이 지수"에 대해 짚어볼 수 있다. 한 도시에 사는 성소수자의 비율과 그곳의 첨단산업 발전도가 거의 일치하는 상관관계를 가진다는 지표로 "관용이 재능 있는 사람들을 모아 기술로 발전시킨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또한 관용이 개인의 행복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바 있다. 쓸모를 떠나서... 행복을 떠나서... 아니, 다 떠나서... 숨 붙어있고, 남 해하지 않으며, 세금 내는 사람들이 법적 혼인을 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결혼으로 줄 수 있는 비자혜택은커녕 부부로서 가질 수 있는 천여가지 권리 중 우리는 가질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권리란, 하나의 파이를 이리저리 조각내서 경쟁하듯 빼앗고, 뺏기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파이 하나씩을 가지는 것이다.


 이제는 여성들이 눈치 보지 않고 맘 편히 투표를 하듯이


 이제는 흑인들이 버스 아무 자리에나 앉을 수 있듯이


 이제는 그 누구든 나라님까지 풍자할 수 있듯이


 이제는 OECD 대부분 국가에서 (한일 제외) 동성혼이 가능하듯이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모든 것들이 쟁취라는 이름으로 기록됐지만 사실 뺏거나 빼앗김이 없이 종국에는 조화롭게 모두의 권리로 자리 잡은 것이다. 내가 한국에서 원한 건 그 파이 하나가 아니다. 내가 낸 욕심은


 "그와 손잡고 걷기"


 그뿐이었다.


 







 그와 손잡고 거니는 모든 길이 이태원 골목만큼이나 평화롭길 바랐다. 이런저런 푸념을 늘어놓던 자리에서 친구가 도리어 화를 내며 내게 말했다.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손잡고 다녀!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

.

.


 '그걸 내가 모를 리가!!!'


 상황이 웅장해진다. 나는 단지 그와 손잡고 걷고 싶을 뿐, 인권운동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목이 꺾여라 몇 번을 뒤돌아 보고 옆 사람에게 오늘의 안주거리라도 찾은 냥 재잘대는 이 비현대적인 상황... 그 와중에 아무렇지 않은 척 손 놓지 않고 걸어가야 하는 우리 둘. 내가 너무 불쌍했고 헌법 아래 신념을 들이미는 코미디를 언제까지 지켜봐야 하는지 도무지 가늠이 안 돼서 난 당연하게도 타향살이를 택했다. 누리고만 살기에도 짧은 일생을 희생만을 강요하는 종교와 사회 속에서 더 이상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스페인에서의 결혼 과정에서 우리가 거쳐야 했던 행정인, 법조인들은 우리를 처리해야 할 일거리로만 바라보았지, 그들의 가십거리로 여기지 않았다. 혐오나 연민의 대상이 아닌 그들과 어울려 사는 하나의 작은 팀으로 인정되고 있었다. 물론 이 사회가 이 정도의 포용력을 가지기까지는 지금의 한국이 그러하듯 정말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수반되어야 했다. 옷장 속에 자신을 가두고 숨죽이며 살아야 하는 고통이 내 것은 아니지만 내 자식, 형제 혹은 가까운 친구의 것이라는 걸 거의 모두가 알게 됐을 때 비로소 현실적인 공존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내 백인 남편이 동양인인 나를 사랑하고서야 인종차별에 귀 기울이고 공감하게 된 것처럼)


 눈물 한 바가지를 쏟은 결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렇게 10년 만에 우리는 깍지를 끼고 걸을 수 있었다. 내가 누군가와 함께 이 지구별에 존재한다는 걸 가슴 깊숙한 곳에서 묵직하게 느꼈고 아무런 시선도, 두려움도 느낄 수 없었다. 그의 부모님이 수십 년을 그래오신 것처럼 우리도 이제 막 함께 걷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마침내 내가 평범해질 수 있었다.










 내가 "나"임에 그 누구도 죄 주거나 수치 주지 않는 이곳이기에 가능하다. 혐오 앞에 무력해지는 곳과는 애초에 판이 다른 것이다. 이게 다 남편 덕이라는 생각에 조금 미안해진다. 그가 내게 준 선물을 나도 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가 내게 준 더 큰 선물이 있다. "원래 그래."라는 답으로 귀결되어 왔던 수많은 질문들이 더 이상 그 자리에 숨 멎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언어, 문화, 환경... 새우깡 빼고는 뭐 하나 겹치는 게 없던 우리는 그들만의 정답이라고 마련된 틀 속에서 성인이 됐다. 그 정답들이 너무도 납득이 됐기에 "왜 그래야 하지?"라는 질문은 시간 낭비나 엉뚱한 소리로 분류되어 왔다. 그와 나의 다른 정답은 이따금씩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뜯어보고 들여다보면 화낼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국가, 교육, 가정, 주변, 종교가 우리에게 알려준 것들은 수천억 가지의 시행착오로 빚어진 혜안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다만 비행기가 떴고, 지형적 제약 없이 살 곳을 찾게 됐고, 유럽 등지의 교회가 학교나 공공시설로 전환되고 있으며, 넷플릭스나 SNS로 세계각지 사람 사는 모습이 공유되고 있는 지금, 무턱대고 정답을 내려놨다가는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 고집불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이견을 조율할 때 종종 하는 말이 있다.



"Tell me if I am wrong."  



이럴 땐 로또 맞은 사람 부럽지 않다.








 남편이 내게 보여준 사랑은 티 없이 맑고 깨끗했다. 10년 동안 단 한 번도 신뢰에 대해 얘기해 본 적이 없을 만큼 한 그루 나무 같은 사람이다. 내가 부스스한 머리로 눈 비비고 일어나면 사랑스레 쳐다봐준다. 그의 인내와 다정함, 사려 깊음 등 뻔하고도 눈먼 수식어들은 누구에게 비치기 위함이 아닌 그의 기본 설정 값이다. 나를 간질거리는 그의 천성은 내 것과 너무나 비교 돼 가끔 내 얼굴을 붉히기도 한다. 거짓으로 가득한 세상 속에 진실된 사람들 몇몇과 함께 산다는 얼마나 의미인지 체감하게 해 주었고 내가 진실된 삶을 용기를 줬다. 내겐 과분한 사람이라고 내 친모조차 인정했으니 말 다했다. 내가 바닥일 땐 바닥에서, 하늘일 땐 하늘에서 함께 웃고 울어준다. 우울함이 온몸을 마비시킬 때 그의 존재가 날 일으켜 세운다.


 그런 그가 오답이라니...


 내가 문제를 잘 못 푼 걸까? 아님 출제가 잘못된 걸까?

.

.

.


 아님 시험을 안 보는 게 상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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