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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장장이 Nov 15. 2024

엄마. 나 사실 알레랑...

Coming out to her

 나는 그녀에게 종교와도 같았다. 아들만 보고, 아들을 위해 사는 것이 그녀의 소명이자 삶,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다 내어주고도 더 주지 못해 아파하는 엄마의 사랑으로 자란 나는 오늘 그런 그녀의 가슴에 비수를 꽂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오롯이 "나"이기 전에 우리가 한 몸이었던 것처럼 우리는 꽤 오랜 시간 둘인 듯 하나였다. 하루빨리 끝이 보이기만을 바라며 악으로 달려온 길고 어두운 터널 속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의지와 의미가 되어주었다. 최선을 다 하지 않으면 죽을 것처럼 몰아세우는 상황들이 사실 조금은 숨 막혔지만 흘러 흘러 지금의 이곳까지 다다른 우리의 모습 그 자체로 서로의 트로피가 되었다. 그렇게 그녀는 내게 엄마이자 친구이자 전우로서 내 삶의 주연을 맡아왔다. 나를 위해서라면 광대건 무수리건 그 어떤 역할도 마다하지 않던 그녀의 막무가내적인 사랑 덕분에 난 선택의 여지없이 꽤 바르게 자라고 말았다.

  

 7살 때 아버지의 망할 사업이 끝내는 망해버렸고 그는 자존심을 부여잡고 그 길로 집을 나갔다. 그때부터 안산 반지하에 덩그러니 놓인 우리 모자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고, 엄마는 한 달에 딱 하루만 쉬어가며 10년 넘게 근속을 했다. 손에 화상을 입으면 붕대를 두르고 출근했고, 컨디션 난조에도 일단은 출근을 했으며, 일터에서 혼절하곤 했다. 그렇게 먹여 살리겠다고 달려온 엄마의 미간엔 필러로도 채워지지 않는 주름 하나가 훈장으로 남아 웃을 때조차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게 한 달에 하루 쉬는 날이면 우린 홈플러스를 갔다. 꼭 쉬기 전 날마다 노래방에 전 직원을 참석시킨 사장 아저씨 탓에 숙취로 하루를 시작해야 했던 엄마는 싫은 기색 하나 없이 내 기분에 맞춰 함께 들떠주었다. 홈플러스에는 내가 가질 수 없는 것들이 정말 많았다. 컴퓨터 게임, 플레이스테이션, 구슬동자, 세븐체인저, 골드런, 세일러문 스티커 세트, 햄스터, 금붕어... 그리고 카트를 끄는 또래 아이들의 아빠.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것이 많다는 걸 일찌감치 배워서인지 보는 그 자체로도 즐거울 수 있었고 꿈꿀 수 있었다. 국내여행 한 번 가본 적 없는 나의 유년 시절 홈플러스는 내게 신기한 해외여행이고, 따뜻한 가족 나들이었다.


 우리 둘 뿐이었기에 있었던 애로사항도 참 많았다. 다툴 땐 중재자가 없었기 때문에 둘 중 하나 체력이 고갈될 때까지 밤을 새워가며 싸웠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엄마는 사근사근 공감해 주고 같이 욕해줄 "F"가 필요했던 건데 내가 너무나 "T"라 미숙했다. 동네에는 아빠가 월급 꼬박꼬박 가져다주는 기러기 가족으로 거짓말을 해놓았기에 엄마의 신세한탄 상대는 늘 나뿐이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반복되는 시달린 이야기, 시월드 이야기, 그 시발... 점 등등 나와는 전혀 관련 없는 얘기인 것 같다가도 "느그집"이라는 단어로 늘 방아쇠가 당겨져 다투곤 했다. 그녀의 감정 쓰레기통 정도는 기꺼이 해줄 수 있었다. 하루면 열두 번도 더 차올랐을 그 감정에 질식해 죽어버리지 않고 여태 살아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그녀의 목표의식과 실행력은 내게 형용할 수 없는 영감으로 날 울렸고 내가 원한 대학, 성적, 군대, 무대, 해외로 날 끊임없이 이끌었다. "너는 할 수 있다"며 끊임없이 전진하기만을 독려하는 무책임한 세상 속에서 '이거, 할 수 있겠는데...?'라는 자신감이 마치 당장 이뤄질 현실처럼 피어오를 수 있었던 건 매일매일이 실천이었던 엄마를 보고 자랐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렇게 끝내는 이뤄낸 모든 것들이 결국 나의 자존감으로 자리했고 여전히 나를 반짝이게 한다.  


 꿈을 좇아 나는 둥지를 떠났고 이리저리 치여가며 정신없던 틈에 엄마는 둥지에서 혼자서 심심했는지 나이를 하나, 둘 몰래몰래 먹어버렸다. 그렇게 특별히 이룬 건 없지만 재밌게 살고자 하는 아저씨가 된 아들과, 이제는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 엄마. 여전히 우리는 서로의 자랑이고 자긍심이다. 그렇게 홀연히 오늘은 다가왔고 지금 내가 엄마에게 하려는 말이 이 모든 우리의 역사를 걸만큼 중요한 일인가? 가 나에게 남은 마지막 질문이다. 그녀의 공든 탑을 박살낼만큼의 가치가 있는가? 마지막으로 되짚어본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맞은 때는 올 것 같지 않고... 지금이 아니면 대체 언제란 말인가?






 무심하게도 밝아버린 새해가 너무도 얄미웠다. 내 말 한마디 앞에 앞서있는 이 무시무시한 거짓 장벽은 이렇게나 더 높아졌는데 대체 뭐가 새롭고 뭐가 밝다는 건지 드디어 의문이 든 것이다. 엄마가 우리와 함께 식사를 하러 서울로 왔다. 김치며 메추리알이며 바리바리 싸들고 온 엄마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홍대입구역 7번 출구로 나오고 있었다. "내가 다시는 오나 봐라" 라며 한 보따리 바닥에 내려놓았다. 몸만 가볍게 오라고 해도 꼭 이것저것 싸 오고선 투덜댄다. 평소 같으면 "화가 잔뜩 났네? 그럼 다시 돌아가면 되겠다." 라며 너스레를 떨 테지만 오늘은 아무 말도 나오지가 않았다. 무작정 "엄마. 할 말 있어."로 운을 뗀 나는 엄마와 눈이 마주치자 머릿속이 새하얘졌고 일단 집에 도착할 때까지만 더 생각할 시간을 갖기로 했다. 귀신에라도 홀린 듯 길이 유난히 짧았다. 괜히 엉뚱한 골목으로 접어들어 길을 늘어뜨렸다. 결국 엄마의 이끌림에 집에 도착했고 외투도 벗지 않은 채 탁자에 마주 앉았다.  



 "... 엄마, 나 사실 알레랑 8년째 만나는 사이야."



 방 안이 모서리까지 적막으로 자욱해졌다. 그 와중에 신기했다. 우리처럼 말 많은 모자간에 이처럼 서로가 조용해지는 순간이 있을 수 있다니... 30년 묵은 나의 숙제가 엄마에게 순식간에 전달됐으니 그 무게에 압도된 것이다. 깊게 내쉰 한숨과 함께 30년이라는 세월이 주마등과 함께 되감겨졌다. 내가 왜 그때 거기서 그래야 했는지, 왜 그렇게나 불같이 화를 냈는지, 왜 이태원에만 다녀오면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보였는지, 왜 여태 사귄 여자들을 소개해준 적이 없는지... 교회에서 돌아와 엄마 앞에 아무 말 못 하고 펑펑 운 이유는 무엇인지... 와르르 무너진 흑백의 거짓들이 다시금 생생한 진실로 채색되고 있었다.


 그렇게 조각난 퍼즐을 하나 둘 맞춰가던 중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좀처럼 우는 법이 없는 아들의 우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는 엄마가 물었다.


 "너 그런데 왜 울어?"


 뚝 그쳤다. 너무 당황해서... 울만 하니까 울지 않았을까...? 유튜브에 돌고 있는 "커밍아웃 부모님 리액션" 영상들을 수도 없이 봐오며 시뮬레이션을 돌려봤던 나지만 예상답안을 훌쩍 넘어선 대답에 멍해져 버렸다. 울 거 없다는 위로라기보단 사실 정말로 왜 우는지가 궁금한 것 같았다. 일단 그녀의 반응을 더 살피기로 하고 이런저런 질문을 받기 시작했다. 대부분 원색적일 수 밖에는 없었던 그녀의 질문 중에는 이런 것들이 있었다. 


 "그럼 누가 여자야?"


 엄마가 다니는 콜라텍에도 여자 둘이서 춤을 추는 커플이 있는데 어떤 공부 많이 한 아저씨가 그들을 보고는 "둘 중 하나에 남자 영()이 들려서 그래"라고 했단다. 엄마도 어느 정도 수긍하는 눈치였다. 깊이가 느껴지는 그녀의 무지... 대답할 여지도 없이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여자 되려고 그러는 건 아니지? 그건... 안 돼"


 성 지향성(sexual orientation)에 대한 고백이었는데 성 정체성(sexual identity)의 부정부터 당해버렸다. 사실 부정이나 오해였다기 보단 지향성과 정체성, 이 둘 자체를 구분할만한 지식이 없었던 것이다. 어찌 됐든 두 사람의 교제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만 이뤄질 수 있다는 유교 사상이나 기독교 사상(주장)에 끼워 맞춰진 고집스러운 추측일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여자가 되는 것은 안된다"는 말이 게이로 사는 것은 괜찮다는 말로 들려 조금은 안심이 됐다. (일단은 코 앞에 불부터 꺼야 했으므로)






 성 정체성이란 남성으로 태어난 내가 남성인 것이 괜찮은지, 아님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지에 관한 것이다. 말 그대로 나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정체성이다. 이 사안은 점심에 돈가스를 먹을지 김치찌개를 먹을지 고민하는 것처럼 때때로 부장님 맘대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밥을 먹어야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것과 같은 사실이다. 때문에 때때로 누군가는 목숨을 걸어가면서 성전환 수술을 결심하기도 한다. 우리는 잠시나마 이 땅에 함께하는 사람들로서 이들을 더 이상 음지로 내몰아 성적대상화만 해서도 안되고, 그 숭고한 결정 자체를 조롱해서도 안된다. 굳이 "트랜스 젠더"라 분류, 명명했지만 사람 사는 세상으로 그들을 하루속히 "사람"으로 초대해야 한다.   


 성 지향성이란 내가 어떤 타인에게 끌리는 지를 말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겐 얼토당토않은 부적절한 얘기 같겠지만 이성애자 외에 우리는 분명히 있다. 언제나 존재하며 어디에나 존재한다. 성적 끌림과 사랑하는 마음을 동일시했기 때문에 이성애(愛)자, 동성애자, 양성애자라는 말이 붙었으리라. 각각 이성, 동성, 양성에게 성적 호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인데 출생과 직결되는 이성관계 외의 것들(피임 포함)은 모두 죄악시 돼 온 특정 집단으로부터 존재 자체를 부정당해 왔다. 교회 구마의 대상, 법정의 피고, 병원의 치료대상으로 내몰려 온 우스운 역사 속에서도 우리는 그저 어쩔 도리가 없이 그저 존재했다. 공존하기 위해 거짓말로 타협해야만 했던 그 순간순간에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였다.  


 전기로 내 뇌를 지져서 알레를 빼앗아간 후에 세상이 내게 얻을 수 있는 건 무엇인가? 나와 똑 닮은 2세를 여성과의 성관계를 통해 최대한 많이 얻어내는 것인가? 아니면 드라마 속 선남선녀가 되어 그들이 보기에 그럴싸해야 하나? 우리가 도대체 왜 이 땅에 태어나 이렇게 꼼지락거리는 건지, 왜 특정 집단만 선택을 받아 사후가 보장되는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고 안다 해도 사실이 아닌 믿음에 불과하다. 때문에 우리는 저마다의 철학과 가치를 가질 권리가 있고 남을 해하지 않는 선에서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세상을 원하는 우리 모두는 전쟁대신 공존을 원하니까. 때문에 자연히 무해하게 존재하는 동성애를 찬성, 반대할 수 없고 더욱이 조장할 수도 없다. 즉, 내가 동성애를 제발 좀 하자고 떠들 수 없고, 떠든다 해도 이성애자가 동성에게 별안간 성적인 매력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심호흡과 함께) 휴... 다시 내 이야기로 돌아오자. "나는 남자인 내 몸이 정말 좋아. 그리고 남자를 좋아해. 그렇게 고른 게 알레야. 잘생겼는데 착하기까지 하잖아" 차분하지만 단호하게 내 사실을 얘기해 줬다. 그녀의 머릿속엔 큰 늪이 하나 자리했고 이래저래 해명 비슷한 걸 해보이는 내가 그곳에 빠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엄마는 늘 그렇듯 어느 순간부턴가 듣고 있지 않았다. 그저 눈을 휘휘 굴려가며 과부하를 무시한 CPU가 계속해서 가동되고 있는 듯했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그녀가 어떤 프로세스를 거쳐 무슨 답을 내놓을지는 그야말로 미지수인 것이다. 한참 후, 그녀 다운 대답이 나왔다.


 "네가 언제는 내 말 들은 적 있냐?"


 이 정도면 선방한 거다. 그녀로선 도무지 이해가 안 되겠으나 우리 둘이 잘 지내는 모습이 참 보기 좋으니 알아서 잘 해내라는 말이었다. 무엇보다 엄마는 알레 마음씨가 너무 좋았고 나보다 더 믿음이 가는 사람이란다. 그러고는 대뜸 비수와 같은 말이 날아왔다.


 "아무튼 이모들한테 난 말 못 해"






 내가 30년 걸려서야 낼 수 있었던 용기를 30분 안에 내라고 한 꼴이었으니... 지금은 이해가 되지만 그때 당시엔 거짓 구렁텅이에 다시 한번 빠진 기분이었다. 그렇게 안산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마치고 엄마를 홍대역으로 배웅하는 길. 둘 다 넋이 나간 듯 앞만 주시하며 걸었다. 그때 저만치서 초록눈의 외국인이 지친 어깨를 바로하며 우릴 향해 다가왔다.


 "어머니!!!"


 "알레!!!"


 내 말은 안 믿어도 알레 말은 믿는다는 엄마가 그렇게 포옹으로 알레를 반겼고, 평소와는 다른 기류를 감지한 알레가 내게 스페인어로 물었다.


  "¿Qué está pasando?"


 무슨 일이냐고 묻길래 "다 말했다"라고 짧게 응수하자 당황할 새도 없이 엄마가 그에게 말해주었다.


 "준이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그렇게 우리는 "일단" 가족이 되었다.


 




후문에 의하면 내가 부러 길을 잘못 들어서던 그때부터 엄마는 '오늘이구나...' 라며 마음을 다잡았다고 한다. 


 내 등의 짐은 모두 덜어졌다. 난 특별하지 않지만, 더 소중해졌다. 열쇠로 옷장을 열자 숨어있던 내가 나왔고, 그 안은 금은보화로 가득했다. 내 용기로 내가 해낸 것이다. 엄마 등에는 짐이 있다. 아직은 조금씩 보인다. 어떻게 그녀가 그 짐을 덜어내는지는 이제 그녀의 몫이다. 이모들에겐 결단코 얘기할 수 없다던 엄마는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외가 식구들에게 모든 짐을 나누기로 결정했고 그 연유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네가 누굴 때리기를 했어... 아님 해하기를 했어? 별 것도 아닌 것 가지고 너 이상하게 생각하는 꼴 나는 못 보니까."

 





 편찮으시던 외할머니께서 최근에 돌아가셨다. 먼 곳에서 죄송한 마음에 발만 동동 구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를 대신해 서울에 있는 알레가 전주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일이 바쁘면 안 가도 된다 하자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며 도리어 화를 내는 알레가 너무나 고마웠다. 고맙다고 하자 고마워할 일이 아니라는 말에 더 고마웠다. 장례를 마치고 가족들이 회식을 하는 자리. "이제는 우리가 알레를 가족으로 받아들여야죠." 극 E인 외가에서 유일한 I인 이모의 언명이라 더 울림이 컸다. 그렇게 이모는 나의 영웅이 됐다.


 가족들 뿐 아니라 친구들에게도 지워진 나의 짐들이 보인다. 누군가는 타인에게 그 짐을 펼쳐 반짝이게 할 수 있을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취향껏 요리해서 나눠먹을 것이다. 발기발기 찢을 수도 있을 것이다. 돌아오기를 바란다는 "기도"로 짐을 받치는 친구도 봤다. 나 또한 바라건대, 내가 아무리 떠듦에도 그들이 진심으로 무심할 수 있는 날이 하루속히 왔으면 좋겠다. 


 커밍아웃은 나의 숙제를 공유하는 일과 같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질수록 내가 짊어지던 짐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가늠하게 된다. 어떤 방식으로든 이제 내 손을 벗어난 가족, 친구, 사회의 숙제다. 내 것이 아니다. 






 아무리 넘어져도 퐁신하게 나를 감싸 안아 줄 내 편이 있기 때문에 난 언제든 나아갈 준비가 되어있다. 때때로 욕먹고 고꾸라진 내가 이럴 테지.


 "저기요. 우리 엄마가요... '네가 누굴 때리기를 했어... 아님 해하기를 했어?' 라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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