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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랑 Feb 26. 2017

같은 글, 다른 해석

글자는 결코 완벽한 대화 수단이 아니다.

오랜만에 영화를 봤는데 하필 <컨텍트 : 어라이벌>이었다. 컨텍트를 보는 내내 들던 생각이 "외계인과 글자로 대화하는 어려움, 같은 지구인끼리도 저러지 않는가?"


사람은 사람과 대화하는데 어려움을 겪곤 한다. <말>이라는 수단으로 의사소통을 하다 보면 온갖 말실수, 의미 전달의 실수로 인해서 오해를 사곤 한다. 진심이 전달되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 한번 말한 내용은 시간을 거슬러서 수정하기 어렵지만, 의미 전달이 잘 안되면 그 자리에서 해소할 추가적인 대화의 여지가 있다.


<글자>는 이러한 굴레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여유만 된다면 썼던 글을 계속 수정하면서 충분한 의미 전달이 되도록 바꿀 여지가 크다. 그러나 글 조차도 결정적인 단점이 있다. 한번 상대방에게 전달되면 <말>에 비해 뜻을 수정하기 힘들다.


영화 속에서 외계인의 글자는 지구인들의 그것과 달리, 시간의 개념이 다르다. 덕분에 지구인들은 외계인 글자의 뜻을 오역하고선 우주적 갈등이 심화된다. 만약 외계인들이 <텔레파시>라는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면 보다 쉽게 지구인들에게 그들이 지구에 온 목적을 알릴 수 있었을 것이다. 불행히도 신체구조상 <말>이라는 수단으로는 전혀 대화를 할 수가 없어서, <글자>로 지구인과 대화를 시도했지만 같은 문자를 사용하는 사람끼리도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통할리 없었다.


우리 주변을 보면 같은 나라 사람들, 무려 수년에 걸쳐서 <한글> 교육을 받고, 수십 년 동안 그것을 사용해온 사람들끼리도 <글자>를 이용한 의미 전달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지금도 SNS상에서는 그러한 오역끼리 수많은 충돌을 일으키면서 불협화음을 내고 있지 않는가? <나>는 이런 뜻으로 글을 썼는데, <상대방>은 다른 뜻으로 받아들인다. 여기에 더해서 자신이 믿고, 보고자 하는 내용의 글만 눈에 들어오고, 조금이라도 기분에 들지 않는 내용이 있다고 느껴지면 스스럼없이 배격하는 게 최근 전 세계적인 유행이다.


스마트폰의 메신저를 통해서 자신의 감정을 한낱 <이모티콘 스티커>라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은 아주 친근한 사람끼리나 가능한 것이다. 왜냐면 맨날 대화하므로 때론 대화 자체가 귀찮기도 하고, 구차하게 글로 써서 친근감을 계속 표시하는 것은 너무 딱딱하기 때문이다. 스티커는 일종의 양념이랄까? 그런데 타인의 글을 읽을 때, 글자를 마치 스티커처럼 직설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꽤 늘어났다. 스티커는 주로 솔직한 감정의 표현을 하는 반면에, 글은 은유와 반어법으로 매우 우아(?)하고 고상하게 포장되기도 한다.


요즘엔 같은 글을 사용하는 사람끼리도, 영화 속 외계인과 지구인들이 해석을 놓고 갈등하듯,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하며 다투곤 한다. 특히 카톡의 이모티콘처럼 글을 읽는 이들이 늘어가는 게 주원인은 아닐까? 글은 워낙 표현의 범위가 넓어서, 가끔 이해가 잘 안 되는 글은 글쓴이가 왜 저런 단어를 썼는지 알기 위해서 그에 대한 또 다른 정보를 필요로 하기도 한다. 어떤 이와 글로서 이견이 생기면 글쓴이의 다른 글들을 비교적 많이 수집해서 읽어보고, 왜 저런 글을 썼는지 배경과 내면을 먼저 이해해보면 훨씬 알기 쉽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리 어렵지 않은 글 조차도, 같은 내용을 놓고 해석이 달라지는 이유는 그것을 읽는 사람들의 문장 해석력이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문장 해석력의 차이는 각자의 경험과 사고능력에 직결된다.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글을 보고도 제대로 읽을 수 없는 실질적 문맹이 사실 우리 사회에 그간 넘쳐났다는 반증이다. 물론 아예 글을 못 읽는 까막눈과는 조금 다르다. 충분히 글을 읽고, 쓸 수도 있다. 심지어 그런 부류끼리는 통하는 자신들만의 새로운 글 체계가 있다. 형식만 동일할 뿐, 담겨있는 의미 전달은 전혀 다르지만...


21세기의 문맹이라 함은, 타인의 글이 왜 쓰였는지, 그것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의 빙산의 일각이며, 그 속에 숨겨진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더 깊은 고찰과 생각이 필요함을 망각한 이들이다. 그냥 물 위에 떠있는 스티로폼은 보이는 것이 전부다. 옆에 떠있는 작은 얼음을 보곤, 그게 전부라고 제멋대로 착각하고 단정 짓는 것은 내면이 그만큼 가벼운 스티로폼이라는 반증이다. 결코 2차원의 사람들은 3차원을 이해할 수 없다. 원래 3차원의 것인 <글>을 2차원적으로 해석하진 말라. 영화 속 지구인들은 4차원적인 글을 3차원 수준으로 해석하다가 우주전쟁을 일으킬 뻔했다.


이러다간 우리 사회도 마치 중세 유럽처럼 어떤 이들은 <라틴어>를 쓰고, 어떤 이들은 단순한 <한글과 이모티콘>만 써야 할지 모르겠다. 사실 글자는 완벽하지 않다. 아무리 글을 잘 쓰는 사람 조차도, 자신의 의도한 뜻을 완벽하게 전달할 수는 없다. 그러한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서는 글쓴이에 대해 조금 더 많은 이해가 필요할 때가 종종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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