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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랑 Mar 07. 2018

우리가 글쓰기 시작했을 때

인류와 문자, 어떻게 시작하여 어디로 향하는가

많은 생물은 같은 종끼리의 의사소통을 위해 다양한 수단(이라고 해봤자 주로 울음소리, 몸짓)을 이용한다. 심지어 곤충 조차도 소리나 페로몬 등을 통해서 의사소통을 하니, 대화의 기술은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닌 셈이다.


무리 생활을 하는 동물일수록 개체 간의 의사소통은 더욱 중요해진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수십만 년 이전부터 무리를 지어서 생활했기에 여러 가지 수단으로 의사소통을 해왔을 것이다. 지능이 발달하면서 더 많은 정보를 나누기 위해 차츰 울음소리가 진화하여 언어로 발전했으리란 것은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말은 기록으로 남길 수가 없어서 정확히 언제 언어가 완성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현대인의 언어 수준에 도달한 시점은 대략 십만 년 이전이 아닐까?



인간, 2차원을 정복하다


부족 사회로 갈수록 연장자의 존재는 중요했다. 구전으로 이어진 선조들의 경험을 언어를 통해서 후세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했을 테니까. 사람들 자체가 메모리칩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인간의 기억력은 부정확하며, 죽으면 정보가 사라진다. 그런 단점을 대체하기 위해서 등장한 것이 '그림'이라고 볼 수 있다.


프랑스 남부 라스코 Lasco 동굴 벽화, 1만 6천 년 전
스페인 알타미라 Altamira 동굴 벽화, 1만 5천 년 전

물론 당시 인류에게는 언어 이외에도 다양한 보조 의사소통 수단이 있었음이 확실하다. 예를 들어 끈으로 매듭을 묶거나, 연기를 피우는 방식도 분명 존재했을 것이다. 손짓 발짓 몸짓과 같은 원초적인 보조수단은 더욱 정교해졌을 테고. 지금도 사람들은 말을 할 때 제스처를 쓰곤 하지 않는가?


그림으로 어떤 의미를 추상화하는 것은 매우 의미가 큰 진화의 산물이었다. 처음에는 사물의 형체를 2차원적인 낙서로 그리다가, 차츰 형이상학적인 의미도 가미했을 것이다. 그리고 기존의 음성과 달리, 그림은 오랜 세월을 견디고 남아서 그 출현 시기를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다.


최초의 낙서(?)는 남아프리카에서 발견된 7만 년 이전의 간단한 추상화로 추정된다. 


라스코와 알타미라보다 늦게 발견된 쇼베 Chauvet 동굴 벽화, 무려 3만 2천 년 전 작품이다.

동굴 낙서에서 시작된 그림은 차츰 정교해졌다. 어느덧 예술의 경지에 이르러 동굴 벽화가 되었고, 당시 삶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긴 셈이다. 그런데 너무 잘 그린 벽화는 생산성이 떨어지고, 누구나 그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쌍방향 대화를 위해서는 어떤 규칙이 필요했다. 결국 현대의 '이모티콘'에 해당하는 간단한 낙서 그림이 출현했으며, 그림 문자의 형식으로 발전하여 많은 정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3,500년 전의 픽토그라피 pictographic, 그림문자는 기원전 4천년 경부터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3,100년 전의 '쐐기' 설형문자 점토 태블릿, 비슷한 시기에 이집트에서도 상형문자가 출현했다.

그림문자를 본격적인 문자로 볼 수 있냐는 문제에 대해선 조금 의견이 엇갈리는 듯하다. 이와는 별개로 인류 최초의 문자로 꼽히는 '쐐기문자'는 기원전 3,100년 무렵에 출현했으니 비슷한 시기로 봐도 무방하다. 이모티콘이던, 의미를 함축한 기호던 '글자'로 가는 첫 단계에서 모두 훌륭하게 역할했다.



글쓰기는 지배계급의 상징


최초의 문자로 알려진 '수메르 설형문자'는 초기에 글자가 1,000자가량이라서 매우 많았다. 심지어 그걸 새겨 넣고 제대로 뜻을 쓰려면 무려 12년이 걸려야 습득했다는 기록도 있다. 차츰 진화하면서 2,000자까지 늘어났다가, 후기로 가면서 600자, 350자까지 줄어든다.


재밌는 사실은 고대 수메르의 왕들 조차도 어려운 문자를 제대로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문자는 주로 왕을 보좌하는 일부 관리들, 또는 사제들이나 배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식을 독점한 계층은 대대로 자신들의 비법을 세습하며 권력을 유지했으리라 여겨진다.


발견된 수메르 점토판에 따르면 초기에는 단순한 장부 관리에 쓰인 듯하다.


이러한 현상은 문벌 귀족주의가 만연했던 중세 유럽, 혹은 당-송 시대 이후의 중국이나 조선시대에서도 엿볼 수 있다. 자신들의 신분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어려운 라틴어, 한자가 애용되었다. 단적인 예로 우리나라 고전 소설에 보면 길가는 과객이 마을 정자에 모여있는 선비들에게 술 한잔 청하는 대목이 흔히 나온다. 그러면 의례적으로 "뉘신지 모르겠으나, 시제 던져줄 테니 시나 한 수 읊어보소."라고 한다. 이 대목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정체를 숨긴 암행어사, 또는 속세를 등진 김삿갓 같은 이는 유창하게 시를 지어 선비들을 농락한다. 바로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이 그 사람의 사회적 신분을 어느 정도 의미했기 때문이다.


누구나 글을 읽고 쓰는 시대가 도래하다

근세에 이르러 프랑스혁명 등을 거치며 국민 계몽주의로 다수 대중에게 교육의 기회가 열리고서야 문맹은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이 무렵에도 여전히 어려운 글을 쓰는 것은 고상함과 계급의 척도가 되었다.



모두에게 평등한 글쓰기의 시대


혹자는 타자기의 발명이 인류의 글쓰기 능력에 지대한 발전을 가져왔다고 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개인용 PC의 발명이 더 큰 이슈가 아닐까. 아니, 정확히 말하면 PC통신이 더 혁명적이었다. 지난 세기를 거쳐온 이들은 타자기-워드프로세서-PC통신-인터넷으로 이어지며 대중의 글쓰기가 부쩍 늘었다는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이제는 종이에 어렵사리 필기했다가, 구겨서 버리는 일이 없어졌으니까. 또한 출판하지 않아도 다른 이들이 손쉽게 읽을 수 있어서 읽고-쓰기의 횟수가 급증했다.



글쓰기를 잘하기 위한 세 가지 조건, 다독-다상량-다작. 그거 거짓이다. 글쓰기만 잘하려면 무조건 많이 써야 한다. 아무리 독서를 많이 한 사람도 정작 글 써보라면 못쓴다. 물론 다른 이의 글은 금세 평가할 수 있겠지만, 읽는 것과 쓰는 것은 약간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여느 유명 글쓰기 강사들을 봐도 결국엔 '무조건 써라'를 조용히 말한다.


글쓰기는 일종의 습관이자, 훈련으로 얻게 되는 기술에 불과하다. 정해진 레시피에 따라 요리하는 기술자라고 할까. 반면에 다독-다상량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바로 레시피를 만들기 위한 창의적인 사고방식, 또는 과거 문장들과 사상의 조합에 절대적인 밑거름이기 때문이다. 


잘 쓴 글과 좋은 글은 엄연히 다르다.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개인의 글 생산량은 급증했다. 많은 글이 생산되면서, 소수가 쓴 글을 다수가 읽던 시대에서 벗어났다. 요즘은 다수가 글을 쓰고, 다수가 즉시 소비한다. 글쓰기의 대중화 덕분에 평균적인 글 수준이 조금 하향 평준화되었다고 한탄하는 이들도 많다. 대중화하려면 더 쉽고, 간결하며, 명확한 글이 인기를 끄는 것이 당연하잖나? 물론 그러는 와중에 구시대와 신시대의 격돌을 피치 못할 상황이 되었다.



스마트폰이 인류의 글쓰기에 결정타를 날리다


다소 견해차가 있겠지만, 스마트폰 덕분에 어려운 지식을 암기하거나 이해하지 않아도 언제든지 '집단 지성'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지식의 홍수 속에서 인간의 뇌는 그리 빠르게 진화하지 못했다. 판단해야 할 정보가 넘쳐나자 심각하게 생각하길 포기한 우리 두뇌는 뭐든 가볍게 받아들이고, 빠르게 잊어버린다. 더 이상 긴 글은 인기가 없다. 짧고 간결한 글이 유행이 되었다. 심지어 의미가 함축된 신조어(예를 들어 급식체 같은)나 이모티콘, 스티커가 인기다. 감정과 내용을 동시에 전달할 수 있으니 매우 편리하고 유용한 수단이기에 그렇다.


글이 일부 지식층의 전유물처럼 쓰이던 시기는 지나갔다. 이제는 대중도 충분히 자신의 의사를 다양한 수단으로 표출하곤 한다. 물론 글뿐만 아니라, 손짓 발짓을 대신한 이모티콘과 초성어를 곁들여서 부족한 문장력을 보충할 수 있다. 글쓰기 실력을 키우기 위해 고된 훈련을 거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수백 줄의 근사한 문장보다, 짧은 트윗글 하나가 더 호소력 높은 시대 아니던가?


발상을 전환해 보자. 문자가 발명된 이유는 의사소통을 자유롭게 하기 위함이었다. 원시 이모티콘, 그림 문자는 너무 어려워서 많은 정보를 쉽게 전달할 수 없었다. 추상적인 문자 덕분에 교육받은 일부 계층이나마 자유자재로 문담을 나눌 수 있었던 시대가 바로 엊그제다. 지금은 거의 모든 사람이 이모티콘만으로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역사는 돌고 돌아 다시금 낙서의 시대로 진입했다.


원시 예술가는 어렵사리 동굴에 벽화를 그려 기록을 남겼지만, 현대인은 대량 생산된 수많은 이모티콘, 스티커를 사용해 미묘한 감정표현까지 손쉽게 할 수 있다. 한정된 문자를 조합해서 글 쓰는 것보다, 무한대에 가까운 그림체를 사용하는 것이 훨씬 다채로운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는 셈이다.

한글 24자 + 수십 개의 유행 신조어 + 수백 개 정도의 이모티콘만 있어도 아주 짧은 글에 엄청난 정보를 담아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 있다. 과거에 그런 실력을 지니려면 수십 년은 읽고 썼어야 하는데 말이다. 이렇게 보면 꽤나 긍정적인 현상 아닐까.


문제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누구나 읽고 쓰게 되면서 집단 지성은 더욱 발달하게 되었다. 그것은 다수결의 원리에 따라 옳고 그름이 결정되는 편이다. 방대한 지식을 축적하긴 유리하지만, 소수의 의견은 묵살되기 쉽다.

역사에서 증명했듯, 개개인은 뛰어난 사람일지라도, 뭉치면 의외로 예측 가능할 정도로 단순해진다. 예외를 너그럽게 인정하는 풍토는 사라지고, 각자가 믿는 신념에 맞는 정보만 골라 취합하곤 한다. 즉, 정보를 폭넓게 접하면서 검토하여 결론을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결론부터 내리고 그에 맞는 정보를 짜 맞추는 식이다.


톰 니콜스의 <전문가와 강적들>이란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이다. 러시아 문제에 있어서 수십 년 경험으로 전문가였던 저자는, 인터넷에서 5분간 얻은 정보로 반론하는 얼치기 전문가에게 된통 당한다. 마찬가지 경우가 주변에서 너무 흔하다. '우기는 데는 장사가 없다!'


이제는 글쓰기가 개인의 자아 발견과 지식의 깊이 있는 전달 수단으로 쓰이던 시대는 지났다. 대신에 누구에게나 쉽고 빠른 정보 전달 수단의 하나로 전락한 느낌이다. (문자 + 이모티콘 + 초성어 등이 종합세트로 사용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순수한 글쓰기는 앞으로도 오래 지속될 것이다. 비록 소수지만, 인간적인 다양성을 잊지 않고 추구하는 사람들에겐 '오래전 LP판'처럼 언젠가 다시 주목받을 날이 올 것만 같다. 다들 "ㅇㅋㅌㅋ", ":) / #@" 하는 와중에 누군가는 여전히 기나긴 글로 사랑을 노래하며, 잊혀진 문장을 읊조리며 낭만을 찾겠지.



그리고 그 마지막 사람이 사라지는 순간이, 현생 인류 문명이 멸망했음을 알리는 확실한 증거일 것이다. 아마 인공지능 로봇이 지성을 잃은 인류를 잠시 부양하다가, 그마저도 귀찮아서 모두 묻어버리고 우주로 날아가는 순간이라 예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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