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전문가 되기 참 힘듭니다

분석가의 가오가 있지(2/2)



일하다 별별 일들을 다 겪는다 말씀은 드렸지만 그중 제 몫도 상당합니다. 늘 완벽하려고 노력하지만 완벽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거든요. 적지 않은 실수와 실패, 좌절을 겪고 또 겪습니다. 이번엔 그 중 한 에피소드를 소개해 드리려 합니다. 차고 넘치는 제 흑역사 중 하나입니다.

kgi_mLKmc.jpeg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2년 전 겨울로 기억합니다. 온라인으로 A대학의 강의평가에 대한 감성분석 결과보고를 막 끝냈을 때였습니다. 결과가 깔끔하게 잘 나와서 그런지 그날따라 말도 잘 나오더군요. 별 것 아닌 드립에 리액션도 괜찮았고 추가적인 요청사항도 없었습니다. 결과 보고서만 이쁘게 뽑아내고 공개 워크숍 한 번만 진행하면 프로젝트가 마무리되는 순서였죠. 미팅 끝내고 나오는 길에 함께 작업을 진행했던 친구가 그러더군요. "B대학도 이대로 진행하면 될 거 같은데요? 결과가 비슷하니 크게 손볼 것도 없을 거 같고"


순간 설명하기 힘든 싸한 느낌이 오더군요. 두 대학은 수강 과목이나 학사구조, 재학생 비율 같은 제반 조건들이 판이하게 달라 분석 결과가 비슷할 리가 없었거든요.


자리에 앉자마자 원데이터부터 재확인했습니다. 이내 그 싸한 느낌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B대학의 데이터셋을 가지고 A대학의 분석을 진행했더라고요. 전혀 엉뚱한 재료로 맞지 않는 소릴 자신 있게 해댄 거죠. 아찔했습니다. 이런 기본적인 실수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실격입니다. 분석 들어가기 전에 파일코드 한 번만 확인했으면 되는데 그걸 안 해서 이 사단을 일으키다뇨. 어떻게 이런 실수를 저질렀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멈출 줄 모르고 피어오르는 부끄러움에 복잡한 생각들이 얽히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고야, 이 난리를 어떻게 하지?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무엇보다 이미 끝난 보고를 다시 뒤집어야 한다는 게 부담스러웠습니다. 클라이언트의 당황스러움과 실망, 전문가로서의 평판 하락, 향후 재의뢰 불투명, 헤아릴 수 없는 쪽팔림 등등... 뒤이어 펼쳐질 가능성들이 스쳐가기 시작했습니다.


가능성이 커지는 만큼 '그래, 이건 나만 아는 실수야. 그냥 넘어가도 사실 모르잖아?'라는 유혹도 생겼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고 싶은 마음도 컸습니다. 내가 말하지 않는 이상 모를 테니까.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아까의 부끄러움과는 결이 다른 부끄러움이 피어올랐습니다.'아니, 그래도 이건 좀 아닌데.'


1719633682990.jpg 돈 받고 하는 일이면 마음가짐부터 다르긴 하다


잠시의 고민 끝에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분석이 잘못될 수는 있지만, 잘못된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거든요. 전화로 클라이언트에게 상황을 설명할 때 두피가 젖을 정도로 땀을 흘렸던 게 기억납니다. 한겨울인데도 그게 가능하더군요. 하지만 놀랍게도, 클라이언트의 반응은 제 예상과 달랐습니다. 되려 고마워하셨습니다.


"아 그랬군요. 그럴 수 있죠. 빨리 발견해서 다행입니다."

"재 브리핑은 언제로 할까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짧지만 고민했던 그 순간들이 정말 덧없었구나 느껴졌습니다. 가야 할 방향과 내놓을 답은 이미 정해져 있던 것인데 하마터면 그르칠 뻔했구나. 열일 제쳐두고 재분석 작업을 진행했고 직접 방문해서 재차 사정설명 후 브리핑을 진행했습니다(케이크 하나 사들고 가서 분위기가 조금 더 누그러졌다 생각은 합니다). 이후에도 재차 의뢰를 맡겨주셨으니 그저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지요.




일을 하다 보면 이런 류의 실수나 난처한 상황을 한 번쯤 겪습니다. 데이터 분석도 예외는 아닙니다. 대놓고 공유하기 어려울 뿐이죠. 저는 이런 경험을 통해 배우고 성장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 믿습니다. 이미 발생한 실수보다 그 실수를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정말 중요하거든요. 크게 데인 학습효과 덕인지 과정 전반에 더욱 신경 쓰게 되었습니다. 두 번 세 번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고 작은 이상신호라도 무시하지 않게 되었거든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아찔했던 실수가 되려 제 커리어엔 긍정적이었다 판단합니다.


데이터 분석가는 항상 정확성과 신뢰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저 역시도 입버릇처럼 그렇게 얘기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이라는 점도 인정해야 합니다. 항상 실수를 염두에 두고, 실수를 했을 때 그걸 인정하고 바로잡을 줄 아는 것도 갖춰야 할 능력인 거죠. 한층 돈독해진 클라이언트와의 관계, 업에 대한 책임감이나 자부심은 그 부산물입니다.

44b6b67d-f8f7-420a-a01e-39dd378a7055.jpg 모든 상황에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말은 그렇다.


한 분야에서 해볼 실수를 다 해본 사람을 전문가라고 하더군요. 그 정의에 따르면 전 아직 그 타이틀과 거리가 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실수를 저지를 거 같거든요. 하지만 알고 있습니다. 비슷한 상황이 와도, 정직하게 대처하고 최선을 다해 해결해야 뒷일을 도모할 수 있다는 사실을요. 그래야 더 성장할 테고, 성장이 누적되는 만큼 전문가에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요.


전문가 되기 참 힘듭니다. 그죠?

keyword
작가의 이전글니 결론에 내 데이터를 맞추기 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