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가의 가오가 있지(1/2)
일을 하다 보면 별별 일이 다 생깁니다. 지인과의 맥주 한 잔, 잠깐의 산책이나 드라마 한 편에 털어낼 수 있는 일이 있나 하면, 자다가도 생각나거나 뒹굴며 쉬어야 할 주말까지 혈압 올리는 일도 있습니다. 몇 년이 흘러도 마치 어제 겪은 것처럼 선명한 일도 있죠. 대부분 인류애를 소멸시키는 경험들이라 떠올릴 때마다 유쾌하진 않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의문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마감 기한에 쫓겨 당장 주어진 프로젝트를 털어내는 것에만 신경 쓰다 보면 꼭 하나씩 놓치거든요. 당초 예상보다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치르고서 겨우겨우 막아내는 경험을 하다 보면 자괴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거대한 나의 무지함과 마주하면서 겪게 되는 낯선 감정은 덤이죠. 진정 이 길이 정말 나와 맞는 길인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도 이 일을 하다 보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확실히 알겠더군요. 여러 의미에서요.
내 결론에 니 데이터를 맞추세요
제가 처음 의뢰받은 프로젝트는 새로 론칭하는 유산균 제품이었습니다. 의뢰를 받을 땐 좋아서 오케이 사인부터 냈는데 받고 나니 난감해졌습니다. 유산균에 대해서 1도 몰랐거든요. 게다가 상업 프로젝트는 처음인데 이게 감당이 될까. 뒤늦게 걱정이 스멀스멀 밀려왔습니다.
그때만 해도 텍스트 마이닝, 감성 분석이라는 게 막 알려지기 시작한 시점이라 많은 사람들이 그 존재 자체를 몰랐습니다. 제안미팅 나가면 기술 설명하기 바빴으니까요(미팅을 그러면 안 됩니다... 망해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의뢰를 받은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시작부터 묘한 느낌은 받았습니다. 의뢰한 쪽에서 “요즘 얘 잘 나가요.”, “얘 쓰면 좋아할 거예요.” 이런 식으로 특정 모델 얘기를 꺼냈거든요.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듣다 보니 긴가민가 했습니다.
받은 요청은 '소비자 실제 반응을 기반으로 제품의 포지셔닝 전략을 구성해 달라'였습니다. 유산균에 대해 잘 모르기에 정말 열심히 들여다봤던 기억이 납니다. 소비자들이 유산균 구매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가 뭘까.
뽑아보니 '신선하다', '살아있다'에 대한 반응값이 가장 높더군요. 가격 경쟁력이나 사용 편의성 같은 요소에 더 민감할 거라 예상했는데 의외였습니다. 어쨌든 내 몸에 들어가는 '유산균'이니 '신선하게 살아있는 인상'이 중요한 거죠. 떠먹는 요구르트가 신선 포장으로 오는 것과 종이박스에 담겨오는 게 느낌이 다른 것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여기엔 함정이 있습니다. 신선하게 살아있는 유산균을 유지하려면 배송비용이 '많이' 발생합니다. 발생한 배송비용은 가격에 반영되죠. 높은 가격과 신선함은 양가적 관계가 성립합니다. 제아무리 신선하고 살아있는 유산균이라 하더라도 비싸면 곤란합니다. 적절한 가격을 유지하되 '신선하고 살아있다는 인상'을 어떻게 심어주느냐에 고민의 방점을 찍어야 합니다. 제조사와 광고대행사가 함께 머리 쥐어짜야 할 대목이죠.
결과를 보고하는 자리에서 불안감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미리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그.. 데이터 디자인을 좀 해주실 수 있어요?", "아니 이 모델을 쓰려면 그 근거자료가 필요하잖아요.” 그 순간 정말 불쾌했습니다. 직업적 자존심을 무시당한 기분이었거든요.
미리 얘기하면 뭐가 달라지나. 데이터 디자인이란 정체불명의 용어는 또 어디서 듣고 온 건지. 거절하면 다신 이 업체에게 세금계산서 발행할 일은 없을 텐데 어쩌지. 여러 생각이 교차하고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 더해지니 더 불쾌했던 것 같습니다.
소비자의 선택에 광고모델이 미치는 영향은 분명히 있습니다. 다만 제품이나 서비스의 이미지와 광고모델의 이미지가 일치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습니다. 싱크로율이 떨어질수록 그 효과는 반감됩니다. 최근 연구자료를 찾아보니 한국은 광고모델에 비교적 영향을 덜 받는 시장으로 분류가 되더군요. 유명모델에 지불하는 높은 비용을 감안하면 고려해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이 경우는 '광고모델로 누굴 사용할 것인가'가 아니라 '후발주자로서 제품의 시장안착을 위해 가격과 인식의 균형점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에 대한 의사결정이 먼저였습니다. 이 과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말 그대로 헛돈 쓸 가능성이 높은 거죠. 데이터 디자인(?)이란 용어도 웃기지만 명백히 결론을 정해두고 짜 맞추길 요구한 거라 소위 말하는 '마사지'와도 결이 달랐습니다.
저는 제 의견을 말씀드렸고 순식간에 분위기는 냉랭해졌습니다. 의뢰자는 자신들이 원했던 방향으로 캠페인을 진행했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결과는 나쁘지 않았으나 들인 비용이 커서 말이 많았다고 하더군요. 예상대로 그 업체와 다시 일할 기회는 없었지만 마음은 편했습니다. 어긋난 행동은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래도 가오가 있지
벌써 9년이 지난 일이군요. 가끔 그때 일이 떠오르면 쓸데없는 가정도 해봅니다. 만약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 이런 일은 한 번이면 좋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더군요. 이후에도 비슷한 요구를 받은 적이 몇 번 있었거든요. 뒷골이 아리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대체 왜 그러는 건지.
그럴 때마다 처음 그 일을 떠올리면서 거절했습니다. 인생 한 번 살지 여러 번 사는 거 아니니까요. 아마 처음의 선택이 달랐다면 그 뒤의 거절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은 할 만하고 세 번은 쉬운 게 세상 일 아니겠습니까.
본질적으로 데이터 분석가는 숫자를 다루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숫자만 다룬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데이터가 품고 있는 사실과 맥락을 읽어내고, 이를 바탕으로 더 나은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죠. 업에 대한 스스로의 기준과 자존심을 지키려는 의지만 있다면 가능하다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허세라고 하던데 글쎄요. 업에 대한 가오... 아니 낭만 정도로 해두죠.
제가 그만큼 이 일을 좋아하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