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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을 읽어내는 오지라퍼

쓸만한 오지라퍼가 되어야 한다

욕망까지 읽어내야 하는 시대

흔히 소비자의 욕망을 정확히 파악하고 충족시키는 것이 성공의 열쇠라고들 말합니다. 많은 이들이 욕망을 읽어내기 위한 자신만의 열쇠들을 소개합니다. 직업으로만 놓고 보면 그 욕망을 가장 잘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데이터 분석가라는 책도 있고, 진짜 데이터 분석가는 데이터 속에 숨겨진 인간의 욕망을 척척 읽어내야 한다는 영상도 있습니다. 그냥 '숫자를 잘 읽고 다룹니다'그러면 이유 없이 1 패한 그런 느낌마저 듭니다.


시대가 변한 것이겠죠. 수없이 생성되고 나열되는 숫자보다 그 숫자 속에 숨겨진 인간의 욕망을 읽어내는 능력이 우선 요구되는 그런 시대 말입니다. 그래도 분석가 하면 숫자를 다루는 능력이 첫 손에 꼽혀야 한다 생각해 왔는데 요즘은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말하기 어려워졌습니다.

냉장고가 냉장기능 하나로 승부 보던 시절은 지나갔다

저는 가전제품을 보면 그런 생각이 부쩍 듭니다. 마치 분석가들이 처한 처지와 비슷하달까요. 인스타나 뮤비, 광고 보면 파스텔 톤의 이쁘장한 가구 같은 냉장고들이 기본이죠. 흘긋 보면 이게 냉장고인가 싶습니다. 예전의 크고 뭉툭한 하얀 덩어리와는 거리가 멉니다.


단순히 냉장고 판매 데이터만 분석한 게 아니라, 소비자들의 SNS 게시물, 인테리어 관련 검색어 트렌드까지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백색가전에 대한 소비자들의 잠재적 욕구까지 반영한 결과입니다. TV도 그렇고 공기청정기도 그렇고. 기능이든 디자인이든 뭐든 그냥 갖고 싶도록 만드는 거죠.


먹히는 기술 하나만 갖추면 된다던 시절은 확실히 지나간 것 같습니다.

욕망의 해상도를 높여주는 데이터

옛날엔 대규모 설문조사나 FGI(포커스 그룹 인터뷰) 등을 통해 소비자의 욕구를 파악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법들은 상대적으로 비싸고 오래 걸리며, 표본의 한계로 정확도가 떨어지는 단점이 있었죠. 빅데이터가 각광받기 시작하고 데이터 분석기법이 발달하면서 접근법도 많이 바뀌게 됩니다.


실시간으로 수많은 잠재 소비자들의 행동 데이터가 수집되고 누적되기 시작했고, 분석하는 도구도 기존 통계기법 중심에서 AI로 옮겨왔습니다. 마치 144p 이미지가 8K로 바뀌는 것처럼 더 선명하고 상세하게 사람들의 욕망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넷플릭스의 로그 데이터는 양과 질에서 상상을 초월한다


넷플릭스를 살펴볼까요. 수시로 위기가 거론되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OTT시장의 강자죠. 제 예상이 맞다면 앞으로도 잘 나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매일매일 수백에서 수천만의 욕망이 기록되고 누적되고 있거든요.


여기엔 시청 장르나 시간을 넘어 언제 일시정지를 누르는지, 얼마나 이어서 보는지, 어떤 씬에서 뛰어넘고 되감기를 하는지 등의 미세한 행동 데이터까지 모두 포함됩니다. 제공되는 콘텐츠에도 수백 개의 레이블이 붙어있는 초세분화 작업을 해두니 조합되는 로그 데이터의 양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런 거대한 로그 데이터는 시청자들의 복잡한 취향과 욕구를 정의하는데 절대적인 도움을 줍니다. 단순히 지상파, 영화사 등 콘텐츠 업체로부터 관련 영화나 드라마를 사 오기만 하는 것에 멈추지 않습니다.


거액을 들여 '하우스 오브 카드', '갬스래빗', '나르코스'와 같은 자체 오리지널 시리즈를 제작하고 시청자들의 '몰아보기' 패턴까지 계산해서 적절한 영상시간과 횟수를 산출합니다. 최근엔 키즈 콘텐츠의 비중을 늘리고 스포츠에 집중하고 있는 행보를 보면 영리함을 넘어 무섭단 생각까지 듭니다.


수집되는 데이터는 욕망을 더 정교하고 선명하게 보여준다

주변을 살펴보면 이런 사례들은 많습니다. 나이키는 'Nike+ Run Club' 같은 어플을 통해 러너들의 운동 데이터를 수집하고 스티치픽스는 일상의 디지털 흔적을 재료로 개인 스타일링을 추론해 냅니다. 그렇게 수집되는 미세한 욕망은 더 나은 제품과 서비스 개발로 이어집니다. 미처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죠.




오지랖을 부려도 될까

욕망을 정확히 파악했다고 해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 욕망을 어떻게 읽고 충족시킬 것인가, 즉 어떤 해법을 제시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여기서부터 진검승부가 펼쳐진다 보는 편입니다. 재구매는 단순 분석을 넘어 컨설팅으로 확장되는 단계에서 결정되거든요.


airbnb의 사례를 살펴봅시다. airbnb는 기존의 호텔이나 모텔 등의 전문숙박시설이 아닌, 현지의 일반 가정집 소유주가 호스트가 되어 숙박을 제공하는 서비스입니다. airbnb가 별도의 부동산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운영관리비용의 대폭 증가나 고정비의 증가가 거의 없다는 장점이 있는 대신 회사차원에서 서비스 관리가 쉽지 않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매력적이지만 운신의 폭은 매우 좁은 서비스죠.

'특별한 경험을 바란다'를 보고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여느 서비스와 다른 무엇이 필요했습니다. '저렴한 숙박'만으로는 재구매를 장담할 수 없으니까요. 사용자들의 검색 패턴, 예약 행동, 리뷰 내용 분석에 더 집중했고 '특별한 경험'에 대한 요구를 발견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단순히 '특별한 경험'에 대한 요구를 보고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데이터 팀은 'airbnb Trip' 서비스의 기획과 구현 과정 전반에 깊이 관여했고 '경험공유 플랫폼'을 시장에 안착시켰습니다. 데이터 분석가가 비즈니스 전략 수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컨설턴트 역할까지 수행해서 성공한 흔치 않은 사례입니다.


대부분은 '이런 움직임, 요구가 있다'라고 보고하는 수준에서 그칩니다. 나에게 결정권이 없거든요. 순간적이지만 주변의 눈치도 강하게 들어옵니다. '쟤는 뭔데 여기까지 들어오는 거야'라는 본능적 경계라고 할까요. 얼굴에 철판을 깔고 과감하게 '이 욕구를 어떻게 충족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전략적 제안까지 던지시길 권합니다. 많이 엇나간 의견만 아니면 데이터가 받쳐주니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던지는 행위 그 자체가 중요합니다. 그래야 다시 찾습니다. 그렇게 재구매가 생기는 거죠.



무작정 따라 하기와 이거다 싶은 것

답을 도출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무작정 따라 하기'입니다. 성공적인 사례를 그대로 따라 해보는 거죠. 모양새가 살짝 빠지긴 하지만 새로운 기술이나 방법론을 도입할 때 유용합니다. 무엇보다 빠른 시작과 실행이 가능합니다. 이미 검증된 방식이니 실패 위험도 줄일 수 있어 명분 쌓기로는 이만한 게 없습니다.


여기엔 착오와 실패를 재료 삼아 수정하고 적용해 나가는 시간까지 계산에 넣어줘야 합니다. 모 스마트 팜에서 도입했던 에너지 효율화 시스템을 예로 들어볼까요. 비슷한 사례를 참조하여 시스템은 들여왔지만 경험이 없다 보니 작동 프로그램, 데이터 수집 주기, 분석 알고리즘, 센서 위치까지 무작정 따라 했습니다.


초기에는 별 효과를 보지 못해 말이 많았습니다. 운용하면서 설비에 대한 경험이 쌓이고 환경에 맞게 미세하게 조절해 나가면서 점차 효율을 끌어올릴 수 있었습니다. 대략 15%가량 절감했는데 단순 모방이었으면 그 수치 쉽지 않았을 겁니다.


다른 하나는 가설 접근법, '이거다 싶은 것을 정하고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문제에 대한 가설을 세우고, 데이터를 통해 이를 검증하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복잡하고 불확실한 문제를 다룰 때 효과적입니다. 위험부담이 있긴 하지만 보다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입니다.


그들은 어떤 가설을 수립하고 또 검증할까

최근 C-Commerce라고 하죠. 강한 성장세를 보이던 알리, 테무 같은 기업들이 고객 이탈률 증가, 성장 정체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그간은 고객 이탈의 주요 원인으로 '배송 지연'이라는 가설을 세웠고 실제로 배송기간을 줄이면서 괄목할 성장을 이끌어냈습니다. 이제 새로운 가설을 세워할 시점으로 보입니다. 기존 가설의 수명이 다했거든요. 그들이 내부에서 어떤 새로운 가설을 수립하고 어떤 결과를 받을지 무척 흥미롭습니다.




그럭저럭 쓸만한 오지라퍼로

데이터 분석가는 할 일이 많습니다. 능숙한 테크니션에 더해 데이터에 깔린 욕망도 읽어내고, 그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해법까지 제시해줘야 합니다. 부담스럽고 도전적인 과제이지만, 동시에 더 큰 가치와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주변에서 그런 부담을 이겨내고 위대한 오지라퍼로 거듭난 분들을 보면 존경스럽습니다. 그럭저럭 쓸만한 오지라퍼라도 되어야 할 텐데. 아하하.


쓰고 보니 제가 또 걱정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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