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틱 엔지니어링을 아십니까

AI를 활용한 생각의 빌드업

지난 회차에서 고지능 성과자의 노하우는 드러난 한 줄의 대사 아래에 설계된 다섯 줄의 지문에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결과물을 내놓기 전에 맥락을 잘게 쪼개서 인식하고 설계하죠. 이제 우리의 질문은 "그래서 그 다섯 줄의 지문은 어떤 논리로 어떻게 설계해야 하는가?"로 자연스럽게 넘어가야 합니다.


여기에서 '편하게, 하지만 구체적으로 떠올려보세요' 같은 조언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우리의 인지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면서, 동시에 AI에게 고도의 사고 과정을 이식할 수 있는 명확한 방법론이 필요하니까요. 저는 이 방법론을 인간의 언어로 구현할 수 있는 가장 공학적인 영역인 드라마에서 착안해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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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언어로 구현할 수 있는 가장 공학적인 영역


왜 하필 드라마냐.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고도화된 갈등과 해결 과정을 시뮬레이션한 결과물이 드라마이기 때문입니다. 배우가 타인의 삶을 완벽하게 재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기술, 작가가 관객의 심리를 쥐락펴락하기 위해 사용하는 구조를 보면 맥락을 처리하고 최적의 답을 도출하는 알고리즘과 비슷하죠. 가장 인문학적이면서 공학적이고 친숙하기까지 한 방법론입니다.


스타니슬라프스키나 로버트 맥키, 헤밍웨이 같은 거장들의 이론이 Role - Conflict - Hidden Agenda - Constraint - Atmosphere라는 5단계 프레임워크로 구현되었을 때 과연 AI는 어떤 결과물을 내놓을까요.


이름은 드라마틱 엔지니어링(Dramatic Engineering)이라고 지어봤습니다. 괜찮죠?




① 아주 디테일한 관점 :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초목표(Super-Objective)'

많은 사람들이 AI에게 작업을 시킬 때 역할을 부여합니다. '지금부터 너는 마케팅 팀의 팀장이야'라고 지시하면 AI는 마케팅 팀장의 입장에서 연산을 수행한다는 취지죠. 하지만 현대 연기 이론의 창시자인 콘스탄틴 스타니슬라프스키가 AI를 썼다면 조금 다르게 썼을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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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니슬라브스키, 선이 굵은 미남형 할배


스타니슬라프스키는 배우가 배역에 몰입하기 위해 ‘목표’와 ‘초목표’, 주제, 극적행동 개념을 강조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초목표(super-objective)'의 존재입니다. 배역이 일관되게 추구하는 가장 근본적 욕구(초목표)가 정의되어야 하고 이게 배역의 감정과 행동, 선택과 연결되어야 제대로 된 연기라는 거죠. 그게 연결되지 않으면 배우의 연기는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봤습니다.


초목표. 드라마틱 엔지니어링의 관점 설정에 요긴하게 활용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단순히 역할만 주는 게 아니라 이 역할의 세부감정과 행동, 사고 및 선택까지 관통하는 줄기를 세우는 거죠. 즉, 그 역할에서 할법한 사고와 행동을 하나로 묶어버리는 개념입니다. 아래 예시를 볼까요.


"나는 15년 차 온라인 마케터, 팀에선 팀장이다."

"나는 15년 차 온라인 마케터로 팀장을 맡고 있다. HR에 대한 관심이 높아 꾸준히 트렌드를 공부하고 있으며, 팀원들의 성장을 적극 지원해 주려한다."


구글 딥마인드와 스탠퍼드 대학의 연구진이 발표한 '페르소나 기반 프롬프팅이 LLM의 추론 능력에 미치는 영향'이란 연구에선 단순한 역할 부여보다 구체적인 배경 서사와 목표까지 함께 주입했을 때 AI의 문제 해결 정확도가 유의미하게 높아졌습니다. 다른 말로 한 차원 더 디테일한 관점이 설정될 때, AI는 주어진 상황에 더 유효한 전략을 짜낼 가능성이 커진다는 얘기니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초목표 개념은 여기에도 통한다는 얘기가 됩니다.


② 의도한 갈등 : 로버트 맥키의 '간극(The Gap)'

시나리오 작법의 대가 로버트 맥키(Robert McKee)는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책에서 "스토리는 삶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 시작된다"라고 얘기합니다. 주관적인 기대와 객관적인 현실 사이의 괴리가 필요한데 이걸 '간극(The Gap)'이라고 불렀죠. 이 간극이 커질수록 주인공이 풀어야 할 문제도 복잡하고 커집니다. 시나리오가 쫄깃해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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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맥키, 아주 열정적인 양반이다


갈등은 AI에게 바로 그 쫄깃함을 안겨주는 작업입니다. 풀어야 할 문제가 심플하고 작은 상황에선 해결책도 심플하고 작습니다. 이러면 눈에 띄는 결과물을 기대하기 어렵죠. 문제 상황을 풀어쓰되 의도적으로 간극을 부풀려 갈등을 설계합니다. 아래 예시를 볼까요.


"이번 광고 캠페인으로 2030 세대에게 우리 브랜드 인지도를 높여야 한다."

"이번 광고 캠페인으로 2030 세대에게 우리 브랜드 인지도를 높여야 한다. 경쟁사는 아이돌을 모델로 검토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다. 결과는 최소 +5%을 내야 한다. 추가 예산지원은 없다"


창의성은 제약 조건이 강력할수록 이를 우회하거나 돌파하려는 과정에서 발현됩니다. 평범한 상황이 아닌 쉽지 않아 보이는 딜레마를 던져주면 AI는 학습한 데이터를 이리저리 해체하고 연결하며 한 단계씩 나아가는 과정에서 안전한 대답을 포기하죠. 요즘 흔히 언급하는 CoT(사고의 사슬)도 난도 높은 문제를 논리적 단계로 분해하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극대화되는 모델의 잠재력을 활용한 기법입니다.


③ 정말 내가 바라는 것 : 헤밍웨이의 '빙산(Iceberg)'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정보전달 방식에 따라 문화를 고맥락과 저맥락 두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의사소통방식이 명확하고 직설적이며 자기 의사를 말과 문자로 분명히 밝히면 저맥락 문화, 이에 비해 의사전달 방식이 간접적이고, 상황과 분위기, 문맥을 우선시하면 고맥락 문화죠. 고맥락 문화에선 드러난 텍스트보다 텍스트에 가려진 의도를 파악하는 게 중요합니다.


비즈니스 상황에선 고맥락이 절대 유리합니다.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할 수 있거든요. 하지만 저만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닐 겁니다. 고객이나 상사, 부하 직원, 파트너사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죠. 미루어 짐작하되 궁극적으로는 내가 바라는 방향으로 끌고 가야 합니다. 말 그대로 치열한 눈치 싸움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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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로 유명하지만 빙산이론도 유명하다


여기에서 '작가의 위엄은 수면 위에 드러난 1/8로 수면 아래 잠긴 7/8의 움직임을 느끼게 하는데서 나온다.'는 헤밍웨이의 지론을 응용해 봅시다. 1/8엔 드러난 외부의 의도나 나의 상황을, 7/8에 나의 의도나 내가 얻어내야 할 결과를 녹여줍니다. 아래 예시를 보시죠.


"이번 광고 캠페인에 대해 윗선에선 경쟁사처럼 검증된 아이돌을 모델로 사용하길 바라는 눈치다. 그 옵션을 최우선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1/8) 이번 광고 캠페인에 대해 윗선에선 경쟁사처럼 검증된 아이돌을 모델로 사용하길 바라는 눈치다. 그 옵션을 최우선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7/8) 하지만 난 아이돌을 모델로 쓰는데 반대다. 비용대비 효과가 너무 떨어진다. 난 이번 프로젝트를 우리 팀원들이 AI를 사용해서 커버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이번 기회를 통해서 유의미한 수치를 만들어내면 일에도 자신감이 붙을 거다. 나의 의도를 관철시킬 문장이나 표현들을 배치해라."


차이가 보이십니까. 이처럼 내재적 의도와 자연어 발화를 분리하여 처리하는 구조는 가격 흥정과 같은 전략적 협상에서 더 나은 성과를 내도록 하기 위해 고안된 기법으로 'Inner Monologue' 또는 Hidden CoT'라고도 부릅니다. 이 기법을 적용한 AI는 상대방의 기분을 파악하거나, 의도를 간파해서 대응하는 능력이 유의미하게 향상되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죠. 드라마틱 엔지니어링의 도드라지는 차별점이기도 하고요.


④ 제한 :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동의 일치'

2500년 전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이라는 책에서 비극(또는 서사시)이 따라야 할 구조적 원칙으로 '행동의 일치'를 주문했습니다. 이야기의 시작, 중간, 끝이 명확해야 하며, 각 부분이 전체와 필연적인 인과관계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얘기죠. 작품 내에서 일관성 있고 완결된 구조를 가질 것을 강조했는데 이는 후대에 시간의 일치, 장소의 일치가 더해진 삼일치 이론으로 연극이론의 핵심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드라마의 주제, 분량, 형식을 일정 부분 가두고 규격화하는 작업은 극의 완결성을 더해줍니다. 이는 일정 부분 제약을 가하지 않으면 환각에 빠져서 말 그대로 문장을 마구 뿜어내는 AI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아이디어는 개조식으로 서술하라", "확인된 정보만 비교해서 출력하라.", "경쟁사의 관점에서 비판하라."


제약은 사고의 발산을 막고 수렴을 유도합니다. 앤트로픽은 Constitutional AI 연구에서 명확한 제약과 규칙은 모델의 출력을 통제하고 안전성과 유용성을 높이는 핵심 기제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제약은 결과물을 누르는 게 아니라 사고의 밀도를 높여주는 도구입니다. 챙겨가는 게 맞겠죠?


⑤ 분위기 : 미장센(Mise-en-scène)의 기술

마지막 단계는 분위기입니다. 드라마에서 조명, 세트, 공기가 대사의 맛을 바꾸는 것처럼 비즈니스 상황에서도 톤 앤 매너는 무시할 수 없는 요소입니다. 아래 예시를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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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으로 캐릭터를 묘사한다는 느낌으로


"이 광고 캠페인을 1차적으로 승인하는 마케팅 담당 상무는 AI 기술에 대한 이해가 떨어진다. AI에 대해 본인이 약하다 생각하고 언급 자체에 부담을 느낀다. 대면보고가 아닐 가능성도 있으니 가급적 어려운 기술 용어는 사용하지 않고 캠페인을 설명해야 한다."


같은 결과물이라도 이를 받아 들 상대에 대한 배려(혹은 대응전략)의 유무에 따라 반응은 완전히 다를 수 있습니다. 상대방 혹은 내가 처한 시공간적 맥락을 읽고, 메시지가 가장 깊숙이 박힐 수 있는 최적의 분위기를 세팅해 두는 거죠. 현명한 감정적 동물인 인간을 공략하는 전략적 배려입니다.




Dramatic Engineering : AI를 활용한 생각의 빌드업

드라마틱 엔지니어링을 요약하면 그렇습니다. AI에게 스타니슬라프스키처럼 정교한 관점(Role)을 설치하고, 로버트 맥키처럼 해결해야 할 문제에서 의도적으로 갈등(Conflict)을 부풀려 추론 능력을 극대화시키며, 헤밍웨이처럼 나의 의도(Hidden Agenda)를 알리고,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완성도를 더할 제한(Constraint)을 걸어서, 완벽한 분위기(Atmosphere)까지 연출하도록 유도하는 과정입니다. 마치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상황을 주고 해결하게 만드니까요.


Role - Conflict - Hidden Agenda - Constraint - Atmosphere라는 5단계 프레임워크는 사용자가 '내가 처한 상황을 객관화하고 전략을 구체화하는 생각의 빌드업' 입니다. 단순히 AI에게 좋은 답변을 얻어내자고 만들었다기 보다 비즈니스 환경이나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모호한 문제들을 AI를 활용한 전략적 사고로 해결하는 경험의 가치에 더 집중해서 고안했습니다.


난감하고 괴로운 상황에 맞닥뜨리셨나요.

드라마 같은 상황, 한 번 연출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참고자료]

로버트 맥키,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Story)

VERBALIZED SAMPLING: HOW TO MITIGATE MODE COLLAPSE AND UNLOCK LLM DIVERSITY

In-Context Impersonation reveals Large Language Models' Strengths and Biases

Chain-of-Thought Prompting Elicits Reasoning in Large Language Models

Constitutional AI: Harmlessness from AI Feedback

AI Agents Simulate 1,052 Individuals’ Personalities with Impressive Accuracy

AgreeMate: Teaching LLMs to Hag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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