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견고해질 뿐
한국 사회에서 검증된 소수가 된다는 건, 삶의 풍경이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소수가 되기 위해 가장 확실하다고 믿어지는 조건, 바로 학벌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채용할 때 출신 학교를 보는 심리는 단순합니다. 그 사람의 개인적 능력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집단의 퀄리티를 믿는 것이죠. 즉, 한국 사회에서 학벌이란 “이 사람은 성실하게 시스템에 순응하며 치열한 경쟁을 뚫어냈다”는 사실을 인증하는 가장 강력한 신뢰 자산입니다. 단순한 지식 증명서가 아닌거죠.
하지만 이 공고한 자산 시장에 생성형 AI라는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습니다. 실리콘밸리의 기술 낙관론자들이나 유튜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AI로 지식의 접근성이 무한대로 확장되고 지능의 외주화가 가능해졌으니, 이제 학벌 거품은 꺼지고 진정한 능력 위주의 사회가 도래할 것이다."
맞는 말입니다. 실제로 지방대 출신 비전공자라도 AI 에이전트를 능숙하게 다룬다면, 명문대 출신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코딩을 하고 법률 검토를 해낼 수 있으니까요. 기존 신뢰 자산 시장에 거대한 교란종이 등장한 겁니다.
그렇다면, 정말 한국에서 학벌은 붕괴할까요?
일단 기능적 가치는 하락할 것
일단 기능적 측면에서 학벌의 가치는 하락할 겁니다. "이 친구는 S대를 나왔으니 똘똘할 거야. 보고서 하나는 잘 쓰겠지", "P대 출신이면 코딩 기초는 탄탄하겠지" 같은 믿음은 옅어집니다. 지식의 양이나 문제 풀이 로직 그 자체는 인간이 AI를 따라잡을 순 없으니까요. 업무 처리 능력으로서의 학벌 가치는 감가상각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SKY 간판도 소용없겠네?"라고 물으신다면, 저는 단호하게 "아니요"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학벌은 기능적 측면 외에도 문화적 자본이자 사회적 계급을 재생산하는 도구로도 작동하니까요. 기능이 떨어졌다고 해서 그 상징성까지 소멸한다고 보기엔, 한국 사회에 팽배한 욕망의 관성이 너무나 거대합니다. 인간이, 한국 사회가 그렇게 순진한 존재가 아니거든요.
기술이 사회 구조를 일방적으로 결정하진 않습니다. 실리콘밸리의 기술결정론자들이 순진한 거죠.
신뢰 비용과 레거시 본능
우리가 주목해야 할 변수는 신뢰 비용입니다. AI가 보편화될수록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 기획서, 네가 쓴 거야 AI가 쓴 거야?”, “이 결과물, 네 실력이야?” 산출물의 퀄리티가 상향 평준화되어 결과물만으로는 사람을 평가할 수 없는 평균 실종의 시대. 이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 결과물을 가져온 사람의 근본을 확인하려 듭니다. 여기서 학벌은 일종의 보증서로 작동합니다.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인간은 검증된 것(Legacy)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학벌은 오랜 기간 구축되어 왔기에 새로운 정보를 검색할 비용을 줄여주고, 과거의 위기를 뚫고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으로 심리적 안정감을 줍니다.
'그래도 그 학교 출신이면, 적어도 기본 됨됨이나 인맥은 검증된 거 아니겠어?' 불확실성의 시대일수록, 위험을 회피하려는 보수적 심리는 검증된 과거의 트랙 레코드, 학벌이라는 브랜드에 더욱 매달리게 만듭니다. 학교 간판은 능력이 아니라 위험 분산 수단으로써 살아남을 가능성이 큽니다.
짙어지는 관계의 질과 이너서클
AI는 데이터 기반의 효율성, 생산성, 지식 처리에서 인간을 압도합니다. 하지만 감정적 신뢰, 충성심, 그리고 결정적 순간에 위험을 감수하고 돕는 관계는 대체할 수 없습니다. 업무를 대신해 줄 수 있지만, 내 뒤를 봐주거나, 결정적인 순간에 나를 끌어주는 '형님, 동생'이 되어주지는 못한다는 뜻이죠. 여러 인연으로 묶여있는 한국 특유의 비공식적 의사결정 구조에서 필요한 것은 데이터가 아니라 신뢰와 배경입니다.
AI가 효율의 문제를 해결해 간다면 인간은 역설적으로 가장 비효율적이고 감정적인 관계의 밀도에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정치적 행위와 네트워킹의 가치는 그만큼 올라가겠죠. 그리고 한국에서 그 네트워킹의 최상위 포식자는 여전히 학벌입니다. '같은 간판, 같은 캠퍼스'로 공유된 서사는 강력한 정서적 유대감을 형성하며, 결정적인 순간에 밀어주고 끌어주는 실질적인 힘으로 작용합니다.
이쯤 되면 학벌은 검증된 이너서클의 입장권 정도로 재정의 되지 않을까요.
양극화와 학벌의 결합 : '슈퍼 엘리트'의 탄생
제가 가장 걱정되는 지점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양극화에 따른 활용 능력의 확장입니다.
대치동 시스템을 떠올려볼까요. 이 시스템은 경제력과 정보력을 갖춘 계층의 자녀들에게 국영수만 가르치지 않습니다. 입시 전반을 비롯해 삶의 방향을 관장하죠. AI가 산업과 일상에 녹아드는 속도를 감안하면 머지않아 코딩, 데이터 분석, 그리고 AI와 협업하는 프롬프트 엔지니어링까지 사교육의 영역으로 포함될 가능성이 큽니다. 전통적인 엘리트 네트워크인 학벌에 최상위 AI 통제 능력이 결합되면 격차는 돌이킬 수 없이 벌어집니다.
과거에는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었지만, AI 시대에 용이 되려면 방대한 데이터와 컴퓨팅 파워, 그리고 이를 다루는 고급 멘토링이 필요합니다. 이는 철저히 자본의 영역이죠. 결국 방향이 정해진 일종의 이합집산의 모양새가 되는데 좋은 학벌을 가진 집단이 AI까지 능숙히 다루게 되면 그만큼 집단의 폐쇄성은 짙어지게 될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에서 학벌은 무너지지 않을 겁니다. 되려 AI가 불러온 혼란 속에서 서로를 식별하고 끌어주기 위한 가장 안전한 바코드가 될 것이며, 그 카르텔은 더욱 공고해질 거라 생각합니다. 공동체의 역동성이 사라지고 계급이 고착화된다는 예상이니 마음이 가볍진 않군요.
그래도 희망을 가져본다면 본질적으로 AI는 현명하게 질문하는 자의 편이라는 사실입니다. 학벌 카르텔 밖에서, 기상천외한 질문을 던지고 파괴적인 혁신을 만들어내는 아웃라이어들이 많이 등장하길 기원합니다. 이들이 기존 학벌 카르텔에 균열을 낼 수 있을지, 아니면 그 카르텔에 다시 흡수될지. 앞으로 10년, 대한민국 HRD와 사회 변화에서 지켜봐야 할 포인트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요.
이번엔 제 예상이 빗나가면 좋겠군요.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