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3세와 소피아 마그달레나의 스캔들 이야기
스웨덴의 구스타프 3세는 스웨덴의 아돌프 프레드릭 국왕과 그의 부인인 프로이센의 루이제 울리케(스웨덴 식으로는 로비사 울리카)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구스타프 3세가 국왕이 되기 전의 스웨덴은 일명 "자유주의시대"라고 불리던 시대였습니다. 앞선 시대에 정치적 상황때문에 왕권은 약해졌으며 국왕도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할 정도였습니다. 구스타프 3세의 어머니인 로비사 울리카 왕비는 이에 불만을 품고 의회에 대한 쿠데타를 계획할 정도였습니다.
결국 스웨덴의 구스타프 3세는 의회에 대한 쿠데타를 감행해서 왕권을 다시 잡게 됩니다. 하지만 이 상황은 복잡한 정치적 상황으로 발전하는데 이때문에 구스타프 3세는 암살당하게 되죠.
하지만 지금 할 이야기는 구스타프 3세의 쿠데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와 그의 왕비에 얽힌 스캔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 스캔들은 스웨덴 상류사회에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으며 아마도 왕권을 강화하려고 노력하던 국왕에 대해 귀족들이 비웃음을 더하게 되는 계기가 아니었을까합니다.
스웨덴의 구스타프 3세는 왕위에 오르기전 덴마크와의 평화 조약의 일환으로 덴마크 공주인 소피아 마그달레나와 결혼하게 됩니다. 소피아 마그달레나는 스웨덴으로 시집오면서 스웨덴에 중요한 영지를 혼수로 가져왔기에 스웨덴 궁정과 시아버지였던 아돌프 프레드릭 국왕에게 호의적인 대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강한 성격의 시어머니인 로비사 울리카 왕비는 며느리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습니다. 로비사 울리카 왕비는 덴마크 공주보다 자신의 친정쪽 조카를 며느리로 맞고 싶어했기 때문이었죠.
구스타프 3세와 소피아 마그달레나는 결혼 뒤에도 사실상 교류가 거의 없었습니다. 둘은 함께 모습을 보여야할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같이 있지도 않았죠. 게다가 구스타프 3세의 어머니였던 로비사 울리카 왕비는 아들이 며느리와 가까워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것처럼 보일 정도였습니다.
둘의 사이가 소원했기에, 후계자는 당연히 바랄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따로 정부를 둔 것이 아니었음에도 아내와의 관계가 소원했고, 또 다른 국왕들처럼 사생아를 둔 것도 아니었기에 구스타프 3세에 대해서 당대 사람들은 그가 동성연애자일 것이라고 추측했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스웨덴 왕위 계승자에 대한 문제를 야기 시켰죠.
구스타프 3세는 소원한 사이였던 아내와의 사이에서 후계자를 얻는 것을 포기했고, 대신 동생인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을 결혼시켜서 후계자를 얻으려합니다. 하지만 칼 역시 아내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얻지 못하죠. (쇠데르만란드 공작은 결혼전 이미 사생아 아들을 얻었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던 어느날, 결혼 8년만에 왕비가 임신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사실 이 상황은 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와 비슷한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 역시 결혼 7년만에 임신했었죠. 하지만 상황은 좀 미묘하게 달랐는데 프랑스 궁정에서 늘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의 "결혼의 완성"에 대해서 매일 물었던 상황이었으며 아내에게 충실한 남자의 이미지이긴 했지만 침실 문제에서는 루이 16세쪽의 잘못이 컸었기에 루이 16세가 아내인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쩔쩔매는 이미지로 굳어졌었던 것이었죠.
그러나 스웨덴에서는 구스타프 3세는 아내와 소원한 상황이었으며 게다가 이미 그가 동성연애자일거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있었기에 왕비가 임신한 아이가 과연 국왕의 아이인가에 대한 의문이 온 나라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게다가 왕비는 국왕의 시종이었던 문크 백작과 묘한 관계라는 소문도 파다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온 나라에 퍼지게 되는데 이에 국왕의 모후였던 로비사 울리카 왕비가 나서게 됩니다. 그녀는 아들과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구스타프 3세가 어머니의 정치 참여를 가로 막았기 때문이었죠. 모후는 공식적으로 새로 태어난 왕위계승자가 국왕의 아들인지 아닌지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이것은 국왕 부부에게 매우 치욕적인 일이었죠. 국왕이 자신의 아들로 인정한 아이를 모후가 다시 조사하게 한 것이었으니까요.
실상은 사실 더 충격적이었는데, 문크 백작은 당시 왕비의 시녀와 연애관계에 있었습니다. 이런 그를 국왕 부부는 자신들의 "잠자리 선생님"으로 초빙한것이었죠. 문크 백작은 후에 국왕 부부에 대해서 둘다 성적 경험이 별로 없어보였으며 국왕보다 왕비가 성적 호기심이 더 강해보였다고 언급합니다.
결국 조사 결과 새로 태어난 아이는 국왕 부부의 아들이 맞았으며 모후와 왕실 가족들은 의회에 아이가 적법한 왕위계승자라고 인정하기에 이르렀었죠.
하지만 이것은 국왕과 왕비에게 매우 치명적 일이었는데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하던 구스타프에게 이런 스캔들은 왕권을 흠집낼수 있는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었죠. 실제로 국왕이 한 아이없는 귀족부인에게 아이를 갖도록 노력해야한다고 이야기했을때 그녀는 "저는 선생님을 들일만한 처지가 아닙니다."라고 대답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로비사 울리카 왕비에 대해서 국왕 부부는 매우 냉랭한 반응을 보입니다. 구스타프 3세는 죽기 직전에 가서야 어머니와 화해를 하고 다시 만났다고 합니다. 시집온후 평생 시월드에 시달렸던 소피아 마그달레나 왕비는 이후 시어머니와 다시는 말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며 그녀는 그 맹세를 지켰다고 합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