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비사 울리카 왕비와 덴마크의 소피아 마그달레나
로비사 울리카 왕비는 의회가 국왕의 권한을 간섭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습니다. 하지만 의회의 권력은 강했으며 왕비는 쿠데타를 시도할 정도였습니다. 쿠데타는 성공하지 못했고 왕비는 의회에 계속 불만을 가지고 살수 밖에 없었습니다.
스웨덴은 여전히 덴마크와 사이가 나빴으며 자주 전쟁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죠. 그리고 의회는 이런 덴마크와의 평화를 원했기에 덴마크 공주와 스웨덴의 왕위계승자의 혼담을 추진했고 결국 덴마크의 소피아 마그달레나 공주와 스웨덴의 왕태자였던 구스타프(후에 구스타프3세)의 약혼이 성사되죠. 덴마크의 소피아 마그달레나 공주는 덴마크의 국왕 프레드릭 5세와 영국의 조지 2세의 딸인 루이즈 공주의 딸이었습니다.이때문에 소피아 마그달레나의 어머니와 로비사 울리카는 사촌관계이기도 했습니다.(조지1세-조지2세-루이즈 공주.조지 1세-조피 도로테아-로비사 울리카)
하지만 로비사 울리카는 이 결정에 반발합니다. 로비사 울리카는 스웨덴 왕비로써 덴마크를 좋아하지 않았고 사촌의 딸이었음에도 덴마크 공주를 탐탁치 않아했었죠. 또 혼담이 국왕과 자신의 결정이 아니라 의회의 결정이었던 점도 로비사 울리카가 소피아 마그달레나를 탐탁치 않았던 원인이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로비사 울리카는 며느리감으로 정해둔 여성이 있었습니다. 자신과 가장 친한 언니였던 조피 도로테아의 딸인 필리피네를 며느리감으로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늘 그렇듯이 덴마크와 스웨덴의 상황은 나빠졌으며 소피아 마그달레나와 구스타프 사이의 약혼은 깨지게 됩니다. 이때 로비사 울리카는 아마도 이제 자신의 조카를 며느리로 들일수 있을것이라는 희망을 품었을 것입니다. 1760년 다시 소피아 마그달레나와 구스타프 사이의 혼담이 오가게 됩니다. 로비사 울리카는 이를 막기 위해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와 오빠인 프리드리히 대제와의 협상을 추진합니다. 하지만 스웨덴에서는 소피아 마그달레나와의 결혼을 더 좋아했으며 결국 구스타프와 소피아 마그달레나의 결혼이 성사되죠.
소피아 마그달레나는 스웨덴 의회와 국민 그리고 국왕의 환영을 받습니다만 시어머니인 로비사 울리카는 며느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소피아 마그달레나는 매우 얌전하고 신앙심이 깊었으며 수줍음이 많았던 여성으로알려져있습니다. 이런 소피아 마그달레나에 대해서 왕태자인 구스타프는 그다지 매력을 못 느꼈던듯 합니다. 부부는 그다지 친하게 지내지 못했는데, 며느리를 탐탁치 않게 여겼던 로비사 울리카는 아들 부부의 사이가 더 소원해지도록 부추기기까지 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훗날 최악의 스캔들로 인해서 구스타프3세와 소피아 마그달레나가 로비사 울리카와 영영 관계를 단절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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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비사 울리카는 조카인 브란덴부르크-슈베트의 필리피네를 며느리로 들이고 싶어하는 마음이 강했습니다. 장남과 필리피네의 결혼이 물건너 간뒤, 그녀는 필리피네를 둘째아들과 결혼시키고 싶어했죠. 구스타프 3세는 아내와 매우 소원한 사이였으며 이때문에 후계자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후계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생인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을 결혼시키려했는데 이때 로비사 울리카는 조카인 필리피네와 둘째아들인 칼을 결혼시키려 힘썼었죠. 하지만 구스타프 3세는 동생의 아내로 다른 여성을 택하죠. 물론 로비사 울리카는 막내 아들이라도 결혼시키고 싶어했을수도 있습니다만, 막내아들과 필리피네는 나이차가 좀 나서 말입니다.
..결국 조카를 며느리로 맞고 싶었던겁니까-0-;;;;
더하기 두번째
.....아직 글 날린 상황을 회복하지는 못했는데 글을 써야해서 쓰는데 날린글과는 전혀 다른 글이네요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