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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Oct 20. 2015

오스만 술탄 하렘의 프랑스 왕녀

오스만 제국이 유럽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

오스만 제국은 예전부터 기독교 국가였던 프랑스와 중요한 동맹관계였다. 이런 우호관계는 기독교뿐만 아니라 오스만 제국에서도 약간의 거부감을 느끼고 정당성을 부여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16세기부터 프랑스와의 동맹을 정당화하기 위한 여러 이야기가 기록되었고, 유명한 역사기록자들마저 이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프랑스와 오스만 제국과의 관계로 유명한 것은 바로 낙쉬딜(Naksh-i-dil)이다. 그녀는 술탄 무하마드(Muhamad)2세의 어머니인 발리데 술탄으로 술탄의 모후가 정치적 권력을 잡았던 당시 오스만 제국의 풍습에 따라 그녀 역시 아들이 술탄이 되자 권력을 장악했다. 이 여성은 특별히 프랑스에 호의적이었는데 당시 프랑스 대사의 장모는 그녀가 "프랑스인으로 2살 때 알제리에서 잡혔고, 후에 카딘이 되어 술탄의 모후가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여성에 대해서는 후에 나폴레옹의 황후였던 조제핀의 사촌인 에메 뒤비크라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있고 수많은 소설에서 인용되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진짜 조제핀 황후의 사촌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이 남아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프랑스와 오스만 제국 두 곳에서 중요한 정치적 목적-특히 프랑스와 오스만 제국의 동맹관계-를 설명 는데 중요한 점으로 강조되었다. 이 이야기가 언론에 의해서 널리 퍼진 것은 압둘아지즈가 프랑스를 방문해서 나폴레옹 3세를 만났던 시기였다.  이 이야를 통해서 정통성이 약했던 나폴레옹 3세에게는 유럽의 어느 왕가와 뒤지지 않는 가문과 친척관계라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었고, 또 압둘아지즈는 쇠락해가던 제국을 버티게 하기 위해 서양세력을 끌어들일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수 있었다.


술탄 압둘아지즈


프랑스는 제쳐두고, 오스만에서 에메 이야기가 받아들여지게 된 원인은 이미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오스만 제국의 역사에 존재했었기 때문이었다. 에메 이야기의 줄거리는 프랑스의 왕녀가 해적에 납치된 후 술탄의 하렘에 들어가 왕위 계승자를 낳았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리고 이 핵심적인 줄거리는 이미 16세기부터 오스만 제국의 역사에 기록되어있다.


프랑스 왕녀가 술탄의 모후라는 이야기를 처음 기록한 것은 16세기 때였다. 서기였던 세라니키는 후에 연대기식 역사 서술을 남겼다. 정부 관리였던 그는 당시 중요했던 일에 대해서 기록을 남겼는데, 그의 기록 중 메흐멧 2세 때 프랑스 대사가 오스만 궁정에 도착한 이야기는 흥미롭다. 그는 이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주석에 술탄의 모후에 대해서 프랑스 대사가 "우리 민족, 우리 왕녀"라고 표현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 주석이 중요한 이유는 프랑스 대사가 다른 기독교국 대사들보다 훨씬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주석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석을 통해서 프랑스가 다른 기독교 국가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동맹국이라는 이야기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16세기와 17세기를 살았던 이브라힘 페세비는 고위층과 막역한 사이인 관리였으며, 은퇴한 후 역사학자가 되었다. 그는 16세기와 17세기 사이의 오스만 제국과 프랑스의 외교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이 왕녀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무라드 2세 시절 한 프랑스 왕녀가 해적에게 납치되었고, 술탄의 하렘에 들어가 후계자를 낳았다는 것이다. 페세비가 설명한 시기보다 한시기 앞선 때의 이런 설명은 프랑스를 위해 오스만 제국이 함대를 보낸 사실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프랑스 국왕과 술탄이 혈연으로 연결되어있기에 기독교 국가인 프랑스를 위해서 함대를 보냈다는 것이다.


메흐멧 2세, 메흐멧 대제, 콘스탄티노플을 함락 시킨 인물


17세기 오스만의 여행가였던 에브리야 세레비는 이 프랑스 왕녀들의 이야기에 대한 가장 윤색된 버전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앞선 기록과 달리 프랑스 왕녀가 메흐멧 2세의 어머니가 아니라 바예지드의 어머니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에 대한 증거로 자신이 알고 있던 유력한 인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윤색이 지나쳤는데, 메흐멧 2세가 죽은 후 술탄 경쟁에서 바예지드에게 패한 셈(Cem) 역시 이 프랑스 왕녀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렇기에 그가 형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후 기독교 국가로 도망쳤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둘의 어머니는 다르다.)


그리고 또 다른 기록 역시 한 프랑스 왕녀가 납치되었고, 술탄의 궁정에 들어가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은 그만큼 이 이야기가 오스만에 널리 퍼져있었다는 반증이 된다. 하지만 이 프랑스 왕녀가 실제로 존재한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특히 프랑스 측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프랑스는 슐레이만 대제 이후 나온 이 이야기에 대해서 이는 슐레이만 대제의 부인이었던 후렘의 이야기에 큰 영향을 받은 것이라 주장하고, 프랑스 왕녀가 오스만 제국의 하렘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유명한 역사학자나 종교지도자들마저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에 무척이나 충격받았다.


이 이야기의 중요성은 결국 프랑스와 오스만 제국의 동맹에 대한 설명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스만 제국에서 유독 프랑스 대사만이 다른 기독교 국가 대사들보다 높은 지위를 인정받았고, 궁정에서도 높이 평가되었다. 이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는 가장 편안한 방법은 가계의 연결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의 부계는 매우 명확한 것으로 윤색할 여지가 전혀 없었다 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매우 부정확한 모계에 대한 윤색은 매우 잘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술탄의 아들은 어머니의 출신이 어떻든 간에 모두 술탄의 아들로 동등한 왕위 계승권을 부여받아 경쟁했다. 그리고 그 아들이 술탄이 되었을 때 모계에 대한 윤색을 하는데 거리낌 없었다.

재미 난 사실은 앞선 16세기와 17세기에 걸친 이야기에서 언급된 프랑스 왕녀에 대한 무덤 이야기가 낙쉬딜이야기에 똑같이 등장한다.


자료출처

Royal French Women in Ottman Sultan's Harem : The Political Uses of Fabricated Accounts from the sixteenth to the twenty-first century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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