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레의 프리드리히 2세와 베로니카 데세니스카
첼레의 백작 가문은 현재 슬로베니아 지방의 일부를 다스리던 백작 가문으로 14세기 초 성장한 가문으로 특히 14세기 중엽 백작 헤르만 2세 시절 당시 룩셈부르크 가문 출신의 황제 지기스문트와 연합했으며 이런 상황은 가문을 성장시키는 배경이 됩니다. 헤르만 2세의 딸인 바르바라는 지기스문트 황제의 황후가 되었으며 그녀의 딸인 룩셈부르크의 엘리자베트는 오스트리아 공작이자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독일 국왕이었던 알베르트 2세의 아내이기도 했었습니다.
헤르만 2세의 장남이었던 프리드리히는 1379년 태어났으며 그는 기사로써 아버지와 함께 군인으로 여러 전투에 참가했었습니다. 헤르만 2세는 당시 다른 백작들처럼 아들을 정치적인 문제로 정략결혼시키게 됩니다. 1390년대 후반 헤르만 2세는 첼레지방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던 인물의 딸인 엘리자베타 프란코판스카와 아들을 결혼시키기로 합니다. 그리고 1405년 또는 1406년 결혼이 성립되죠. 이 결혼은 신부의 혼수가 엄청났는데 첼레의 중요한 지역은 물론 많은 돈역시 가져왔다고 합니다.
프리드리히와 엘리자베타 사이에서는 두 명의 아이가 태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둘 사이의 불화는 결혼초부터 심했다고 알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프리드리히는 다른 많은 왕족들처럼 정부를 찾아 위안을 얻게 되죠.
베로니카 데세니스카는 다른 많은 중세 여성들처럼 기록이 매우 모호하다고 합니다. 그녀는 주로 하급 귀족 출신이라고 여겨지고 있긴 하지만 명확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아서 그녀의 출생이나 어린 시절 조차도 잘 모른다고 합니다. 단지 프리드리히가 오래도록 아내와 헤어져서 살았으며 그의 아버지가 아내와 함께 살도록 종용했었으며 심지어 그의 아내의 죽음에 대해서 프리드리히의 책임이라고 주장하는 이야기가 있는 걸로 봐서 오래도록 베로니카와 프리드리히가 함께 살았다고 추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프리드리히의 아내인 엘리자베트는 1422년이나 1423년경 갑작스럽게 사망하게 됩니다. 정치적 문제 때문에 헤르만 2세는 아들 부부가 다시 함께 살길 원했는데, 이 직후 엘리자베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몇몇 이야기에서는 프리드리히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서 아내를 독살하려 했었다는 소문도 파다하게 퍼져있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프리드리히는 아내가 죽은 뒤 베로니카 데세니스카와 비밀리에 결혼했을듯합니다. 그에게는 후계자가 될 아들이 있었으며, 아내는 이미 죽었으며 또 통치지역에서의 힘도 어느 정도 길렀기에 아버지의 뜻에 반하는 결혼을 감행할 수 있었던듯합니다. 하지만 이 상황에 대해서 헤르만은 매우 크게 진노하게 됩니다. 헤르만은 아들과 베로니카 데세니스카를 잡아오게 하죠. 헤르만은 아들 프리드리히를 감옥에 가뒀으며 베로니카에 대한 "마녀재판"을 진행하게 합니다. 그녀가 아들을 마법으로 유혹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슬로베니아에서 진행된 첫 마녀재판이었다는 이 재판에서 베로니카는 백작에게 맞서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으며 자신의 주장을 성공적으로 관철시킬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헤르만 2세는 베로니카를 살해하라고 명령했으며 1425년 베로니카 데세니스카는 욕조에서 살해당하게 됩니다. 아마도 헤르만 2세가 강경하게 나갔던 가장 큰 원인은 며느리 엘리자베트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이었을듯합니다. 실제로 엘리자베트의 친정식구들은 후에 황제에게 프리드리히가 엘리자베트를 살해했다고 호소할 정도였으며 이런 것은 당연히 정치적 문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런 강경한 정책을 썼을듯합니다.
프리드리히는 베로니카가 죽은 뒤에도 감옥에 갇혀있었습니다만 오래도록 갇혀있지는 않았습니다. 프리드리히의 동생인 헤르만이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결국 헤르만 2세에게 남은 후계자가 될 인물은 프리드리히와 프리드리히의 아들인 손자 울리히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죠.
프리드리히는 한동안 추방당했으며 아마도 아버지와 오래도록 불화하게 됩니다. 프리드리히와 헤르만의 불화는 단순한 여자 문제를 넘어서 첼레의 통치 문제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더 오래도록 불화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첼레 백작 부자 간의 불화는 매우 유명해서 후에 바이에른의 알브레히트 3세와 그의 아버지인 에른스트 공작이 아그네스 베르나우어 때문에 불화했을 때도 화해를 위해 이들의 이야기가 언급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슬로베니아에서 베로니카 데세니스카의 비극적 사랑이야기는 첼레 백작 가문의 몰락과 맞물려 매우 널리 알려진 이야기라고 합니다. 첼레 백작 가문은 결국 프리드리히와 엘리자베트의 아들인 울리히가 마지막 백작으로 가문의 남성 직계가 단절되게 됩니다. 울리히는 헝가리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지만 결국 후계자 없이 살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슬로베니아의 제일 권위 있는 문학상중 하나인 "베로니카 상"은 이 베로니카 데세니스카의 이름을 딴것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녀에 대한 오페라나 극작품도 존재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