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지레 클라리 : 스웨덴의 데시데리아 왕비(7)

스웨덴의 왕비

by 엘아라

1818년 스웨덴의 국왕인 칼 13세가 사망하고 그녀의 남편이 칼 14세 요한으로 즉위합니다. 이로써 데지레도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왕비가 되죠. 하지만 데지레는 여전히 스웨덴으로 가는 것을 주저합니다. 언니 쥘리나 다른 사람들이 함께 갈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불행히도 스웨덴에서는 반 나폴레옹 분위기가 강했기에 보나파르트 가문 사람인 언니 쥘리를 데리고 갈 수가 없었죠.




173E133D50DD842119F991 스웨덴의 칼 14세 요한의 즉위식



데지레는 여전히 파리에서 있었지만 데지레의 주변 사람들은 많이 바뀌게 됩니다. 먼저 보나파르트 가문 친척들과 친구들은 더 이상 데지레와 함께할 수 없었습니다. 또 나폴레옹 주변의 많은 사람들 역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 대신 데지레의 주변은 새로운 사람들이 채워졌습니다. 왕정이 복고된 후 돌아온 프랑스 귀족들과 영국 등 외교관 부인들이 그들이었죠. 특히 영국 대사의 아내였던 레이디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와 데지레는 무척 친한 사이가 되었고 데지레는 자주 영국 대사관을 방문하곤 했었다고 합니다.

물론 데지레의 오랜 친구들도 남아있긴 했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마담 르카미에였죠.


데지레가 프랑스에 있는 동안 데지레는 한 남자와의 스캔들에 휘말리게 됩니다. 그는 5대 리슐리외 공작이었던 아르망-엠마누엘 드 비뉴롯 뒤 플레지였습니다. 그는 구 귀족 출신으로 혁명이 일어나자 망명생활을 했었으며 왕정이 복고된 뒤에는 루이 18세의 각료로 일하고 있었죠. 데지레가 언니 쥘리를 프랑스로 돌아오게 해 달라고 청원을 했는데, 루이 18세는 스웨덴의 왕비의 청원을 소홀히 할 수 없었기에 장관인 그를 보내서 해명하게 했죠. 구 귀족 출신으로 우아한 매너와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었던 리슐리외 공작에 대해서 데지레는 무척이나 호감을 갖게 됩니다. 그녀는 늘 다른 사람의 눈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었는데 그를 만난 뒤에도 자신의 신분을 생각하지 않고 그에게 과도하게 관심을 보였습니다. 데지레는 리슐리외 공작이 있는 곳에 자주 나타났으며 그가 다른 곳으로 가면 대화하던 것을 멈추고 그가 어디로 가는지 지켜볼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초상화가 담긴 미니어처를 주문할 정도였죠.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데지레와 그가 심각한 연애관계였다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데지레가 스웨덴으로 돌아가는 시기는 리슐리외 공작이 죽은 뒤였기도 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또 다른 자료에서는 데지레의 성품상 "철없이 행동"하긴 했지만 리슐리외 공작과는 그다지 깊은 관계가 아니었으며, 쥘리와의 이야기에서 잠시 연결될 뿐 이후에는 둘이 서로 만난 적도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기도 합니다.




206A6F4450DD84532BDE78 아르망 엠마누엘 드 비뉴롯 뒤 플레지, 5대 리슐리외 공작



데지레가 스웨덴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게 된 것은 아들인 오르카르 때문이었습니다. 스웨덴에서 자라서 스웨덴인으로 성장한 오스카르는 이제 성인이 되었으며 신붓감을 구하러 다니고 있었죠. 늘 사랑했던 아들을 보게 된 데지레는 이제 자신에게 불친절할 궁정 시어른들이 없는 스웨덴으로 돌아가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했을듯합니다. 그리고 며느리가 될 로이히텐베르크의 조제핀(후에 요세피나 왕비)과 함께 스웨덴으로 돌아가게 되죠.




1208814550DD849112CB7E 로이히텐베르크의 조제핀, 스웨덴의 요세피나 왕비



데지레는 이번에 스웨덴으로 돌아가면서 첫 번째와는 매우 다른 인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며느리와 함께 여름에 가게 되었는데, 이전에 음침했던 날씨와는 달리 매우 밝은 분위기였기 때문에 데지레가 좀 더 편안함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데지레가 스웨덴으로 돌아오면서 스웨덴 궁정은 많이 바뀌게 됩니다. 당시 궁정에는 왕실 여성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스웨덴 궁정은 "군인들로만 이뤄진 참모 회의"같은 분위기가 강했다고 합니다. 칼 14세 요한은 선왕의 정부였던 마리아나 코스쿨을 자신의 정부로 받아들이긴 했지만 그가 그녀를 받아들인 것은 아내의 부재와 정치적 목적 때문이었으리라 추정됩니다. 이 때문에 왕비와 왕태자비가 돌아온 스웨덴 궁정은 구스타프 3세 이후 가장 활기찬 모습을 보였다고도 합니다.




263C164050DD834D0A2235 스웨덴의 데시데리아 왕비



이제 스웨덴에서는 "데시데리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데지레를 위해 칼 14세 요한은 1829년 왕비의 대관식을 따로 열게 됩니다. 전통적으로 스웨덴은 국왕이 대관할 때 왕비가 함께 대관했었는데 데지레는 남편이 대관할 때 스웨덴에 없었죠. 그리고 데지레가 평민 출신이었다는 것 역시 대관식을 열게 되는 정치적 이유였을 듯합니다.



145E954950DD84B6049287 스웨덴의 데시데리아 왕비의 대관식



칼 요한과 데지레는 스웨덴에서 적당히 평온한 삶을 살게 됩니다. 하지만 데지레는 곧 스웨덴에서의 삶에 지쳐가게 됩니. 마르세유 출신으로 주변의 많은 아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했던 성격이었던 데지레는 스웨덴의 기후에 여전히 힘들어했으며, 또한 여전히 스웨덴어를 못했기에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아주 친밀해지지 않고 거리감을 느끼는 것 역시 힘들어했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데지레는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길 바라게 됩니다. 실제로 데지레는 스웨덴으로 떠나 올 때 프랑스에 있던 자신의 집과 사업체 모두를 그대로 두고 왔었습니다. 언니와 조카에게 모든 것을 그대로 유지하게 뒀었죠. 언제든지 스웨덴에서 돌아올 수 있게 말입니다. 하지만 칼 14세 요한은 데지레가 스웨을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결국 데지레는 스웨덴에서 계속 머물게 되죠.


데지레는 궁정에서 자신의 살롱이 있었으며 그곳에서 측근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녀는 스웨덴어를 몰랐기 때문에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한정되어있었습니다만 당시 유럽 귀족들은 교양어로 프랑스어를 대부분 할 줄 알았기 때문에 데지레가 주로 만나는 사람들과는 크게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언어의 장벽과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오랜 부재등등은 데지레가 스웨덴에서 아주 인기 있는 왕비가 되지 못하게 했었습니다.



1513934C50DD84EC03687A 칼 14세 요한과 데시데리아 왕비 그리고 둘의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들



데지레의 남편인 칼 14세 요한은 1844년 81살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그리고 아들인 오스칼이 스웨덴의 국왕 오스카르 1세로 즉위합니다. 오스카르 1세는 어머니가 살던 그대로 계속 살도록 지원을 해줬습니다. 데지레는 이제 국왕의 아내인 왕비가 아니라 국왕의 어머니였기 때문에 궁정을 크게 꾸릴 필요가 없었습니다만, 그녀는 젊은 시절부터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마다하지 않았고 그 결과 자신의 궁정에 남아있고 싶어 하는 사람 모두를 그대로 뒀었습니다. 또 과부로써 자선사업에 열성을 쏟았는데 특히 소녀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는 등의 일을 했었다고 합니다.


데지레는 남편이 죽은 뒤 점점 기이한 행동을 했다고 합니다. 특히 그녀는 밤낮이 뒤바껴서 생활했는데 늘 한밤중에 다녔고 아침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고 합니다. 또 손자 손녀들을 무척이나 사랑해서 손자 손녀들과 늘 대화하길 좋아했고 이 때문에 오스카르 1세의 자녀들은 스웨덴어보다 프랑스어를 먼저 배웠다고 합니다.


데지레는 아들이 죽은 1년 뒤인 1860년 사망하게 됩니다.


데지레는 비록 야망의 남자들인 나폴레옹이나 칼 14세 요한과 엮였지만, 평생 정치에 관심이 없었으며 주변의 다른 사람들을 돕고 화목하게 지내는 것을 더 좋아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은 그녀의 행동이 자주 "철없는 행동"처럼 보기도 했었습니다.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에 남편에게 도움이 안된다거나 왕위 계승자의 부인이었으면서도 남편곁에 머물지 않고 떠나온다던가 하는 일은 당대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많은 이들이 데지레에 대해서 평생 "왕족"이 아니라 "상인의 딸"로써 행동했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죠. 그러나 이런 상황은 어쩌면 프랑스 대혁명기에 자라난 평민의 딸인 데지레가 할 수는 최선의 행동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프랑스 대혁명은 이전 지배계층에 대한 거부감을 사람들에게 자리 잡게 했고 이런 것들은 귀족이나 왕족들의 행동양식에 대한 거부감으로 발전했었습니다. 비록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 뒤에 옛 관습들을 부활시키려 했다고는 하지만 평생 "자유"에 대해서 이야기 듣고 자란 데지레가 왕족들의 관습에 대해서 별 신경 쓰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 있을 것입니다.


베르나르딘 외제니 데지레 클라리는 스스로 정치적 야망을 가진 여성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만났고, 그의 동생인 나폴레옹과 만났으며 결국 그녀의 남편이자 스웨덴의 국왕이 되는 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만남들은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게 만들었으며 결국 이것은 그녀의 삶이 드라마틱해지는 원인이 되었을 듯합니다.


그녀의 남편인 베르나도트가 많은 이들을 만나면서 자신의 야망을 키워간 반면 데지레는 늘 같은 캐릭터였죠.

어쩌면 한때 열렬한 공화주의자였다고 알려졌던 남편 베르나도트보다 사실상 데지레가 훨씬 더 대혁명의 "자유"에 대해서 실천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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