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의 데시데리아 왕비
프랑스 대혁명이후, 나폴레옹이 들어서던 시대, 많은 사람들이 신분때문에 오를수 없었던 지위로 올라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군인들의 상당수가 능력으로 장군이 되고 원수가 되고 심지어는 군주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이런 군인들의 아내들 역시 남편의 지위에 따라 갑작스럽게 지위가 변화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 한 여인이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녀를 "외제니"라고 불렀고, 베르나도트는 그녀를 "데지레"라고 불렀으며 스웨덴에서는 "데시데리아"라고 불렸던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바로 외제니 베르나르딘 데지레 클라리로, 한때 나폴레옹의 약혼녀였으며 후에는 베르나도트 장군의 아내로 결국 스웨덴의 왕비가 되는 여성이었죠.
데지레가 태어났을때 그녀는 서양속담대로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라고 이야기 할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마르세유에서 매우 성공한 상인이었으며 언니들은 귀족가문이나 부유한 상인들과 결혼했었죠. 데지레 역시 상속녀였으며 이런 재산은 그녀가 훗날에 평온한 상류층 삶을 살게 했을 것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데지레는 한 가문을 알게 됩니다. 바로 보나파르트 가문이었죠. 데지레의 언니인 쥘리는 보나파르트가문의 장남인 조제프와 결혼했고, 데지레는 나폴레옹과의 미래를 꿈꾸게 되죠. 데지레는 부잣집의 철없는 막내딸로 보이긴했지만 대신 구김없는 밝은 성품이었고 이런 성품은 좌절에 빠졌던 나폴레옹에게 위안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야망많은 남자였던 나폴레옹에게 철없고 가족들과 평온하게 사는 것만이 최고의 관심사였던 외제니는 맞지 않는 여성이었고 결국 나폴레옹은 자신의 영원한 사랑이 될 조제핀 드 보아르네와 만나서 결혼해버립니다.
나폴레옹과의 약혼이 깨진뒤 이제 그녀는 나폴레옹의 외제니가 아닌 조제프 보나파르트의 처제인 데지레 클라리로 알려지게 됩니다. 나폴레옹의 정치적 위상이 커질수록 데지레의 정치적 가치도 올라가게 되죠. 나폴레옹 주변의 장군들은 나폴레옹과 인척관계가 되기 위해 다투어 데지레에게 청혼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녀가 선택한 인물은 바로 "나폴레옹과 대적할만한 인물"이라고 평가를 받았던 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였습니다. 사실 이 결혼을 주선한 것도 보나파르트 가문 사람들로 그들은 완전히 나폴레옹 사람이 아니었던 베르나도트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결혼을 주선한 것이었죠.
베르나도트 장군과 결혼해서 "마담 베르나도트"가 된 데지레는 이제 남편과 평온한 삶을 원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삶은 이뤄지지 않죠. 왜냐면 그녀의 남편은 장군이었고 전쟁은 점차 더 확대되고 있었습니다. 정치에 무관심했던 데지레는 남편과 자신의 가족들인 보나파르트 가문 사람들이 사이좋게 지내길 바랍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보나파르트 가문 사람들은 베르나도트를 좋아했었습니다. 단 한사람만 빼구요. 바로 나폴레옹이었죠. 정치적으로 민감한 나폴레옹과 베르나도트는 서로를 껄끄러워하는 사이였습니다. 둘의 사이가 더 심각하게 나아가지 않았던 것은 바로 데지레가 베르나도트와 결혼했기 때문이었죠. 나폴레옹의 약점은 가족이었으며 데지레는 그의 가족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가족들은 베르나도트를 다 좋아했는데 누이들은 베르나도트를 오빠처럼 생각했고, 나폴레옹의 가장 똑똑한 동생이었던 뤼시엥은 베르나도트를 늘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조제프 역시 처제의 남편이었던 베르나도트에게 호의적이었죠.
결국 데지레는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남편과 나폴레옹 사이를 중재하는 입장이 되었으며 이런 상황은 상대적으로 약자였던 베르나도트에게 유리한 입장을 만들었었습니다.
그리고 1810년 베르나도트는 스웨덴의 왕위계승자로 선출됩니다. 나폴레옹은 스웨덴이 베르나도트를 왕위계승자로 원한다는 것을 알았을때 당연히 호의적이지 않았다고 합니다만 어쨌든 스웨덴은 베르나도트를 왕위계승자로 선출했었습니다.
이제 스웨덴의 왕위계승자 칼 요한이 된 남편을 따라 데지레 역시 스웨덴의 "데시데리아 왕태자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그리고 남편을 따라 스웨덴으로 가게 됩니다. 하지만 스웨덴에서의 삶은 데지레에게 너무 힘든 것이었습니다. 스웨덴은 칼 요한의 능력을 보고 그를 왕위계승자로 뽑은 것이었지만, 데지레를 뽑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베르나도트 역시 스스로 왕위계승자가 되길 원했지만 데지레는 그것을 원한 것이 아니었죠. 데지레는 이전에 폰테 코르보 공비였지만, 그녀는 궁정을 이끌지도 않았고 프랑스 상류층 여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살롱을 연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런 그녀에게 오래된 왕가의 궁정에서의 삶은 힘든것이었죠. 게다가 왕가의 사람들이 보기에 데지레는 그저 평민출신의 외국인 여성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데지레가 스웨덴에서 짐싸서 프랑스로 돌아가버리는 원인을 만들었습니다.
프랑스에서 데지레는 가족들과 평온하게 살고 싶어했습니다만, 정치 상황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패배이후, 유럽의 대부분은 프랑스와 적대국이 되었는데 데지레의 조국이 된 스웨덴도 포함되어있었습니다. 그녀의 남편인 칼 요한은 스웨덴의 국익을 위해 자신의 모국인 프랑스와의 전쟁을 선택했죠. 데지레는 프랑스에서 고립되었으며 비슷한 처지였던 제롬 보나파르트의 부인인 카타리나와 함께 서로에게 의지를 했었다고 합니다.
데지레는 오래도록 스웨덴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남편이 노르웨이를 합병하고, 남편이 스웨덴의 국왕 칼 14세 요한이 된 뒤에도 돌아가지 않았죠. 하지만 결국 데지레는 며느리인 로이히텐베르크의 조제핀과 함께 스웨덴으로 돌아갔습니다.
스웨덴으로 돌아간 데지레는 스웨덴의 왕비로 공식 대관을 했으며 데시데리아 왕비로 살아가게 됩니다만 그녀는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길 바라게 되죠. 스웨덴어를 거의 하지 못했던 데시데리아는 스웨덴을 완전히 편안하게 느끼지는 못했던 듯합니다. 하지만 데시데리아 왕비는 결국 스웨덴에서 남은 여생을 살다가 사망했습니다.
현 스웨덴의 제1왕위계승자인 빅토리아 공주의 세례명은 "빅토리아 잉리드 알리스 데시레"입니다. 여기서 데시레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것은 바로 현 스웨덴 왕가가 이 데시데리아 왕비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더하기
스웨덴의 빅토리아 공주의 이름중 빅토리아라는 이름은 공주의 선조중 두명의 Queen의 이름을 딴것입니다. 한명은 스웨덴의 왕비였던 바덴의 빅토리아이고 또다른 한명은 유명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입니다. 바덴의 빅토리아 왕비는 구스타프 5세의 왕비로 빅토리아 공주는 빅토리아 왕비의 직계후손입니다.(바덴의 빅토리아->구스타프6세 아돌프->구스타프 아돌프->칼 16세 구스타프->빅토리아). 또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였던 코넛의 마거릿이 공주의 증조할머니이기에 빅토리아 여왕 역시 선조가 되죠.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코넛 공작 아서->코넛의 마거릿->구스타프 아돌프->칼 16세 구스타프->빅토리아) 물론 할머니인 시빌라 왕자비 역시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이기도 합니다.(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알바니 공작 레오폴드->작센-코부르크-고타의 칼 에두아르트->작센-코부르크-고타의 시빌라->칼 16세 구스타프->빅토리아)
빅토리아 공주의 이름중 잉리드는 아버지의 고모였던 덴마크의 잉리드 왕비의 이름을 딴것입니다. 알리스는 외할머니이름을 딴것이구요.
데시레는 아마도 데시데리아 왕비의 이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긴 하지만 고모인 데시레 공주의 이름을 딴것이기도 할겁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