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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립을 위해서라면 스웨덴 공주라도 거절해야..

2차 대전중 스웨덴의 상황 : 매르타

by 엘아라

세계 2차대전이 시작되면서 스웨덴은 1차대전때와 마찬가지로 "중립"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북유럽의 다른 국가들과 긴밀한 협조를 하기로 했습니다. 사실 노르웨이나 덴마크 왕가와는 이미 결혼관계로 맺어진 관계였는데 덴마크의 왕태자비는 스웨덴의 국왕 구스타프 5세의 손녀였으며, 노르웨이의 왕태자비는 구스타프 5세의 조카였습니다.


스웨덴 내에서는 이런 중립 노선을 국민 대부분이 지지하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2차대전중 핀란드문제에서도 적용이 되는데 핀란드와 소련이 전쟁을 하게 되자, 소련의 영향력이 확대될것을 우려했으며 핀란드는 같은 문화권의 나라인 북유럽 국가들에게 도움을 청하게 됩니다. 하지만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은 중립을 취하기로 결정했기에 핀란드를 직접적으로 돕길 거부했었을 정도입니다. (대신 "의용병"의 참전은 허락했기에 북유럽의 각지역에서 핀란드를 지원하기 위한 의용군들이 핀란드로 떠났었고 스웨덴 정부는 이를 반대하지 않았었습니다.)


Swedish_soldier_during_ww2.JPG 2차 대전중 스웨덴 병사


하지만 곧 독일은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하게 됩니다. 덴마크는 손쉽게 점령당했으며 노르웨이는 영국등의 지원을 받았지만 얼마 버티지 못하고 독일에 점령당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스웨덴은 여전히 중립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긴 했지만 독일의 압력을 받아들여서 스웨덴을 거쳐 노르웨이로 물자를 수송하는 것을 허락해야만했습니다. 사실 이 시기 스웨덴은 독일에 철광석을 팔았으며, 이 철광석은 독일의 군수물자를 제조하는데 쓰이게 되었습니다. 이때문에 전후 스웨덴은 중립국이 아니라 독일에 협력한것이었다는 식의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스웨덴은 어떻게든 중립을 유지하려했었으며 결국 이것은 노르웨이의 왕태자비이자 스웨덴의 공주였던 매르타의 상황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오스카르 2세의 손녀이자 국왕 구스타프 5세의 조카였던 매르타는 1929년 사촌이자 노르웨이의 왕태자였던 올라프와 결혼했습니다. 올라프의 아버지와 매르타의 어머니가 남매간이었기에 사촌간이었습니다. 둘은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 만나서 사랑에 빠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둘의 결혼은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사항이었는데 노르웨이가 스웨덴에서 독립한뒤 스웨덴과 노르웨이 사이는 좀 껄끄러운 상황이었는데 두 나라의 왕가가 혼담으로 엮이면서 두 나라간의 사이가 좀더 원만해지는 결과를 낳았었습니다.


Norges_Kronprinspar_OB.F04664.jpg 매르타와 올라프의 결혼사진


1940년 노르웨이가 함락당한뒤 노르웨이의 국왕인 호콘 7세와 그의 아들이자 매르타의 남편인 올라프는 영국으로 망명해서 망명정부를 수립한뒤 독일에 대항하게 됩니다. 이 상황에서 매르타와 세아이들은 영국으로 가지 않고 친정인 스웨덴으로 돌아가려했었습니다. 당시 영국은 유럽 대륙의 여러 나라 왕가의 망명 정부 수립은 허용했지만 가족들이 함께 있는 것은 원치 않았었습니다. 이때문에 그리스나 네덜란드 등 망명을 한 다른 나라 왕가의 사람들도 수장인 국왕과 그 후계자 외에는 영국에 들어올수 없었습니다.

이때문에 아마도 매르타는 고향인 스웨덴으로 돌아가길 원했었습니다만, 이 상황은 스웨덴 내에서 반대여론을 조성하게 만듭니다. 스웨덴은 "중립"을 원했는데 매르타를 받아들이는 것은 스웨덴의 중립성을 훼손한다는 것이었죠. 몇몇 사람들 특히 친독일파 사람들은 매르타가 독일의 제안을 수용해서 매르타의 세살난 아들인 하랄을 노르웨이 국왕으로 선포하도록 해야한다고 주장하기도했었습니다. 하지만 매르타는 이런 상황을 받아들일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망명정부를 구성하고 있었는데 아들이 국왕이 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였죠.


576px-Kronprinsfamilien_ved_Prins_Haralds_d%C3%A5p%2C_31._mars_1937.jpg 올라프와 매르타 그리고 둘의 세 아이들. 1937년


매르타는 스웨덴에 있을수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됩니다. 이런 매르타를 구해준 사람이 바로 미국의 대통령인 루즈벨트였습니다. 매르타와 올라프는 전쟁 직전 미국을 방문했고, 미국 대통령 부부와 친분을 쌓게 되죠. 결국 루즈벨트는 매르타를 위해 미국 전함을 보냈으며(그때까지 미국 역시 참전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매르타는 아이들과 함께 이 전함을 타고 미국으로 갔었습니다.


매르타가 떠나면서 스웨덴의 중립이 지켜지게 됩니다만, 사람들은 이제 독일의 압력에 대해서 점차 거부감을 느끼게 됩니다. 스웨덴은 중립을 유지해야했지만 많은 사항에서 독일의 압력에 굴복하게 되었으며, 매르타가 떠나는것 역시 이런 상황중 하나로 여기게 됩니다. 스웨덴의 공주인 매르타가 스웨덴에 머물수 없었던 상황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 역시 있었던 것이죠.


시간이 지나면서 스웨덴의 무장상태가 좋아지고, 또 독일이 전선이 점차 확대되면서 스웨덴은 독일의 압력에서 벗어나 좀더 중립적으로 될수 있었습니다.


593px-Gustav_V%2C_crown_prince_Gustav_Adolf_and_prince_Bertil.jpg 1943년 국왕 구스타프 5세, 왕태자 구스타프 아돌프 그리고 국왕의 손자인 벨틸 왕자


더하기

매르타는 미국으로 가서 미국의 참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녀는 미국에서 노르웨이를 위해 많은 일들을 했으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영향력을 행사했고 결과적으로 미국의 전쟁참전 여론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HMS_Norfolk_King_Hakkon.jpg 전쟁후 노르웨이로 귀환중인 노르웨이 왕실 가족들



자료출처

1.북유럽사 (변광수,2006,대한교과서주식회사)

2.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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