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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케 베르나도트와 화이트 버스

2차 대전중 중립국 스웨덴의 역할

by 엘아라

비스보리 백작 폴케 베르나도트는 스웨덴 왕가의 방계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오스카르 2세의 아들인 오스카르 왕자였지만 그의 어머니는 귀족출신이었던 에바 문크였습니다. 이때문에 폴케 베르나도트는 태어날때 스웨덴의 왕위계승권을 가지지는 못했으며, 룩셈부르크 대공가에서 수여한 지위인 "비스보리 백작"지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스웨덴 왕가의 방계 가문으로 활발한 활동을 했는데 특히 그는 스웨덴 내에서 스카웃 활동에 열성을 다 했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그리고 폴케 베르나도트는 전쟁중 스웨덴 적십자사 부총재의 지위에 있었습니다.


Folke-Bernadotte.jpg 폴케 베르나도트,비스보리 백작, 구스타프 5세의 조카


적십자와 관련된 업무를 수행하던 폴케 베르나도트는 2차 대전중 스웨덴에 매우 중요하고 의미있는 작전 하나를 수행하게 됩니다. 일명 "화이트 버스(작전)(Vita bussarna)"라고 불리는 작전이었습니다.


2차대전이 시작되면서 북유럽 국가들은 "중립"을 선언했었습니다. 하지만 노르웨이와 덴마크는 독일에 점령당했고 스웨덴만이 겨우 중립을 유지할수 있었습니다. 이때 노르웨이는 왕가가 모두 망명한 상황으로 런던에서 망명정부를 설립했었습니다. 덴마크의 경우에는 그대로 독일에 점령당했으며 덴마크 왕가 사람들은 덴마크에 억류되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독일내 북유럽 국가들의 포로들이 증가하는 계기가 됩니다. 특히 노르웨이는 전쟁포로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독일의 수용소에 끌려가있는 상황이었으며 레지스탕스 활동이 증가하면서 그 인원이 더 증가하고 있었습니다. 덴마크 역시 독일에 저항 운동을 하던 인물들이 체포되는 것은 물론, 덴마크내 유대인들 역시 끌려가게 됩니다.


전쟁이 끝을 향해 치닫고 있을 무렵 독일 수용소들의 열악한 사정을 알게 된 많은 사람들이 독일내 북유럽 국가 사람들을 되돌아오게 하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노르웨이측 인물들은 중립국인 스웨덴에 협상을 진행하도록 바라게 됩니다. 물론 초기에 스웨덴은 정치적 문제 때문이 에에 대해서 거절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1944년 전황이 독일쪽에 불리해지고 있었고 독일내 수용소들의 상황이 더 악화되고 있었기에 이에 대해서 스웨덴 정부가 심각하게 고려하게 됩니다. 그리고 노르웨이측 인물들은 이런 스웨덴 정부에 좀더 영향력을 행사 할수 있는 인물과 접촉하게 됩니다. 바로 스웨덴 적십자사 부총재였던 비스보리 백작 폴케 베르나도트였습니다. 폴케 베르나도트는 북유럽 국가 출신의 포로들을 스웨덴을 통해 노르웨이나 덴마크로 돌아오게하는 계획에 매우 적극적이됩니다. 그는 독일측 사람들과 접촉하기 시작합니다. 독일측에서도 이런 계획에 대해 호의적인 사람들이 있었으며 결국 1945년 2월 폴케 베르나도트는 독일의 권력자중 하나였던 하인리히 히믈러와 접촉해서 독일내 수용소에 있는 북유럽 국가의 사람들을 돌려보내는데 합의하게 됩니다.


443px-Himmler45.jpg 하인리히 히믈러, 폴케 베르나도트와 그는 북유럽 출신 포로들을 스웨덴이 이송하는데 합의했었습니다.


포로들을 독일에서 스웨덴으로 옮기는 문제에서 모든 장비와 인력은 스웨덴에서 지원하기로 결정합니다. 스웨덴은 덴마크와 함께 이일을 진행했었는데 덴마크 역시 자국민들을 데려오기 위해 물자와 인력을 지원하게 됩니다. 이들은 포로수용소를 돌아다니면서 북유럽 국가 출신의 사람들을 버스에 태워서 육로로 이동한뒤 배를 타고 스웨덴으로 가는 루트를 잡았습니다. 이 작전은 매우 위험이 컸는데, 대량의 버스들이 이동할 경우 연합군에서 군사 물자의 이동으로 오인해서 폭격을 가할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때문에 포로들을 수송하는 버스들은 모두 "흰색"으로 칠해졌으며 적십자 마크를 그려넣었다고 합니다.(덴마크 측에서 지원한 버스들 역시 흰색으로 칠해졌는데 여기에는 대신 덴마크 국기가 들어갔다고 합니다.)

스웨덴 정부는 영국 정부에 폭격을 중단해달라고 요청을 했었는데 영국 정부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절대 폭격을 하지 않겠다는 확답을 주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실제로 오인해서 폭격을 가한 경우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Svedish_Red_Cross_buses_in_Germany_WW2%2C_possibly_near_Friedrichsruh.jpg White Buses
Swedish_Red_Cross_men_outside_their_buses.jpg 작전에 참가했던 스웨덴 적십자 요원들과 버스들


이 작전의 초반에는 극심한 부상을 당한 사람들을 옮길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때문에 이들을 남겨두고 왔어야했는데 열악한 수용소 환경에 이들을 남겨두고 오는 것에 대해 모두가 안타까워할 정도였습니다. 이후 폴케 베르나도트는 다시 협상을 통해 이런 중증 환자도 데려올수 있도록 협상을 취하게 됩니다.


이후 독일의 패망이 가까워오면서 연합군의 진격이 빨라지자, 이 작전은 훨씬더 서두르게 됩니다. 이들은 이제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을 한명이라도 더 구출하기 위해 최대한의 인력을 동원하게 됩니다. 그리고 북유럽 국가 사람들 뿐만 아니라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을 누구라도 데려오려고 노력했었습니다.


Female_prisoners_in_Ravensbr%C3%BCck_chalk_marks_show_selection_for_transport.jpg White Buses에 타기 위해 기다리는 여성 수감자들, 흰색 x표시는 그녀들이 수감자라는 표시라고 합니다.


이 작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구출되었고 고향으로 돌아갈수 있었다고 합니다. 전후 폴케 베르나도트는 이 작전에 대한 공으로 노르웨이에서 굉장히 환영을 받게 됩니다. 수많은 노르웨이 포로들이 독일에서 돌아올수 있었으며 전후에 노르웨이 왕실 가족들과 함께 열렬한 환영을 받았었습니다.


더하기

이 사건으로 명성을 더한 폴케 베르나도트는 팔레스타인 건국 문제에 있어서 UN의 중재자 역할을 받아들여서 팔레스타인 문제에 개입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의 중재안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이스라엘측 극단주의자들에게 암살당했습니다. 이 암살자들은 후에 이스라엘 정부의 핵심 인물들이었으며 이때문에 스웨덴에서는 폴케 베르나도트의 죽음에 이스라엘 정부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Yellin-Mor_%26_Shmuleiwitz_released.jpg 폴케 베르나도트와 그의 부관을 암살한 인물들(가운데 두명) 이름 읽기가 힘들어요-0-;;;



더하기 둘

폴케 베르나도트의 아내인 에스텔 맨빌은 미국의 상속녀 출신이었습니다. 결혼후 비스보리 백작부인 에스텔 베르나도트로 불렸던 그녀는 남편이 사망한뒤 남편이 열성을 다했던 스카웃 사업을 이어받아 헌신했으며, 남편을 기리는 재단을 설립해서 여러가지 사업을 했었습니다. 현 스웨덴 국왕의 손녀로 제 1 왕위계승자인 빅토리아 공주의 장녀이자 제 2왕위계승자인 에스텔 공주의 이름은 비스보리 백작부인 에스텔의 이름을 딴것이라고 알려져있습니다.

640px-Estelle_bernadotte_in_Helsinki_1949.jpg 스카웃 복장의 에스텔 베르나도트, 비스보리 백작부인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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