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아돌프 왕자의 죽음
구스타프 5세의 손자이자 구스타프 6세 아돌프의 장남이었던 구스타프 아돌프는 오래도록 "나치"와 관련이 있다고 알려져있었습니다. 특히 그는 2차대전무렵에 스웨덴에서 "독일 왕자"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몇몇 정황때문이었을 것인데 먼저 그의 장인이었던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카를 에두아르트가 열렬한 나치 당원이었다는 점이 가장 큰 원인일 것입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였지만 자신의 영지가 있던 독일에 충성했던 카를 에두아르트는 1차대전이후 독일이 공화국이 되면서 좌절한 왕족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많은 독일인들처럼 나치가 자신의 옛 영광을 되찾아 줄것이라고 여겼었으며 이에 가장 열렬한 나치 지지자중 한명이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장인이었기에 구스타프 아돌프 역시 의심의 눈초리를 받을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구스타프 아돌프 왕자의 할아버지였던 구스타프 5세 역시 초기에 나치에 대해 호의적 반응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많은 스웨덴 상류사회 사람들이 초기 나치에 호의적이었던 것 역시 구스타프 아돌프 왕자가 나치와 연관이 있거나 나치를 지지했었던 것이라고 추정하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왕족들처럼 구스타프 아돌프 왕자 역시 정치적 발언을 거의 자제했으며 공식적으로나 비공식적으로도 그가 나치를 지지햇다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에, 구스타프 아돌프 왕자가 나치를 지지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아마도 구스타프 아돌프 왕자도 다른 많은 이들처럼 초기 나치에 호의적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 역시 많은 이들처럼 나치의 실체를 알게 된 뒤로는 나치에 대해서 더이상 호의적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구스타프 아돌프는 어쨌든 생전에 이런 논란을 뒤로 하고 갑작스럽게 사망하게 됩니다.
1947년 1월 26일 구스타프 아돌프는 네덜란드의 율리아나 공주와 그녀의 남편인 베른하르트 공을 만나고 돌아오던 길에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하게 됩니다. 이 사고로 왕자를 비롯한 22명의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는데 여기에는 소프라노이자 배우였던 그레이스 무어도 타고 있었고 그녀 역시 이 사고로 사망했었습니다.
구스타프 아돌프 왕자의 죽음은 스웨덴 왕실에 큰 충격이었습니다.게다가 왕위계승문제도 복잡하게 흐르게 됩니다. 구스타프 아돌프의 막내아이이자 아들이었던 칼 구스타프는 태어난지 1년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제2왕위계승자였던 구스타프 아돌프가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인 칼 구스타프가 제 2왕위계승자가 되었는데, 이때 국왕이었던 구스타프 5세는 89살이었고, 제1왕위계승자였던 구스타프 6세 아돌프는 64살이었습니다. 게다가 구스타프 6세 아돌프의 나머지 세아들중 벨틸 왕자를 제외한 두 아들은 귀천상혼하는 바람에 만약 늙은 국왕과 제1왕위계승자가 칼 구스타프가 성인이 되기전 사망할 경우 왕위에 대해서 더 복잡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더하기
구스타프 아돌프 왕자의 아내였던 시빌라 왕자비는 다섯아이를 가진 과부가 됩니다. 그녀는 스웨덴어를 잘못했으며, 이때문에 스웨덴에서 제한된 사람들과 교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친정 집안 때문에 그녀 역시 남편처럼 2차대전중 "나치 지지자"라는 이야기를 들었었습니다.남편이 죽은뒤 시빌라 왕자비는 힘든 상황이었지만 최선을 다해 자신의 의무를 수행했다고 합니다.
이런 힘든 상황을 동정했던 사람이 시빌라의 시아버지였던 구스타프 6세 아돌프였다고 합니다 .그 역시 첫번째 아내가 죽은뒤 다섯아이들과 함께 홀아비로 지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홀로된 시빌라 왕자비는 의무에 집중하는 삶을 살았고 이것은 그녀가 아이들과 개인적 시간을 덜 내는 상황을 만들었던듯합니다. 훗날 칼 16세 구스타프는 어린시절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자라서는 어머니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었지만, 어린시절에는 늘 자신곁에 없던 어머니를 그리워했다고 회상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