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가레타,매르타,아스트리드 그리고 잉리드
19세가까지 스웨덴 왕가는 "벼락부자"라는 소리를 들었으며 대가문과의 혼담이 잘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칼 15세의 딸이었던 로비사 공주가 덴마크 왕위계승자와 결혼한 것은 사실 덴마크쪽의 사정때문이었는데, 당시 덴마크 왕가는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으며 이때문에 외동딸이어서 상속받을 재산이 많았던 로비사와의 결혼을 추진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사실 스웨덴에서 공주들은 많이 없었는데 한 세대에 한두명 정도였습니다. 칼 14세 요한은 아들 한명 밖에 없었으며, 오스카르 1세는 고명딸인 유셰니 공주밖에 없었습니다. 유셰니 공주는 결혼하지 않고 미혼으로 지냈었습니다. 칼 15세는 외동딸인 로비사밖에 없었으며, 칼 15세의 동생인 오스카르 2세는 아들밖에 없었습니다. 구스타프 5세는 아들만 셋이 있었으며, 구스타프 5세의 동생인 오스카르 왕자는 귀천상혼했고, 막내동생인 유셴 왕자는 미혼으로 지냈습니다. 구스타프 5세의 셋째 동생인 칼 왕자에게 세명의 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구스타프 5세에게는 손녀가 딱 한명 뿐이었습니다. 바로 구스타프 6세 아돌프의 고명딸인 잉리드였죠.
그리고 이 네명의 공주들은 주변 왕가들로 시집가게 됩니다.
칼 왕자의 장녀였던 마르가레타 공주는 친척이었던 덴마크의 오게 왕자와 결혼합니다. 마르가레타의 어머니인 잉에보리 왕자비는 덴마크 공주로 오게 왕자는 사촌관계였습니다. 아마 이때문에 둘은 만나게 되었고 사랑에 빠졌던듯합니다. 둘은 평온한 결혼생활을 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칼 왕자의 차녀였던 매르타는 역시 친척관계였던 노르웨이의 올라프 5세와 결혼합니다. 올라프의 아버지인 호콘 7세는 원래 덴마크 왕자로 매르타의 어머니였던 잉에보리 왕자비의 오빠이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이때문에 둘 역시 만나게 되었으며 혼기가 찼던 둘은 결혼을 결정했던듯합니다. 사실 매르타의 여동생인 아스트리드가 먼저 결혼했기에 매르타도 서둘러 결혼할 필요성이 있었을 듯합니다. 2차대전 당시 노르웨이의 국왕인 호콘 7세가 항복을 거부했기에 노르웨이는 독일에 점령당합니다. 매르타는 아이들과 스웨덴으로 가려했지만 독일의 눈치를 보던 스웨덴이 거부하는 바람에 겨우 미국으로 갔었습니다. 미국에서 그녀는 노르웨이를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고, 이런 상황은 미국내에서 2차대전 참전 여론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현 노르웨이 국왕은 매르타의 아들입니다.
칼 왕자의 막내딸이었던 아스트리드는 벨기에의 레오폴 3세와 결혼합니다. 둘의 결혼은 전형적인 정략결혼 형태였지만 둘은 매우 행복한 부부였습니다. 게다가 아스트리드는 벨기에에서 매우 인기 있는 왕족이 되었으며, 심지어 아스트리드가 결혼한 뒤 벨기에에서 스웨덴에 대한 호감도가 올라갈 정도였다고 합니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지만 아스트리드는 남편과 함께 드라이브를 하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했습니다. 현 벨기에 국왕은 아스트리드의 손자입니다. 또 현 룩셈부르크의 대공은 아스트리드의 외손자이기도 합니다.
구스타프 5세의 손녀이자 구스타프 6세 아돌프의 딸이었던 잉리드는 덴마크의 프레데릭 9세와 결혼했습니다. 신교도였으며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이기도 한 잉리드에 대해서 여러 혼담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중 한명이 바로 당시 웨일즈 공이었던 에드워드 8세(윈저 공작)이었습니다. 특히 영국 언론에서 매우 관심을 보였다고 알려져있습니다만, 이 혼담은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대신 잉리드는 덴마크의 왕위계승자인 프레데릭과 결혼했었습니다. 프레데릭의 아버지인 크리스티안 10세는 매우 강압적인 인물이었으며 이때문에 아들들도 아버지를 두려워했다고 합니다만, 잉리드는 이런 시아버지와 나름 사이좋게 지냈었다고 합니다. 2차대전이 일어나면서 덴마크 역시 독일에게 점령당하자 잉리드는 덴마크에서 독일 저항의 상징으로 알려졌으며 매우 사랑받는 왕족이 되었습니다. 현 덴마크 여왕은 잉리드의 딸입니다.
한세기 전만 하더라도 "벼락부자"취급받았던 스웨덴 왕가였지만 20세기가 되면서 여러 왕가와 통혼했으며 현 벨기에,노르웨이,룩셈부르크,덴마크 왕가는 스웨덴 왕가와 친척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