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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Sep 12. 2016

족보를 꼬아보아요 : 네번째

새어머니 오빠와 결혼하면?

포르투갈은 나폴레옹 전쟁 당시 매우 복잡한 정치 상황이 되는데, 포르투갈 왕가는 본국인 포르투갈이 프랑스의 침공을 받자 포르투갈을 버리고 식민지였던 브라질로 이주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은 전쟁이 끝난뒤 왕가가 포르투갈로 복귀하면서 정치적으로 복잡하게 흐르게 만드는데, 이 와중에 포르투갈의 왕위계승자였던 페드루는 브라질을 따로 분리해서 스스로를 "브라질의 황제"로 칭하게 됩니다. 그리고 후에 이것은 페드루가 포르투갈의 왕위는 딸인 마리아에게 물려주고, 브라질의 황위는 아들인 페드루에게 물려주는 상황을 만듭니다.


브라질의 황제 페드루 1세, 포르투갈의 국왕 페드루 4세


브라질의 황제 페드루 1세가 되는 페드루는 오스트리아 여대공이자 황제 프란츠 2세(오스트리아의 프란츠 1세)의 딸이었던 마리아 레오폴디네와 결혼했습니다. 둘 사이에서는 딸인 마리아와 아들인 페드루등이 태어났는데 마리아 레오폴디나와 페드루는 결혼 생활중 사이가 매우 나빠지게 됩니다. 페드루는 정부에 빠져서 아내를 등한시했고, 페드루의 정부였던 도미틸라 데 카스트로는 페드루의 총애를 등에 업고 마리아 레오폴디네를 무시했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마리아 레오폴디네가 공식석상에서 남편의 의견을 거부하면서 악화되는데, 페드루는 자신을 무시한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했는데 임신중이었던 마리아 레오폴디네는 이때 충격으로 아이를 조산한뒤 사망했었습니다.


마리아 레오폴지나 황후, 페드루 1세의 첫번째 부인


페드루 1세는 아내가 죽은뒤, 잠시 도미틸라와 헤어졌지만 다시 그녀와 만났고 함께 했었습니다. 하지만 페드루는 다시 재혼을 궁리했으며, 도미틸라가 아니라 유럽에서 새로운 신부감을 데려오려합니다. 

하지만 난봉꾼에 아내에게 폭력을 휘둘러 죽게 만들었다는 소문이 파다한 페드루에게 딸을 주려는 가문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페드루가 찾아낸 신부감은 로이히텐베르크 공작의 딸이었던 아멜리였습니다. 아멜리 드 보아르네는 외젠 드 보아르네와 그의 부인인 바이에른의 아우구스테의 딸이었습니다. 대 가문으로 시집가기는 좀 애매한 가문이었지만 그녀의 언니는 스웨덴의 왕위계승자와 결혼했고 이모들이 오스트리아 황후, 대공비, 프로이센 왕비,작센의 왕비 등이었기에 브라질 황제가 결혼할만한 신붓감이기도 했었습니다. 어쨌든 아멜리와 페드루의 결혼 조건중 하나가 도미틸라를 궁정에서 내 보내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아멜리 드 보아르네, 브라질의 아멜리아 황후, 페드루 1세의 두번째 부인


이렇게 1829년 아멜리는 브라질의 황제 페드루 1세와 결혼했습니다.


페드루와 아멜리의 결혼


아멜리가 결혼했을때 아멜리의 오빠인 아우구스테 드 보아르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로이히텐베르크 공작이었습니다만, 아멜리는 오빠와 함께 브라질로 가길 원했으며, 아우구스테는 동생과 함께 브라질로 갔었습니다. 


페드루 1세는 1826년 딸 마리아에게 포르투갈의 왕위를 물려줬습니다. 그런데 이전 왕위계승문제와 더불어 여성인 마리아가 왕위를 물려받는데 반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잇었습니다. 이에 페드루는 딸인 마리아를 동생인 미겔과 결혼시키기로 하고 왕위를 물려주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마리아가 숙부와 결혼해서 미겔이 조카와 함께 포르투갈을 통치하도록 한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겔은 이 약혼을 깨고 스스로 포르투갈의 국왕으로 선언하게 됩니다. 결국 포르투갈은 내전상황이 되었으며 1834년이 되어서야 마리아가 다시 포르투갈의 국왕이 되었습니다. 약혼자였던 숙부가 약혼을 깼기에, 마리아의 결혼문제는 다시 부상하게 됩니다. 포르투갈 여왕의 남편 자리는 많은 사람들이 눈독을 들일만한 자리였습니다. 하지만 포르투갈 입장에서 보면 대가문 출신의 남편감은 원치 않았습니다. 포르투갈이 독립성을 유지하고 여왕의 지위를 굳건히 하려면 작은 가문 출신의 남자가 더 괜찮은 결혼상대였던 것입니다.


포르투갈의 마리아 2세


그리고 선택된 인물은 바로 마리아의 새어머니인 아멜리의 오빠인 아우구스테 드 보아르네였습니다. 아마도 형제들이 모두 대가문과 통혼했었으며 이때문에 아우구스테 역시 대가문에서 신부를 맞이하려했을 것이며 포르투갈의 여왕보다 더 좋은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게다가 페드루 1세는 1834년 9월에 사망했기에 아마도 포르투갈쪽과의 연결고리를 강화시키기 위해 마리아 2세와의 결혼을 추진했었을 것입니다. 또 포르투갈 입장에서도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가문 정도면 적당한 가문이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우구스테 드 보아르네


1834년 포르투갈의 마리아 2세는 새어머니의 오빠였던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아우구스테 드 보아르네와 결혼했습니다. 


더하기

페드루 1세와 로이히텐베르크의 아멜리 사이에서는 1831년 딸인 마리아 아멜리아가 태어났습니다. 마리아 아멜리아 입장에서 보면 외삼촌이 이복 언니와 결혼한것이었죠.

브라질의 마리아 아멜리아

더하기 둘

로이히텐베르크의 아우구스테는 결혼 두달만에 사망했으며, 남편이 죽은 다음해에 마리아 2세는 서둘러 재혼해야했습니다. 재혼 상대는 작센-코부르크-고타-코하리의 페르디난트로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공의 사촌이었습니다. 이렇게 포르투갈 왕가와 영국 왕가가 친척관계가 되었습니다.


페드루 4세의 흉상 앞에 있는 페르디난트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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