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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Nov 16. 2016

베르나도트 : 프랑스에서의 삶(7)

1797년-정치적 문제

레오벤 조약 이후 베르나도트는 정치적 문제에 연결되기 시작한다. 이것은 나폴레옹이 정치적인 행보를 적극적으로 시작하는 것과 맞물려서 시작되는 상황이었다. 


1797년 3월 왕당파를 지지하던 사람들이 의회를 장악하게 된다. 특히 왕당파로 여겨졌던 피슈그뤼가 의회의 대표가 되었으며 이것에 대해서 공화국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이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 결국 후에 "프뤽티도르 18일의 쿠데타"라고 알려지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여기에 나폴레옹은 자신의 휘하 장군이었던 오주로를 파견했었다. 


이탈리아에서의 오주로


그러나 사실 나폴레옹이 파견한 휘하 장군은 오주로 한사람만이 아니었다. 바로 베르나도트 역시 나폴레옹의 명령으로 파리로 가고 있었다. 베르나도트는 이전에 뺏은 적의 군기들을 파리로 보내는 임무를 수행하러 갔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그를 보낸것은 과연 이런 단순한 임무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프뤽티도르 18일의 쿠데타에서 베르나도트는 전혀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복잡한 정치적 상황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베르나도트가 나폴레옹에 보내는 편지에서 보면 베르나도트는 쿠데타 자체에 대해서 부정적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베르나도트가 공화주의자였지만 온건한 인물이었으며 아마도 나폴레옹은 여러가지 변수를 고려해서 그를 보냈던듯하다. 하지만 베르나도트는 이런 행보에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베르나도트가 나폴레옹이 원하는 방향으로 행동하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정치적인 면"에 대해서 매우 미숙했던 인물이었다는 사실이 가장 클 것이다. 그는 바라스등을 만났었지만 바라스는 베르나도트에 대해서 흥미를 느꼈지만 자신과 함께 "큰 일"을 도모할 인물은 아니라고 판단했었다. 

또 다른 상황은 베르나도트가 클레베르의 영향을 강하게 받던 인물이라는 것이다. 클레베르는 이런식으로 군이 의회에 연결되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이런 사상은 베르나도트 역시 물려받았을 것이다.


프뤽티도르 18일의 쿠데타 (1797년 9월 4일)


베르나도트는 쿠데타 전에 파리에 도착해서 쿠데타가 일어난 한달 뒤까지 파리에 머물렀었다.  이 동안 베르나도트는 여러가지 상황을 겪게 되는데 특히 정부의 여러명의 사람들과 만나서 여러가지 소문의 주인공이 되었었다. 바라스는 베르나도트에게 남부쪽을 관할하는 두개의 군의 사령관 지위를 제의했었다. 하지만 베르나도트는 이탈리아군으로 돌아가길 원했었다. 이것은 클레베르가 상브르와 뫼즈군을 "가족"이라고 불렀던 것처럼 베르나도트 역시 자신의 부하들을 "가족"처럼 여겼기에 이들을 떠나는 것을 생각할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 나폴레옹이 있던 이탈리아 군에서는 베르나도트에 대해 여러가지 소문들이 떠돌았었다. 특히 그가 전쟁장관이 될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는데 이는 나폴레옹의 심기를 건들이는 일이기도 했다. 물론 베르나도트는 총사령관에게 이런 사실을 부인했었지만 이미 오주로가 독일쪽군의 총사령관직을 수락한 일에 대해서 나폴레옹은 심기가 불편했었기 때문에 베르나도트가 돌아오기 전까지 안심하지 못했고, 정부에 베르나도트를 돌려보내달라고 독촉하는 보고서를 보내기도 할 정도였었다.


나폴레옹


베르나도트는 이탈리아군으로 돌아왔다. 이탈리아군으로 돌아온 뒤 베르나도트는 삶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1797년 10월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를 저녁식사에 초대했었다. 그런데 베르나도트는 초대에 너무 일찍 도착해버렸다. 베르나도트는 일찍이라도 총사령관을 만나길 원했는데, 서재에 있던 나폴레옹은 기다리라는 소리에 화를 내는 베르나도트의 목소리를 듣고 식사시간까지 그와 함께 산책을 했었다. 산책하는 동안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과 이야기를 나눴으며 프랑스의 수많은 장군들에 대한 견해를 주고 받았다. 그리고 저녁식사시간에는 함깨 초대된 오스트리아 장군과 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나폴레옹의 모습을 보게 된다.

베르나도트는 이날 나폴레옹과의 저녁식사후 자신의 참모들에게 자신의 무식함에 대해서 한탄했다고 전해진다. 이에 참모들은 그는 겨우 35살이고 아직 젊으니 공부를 하면 된다고 이야기했었다. 이후 베르나도트는 늘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으며, 참모들과 자주 읽고 있는 책에 대해서 토론했었다. 그리고 2년뒤 베르나도트는 바라스와 정치를 논하고, 역사학자와 역사를 논할정도로 발전하게 된다. 후에 베르나도트는 이 모든 것이 1797년 10월 저녁식사에 일찍 갔었던 결과라고 이야기했었다. 

사실  이 일화는 너무 과장된 상황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적어도 베르나도트가 나폴레옹 휘하에서 복무한뒤 그의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는 것은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다. 클레베르와 함께 있을때의 베르나도트는 고지식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었다. 하지만 나폴레옹 휘하에서 복무한뒤 많은 사건을 경험하긴 했지만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당시 최고의 장군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그뒤 권력을 장악하는 방법을 보여주게 되는 나폴레옹과의 교류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부인할수 없을 것이다.


베르나도트


베르나도트는 아마도 자신보다 뛰어나고 야망이 가득했던 나폴레옹에 대해서 뭔가 말할수 없는 감정을 느꼈을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군인으로써 총사령관에게 충성하는 인물이었으며 나폴레옹의 군사작전은 아마 베르나도트가 경험했던 다른 총사령관들보다 뛰어났었기에 반항할 일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베르나도트와 나폴레옹의 사이가 처음으로 불편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바로 나폴레옹이 베르나도트의 부대를 재편성하면서였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나폴레옹과 베르나도트의 성향차이이며, 총사령관과 사단을 이끌고 있던 장군의 차이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나폴레옹에게 각각의 연대는 언제라도 다른 지휘관이 지휘할수 있는 재편성 가능한 부대라는 인식이었다. 그리고 그 인식은 합리적인 생각이었다. 하지만 베르나도트의 부대는 베르나도트에게 매우 특별한 부대였다. 베르나도트는 이들과 1794년부터 함께 싸웠었다. 전장에서 고락을 함께하고 목숨을 서로 의지했던 이들은 베르나도트에게는 가족과 같은 존재였으며 이들을 떠나보낸다는 것은 생각할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과 사이가 불편해질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1797년 말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의 명으로 자신의 부대가 찢어지는 모습을 보고서는 의욕을 상실했었다. 그는 이제 이탈리아군에 머무를 이유가 없었기에 다른 곳으로 가거나 퇴역하길 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치적 상황은 좀더 복잡해졌고, 정부는 베르나도트에게 이탈리아군의 총사령관 지위를 맡기려했다. 이에 대해서 나폴레옹은 반대를 했는데 아마도 나폴레옹이 보기에 총사령관으로써의 경험도 부족했고 재목도 아니었던 베르나도트에게 이탈리아군 총사령관을 맡기는 것이 옳지 않다고 여겼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베르나도트는 이 지위를 수락했었다. 하지만 이후  로마에서의 소요사태를 목격한 나폴레옹은 빈으로 대사를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고, 이 빈 대사 지위에 베르나도트를 추천했다.


1798년 전직 프랑스 왕립군 하사관이었으며, 이제 전직 공화국군 장군이 되는 베르나도트는 빈의 대사로 적의 중심지인 빈으로 향하게 된다.


그림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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